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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법맨 작성시간07.06.12 안장왕의 황후가 안장왕의 연애전 당시 데려온 백제처녀 한주가 아닙니까? 아무래도 안장왕 입장에서는 그렇게 아꼈을 거고 당연히 황후의 치맛바람이 거셌을 겁니다. 게다가 당시 고구려는 장수왕 이후 계속 태왕위 계승에서 정상적인 계승이 안 이루어졌고요. 문자명태왕이나 안원태왕, 안장태왕 모두 사망원인이 암살이라고 추정될 정도인데 당연히 귀족층의 세력이 강했을거고요 이들 귀족층 중 황후를 내세운 양원왕지지파와 그 동생 지지파로 나뉘었으니 내전이 터졌을 때 533년인가? 전사자만 2천이 그것도 패한 동생측에서 나왔죠. 아마 최소 3만 이상은 동원했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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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추모왕 작성시간07.06.12 그런데 문득 문자태왕~보장태왕까지 고구려를 보니 고구려는 결국 고대국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로마제국 공화정의 한계가 결국 귀족층간의 갈등이었듯이 고구려 역시도 귀족층간의 알력때문에 마지막 순간 붕괴된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장수왕때의 대규모 귀족숙청 그당시 신라로 투항하던 고구려스님이 온나라가 시체로 가득찼다고 했습니다. 그이야기는 그 숙청이 내전으로 까지 번졌다는 이야기가 되죠. 그리고 문자태왕이후에 귀족층의 반격이 시작되고, 안장왕, 안원왕때에는 귀족들끼리 내전을 일으키는 사태가 발생하게 되죠. 이러한 상태는 멸망순간까지도 지속되죠. 참으로 아쉬운 일이라고 할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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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 카이사르씨 작성시간07.06.12 로마공화정의 한계는 귀족간의 갈등이 아니라 비귀족 측, 평민층과의 갈등 문제였습니다. 귀족간에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기껏해야 개인적인 갈등 정도였던 것에 반해, 귀족층과 평민층간의 갈등은 서로 다른 계급간의 갈등문제였던 만큼 공동체의 분열과 내분의 위험을 안고 있었습니다. 카이사르가 원로원과 갈등을 빚었던 가장 큰 이유는 몰락귀족이었던 카이사르의 정치적 기반이 평민층 이었고 이에 따라 카이사르가 단행한 여러 정책들과 그 수단들이 평민층의 이해에는 부합되는 반면에, 귀족층의 이해와 기득권, 추구하는 가치와 방향에서 정면으로 충돌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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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 조선국왕 인종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07.06.13 꼭 남자들이 기록해서 왜곡된 시각이라 해도 도대체가 멀쩡한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여후나 측천무후도 정치 잘했다고 하지만 정상인처럼 보이지는 않는군요..우리나라도 문정왕후랑 명성황후 도대체가 정상인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꼭 그렇게 무리수를 둬가면서 해야 하나요? 여자가 정치하는 것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순리가 있는데 뭐 일부러 욕먹고 싶어서 그런 거 같군요..개인적으로 위에 열거한 사람들 중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뛰어난 정치가 따지면 여후,측천무후 정도는 평가할 수 있는데 그건 정치가로서지 도대체가 정상인처럼 보이지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