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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수 허목의 동사(東事) 단군세가 번역본 (한국고전종합db 에서 퍼옴)

작성자김용만|작성시간18.02.06|조회수432 목록 댓글 3

기언 제32권 외편 / 동사(東事) 1

단군세가(檀君世家)

[DCI]ITKC_BT_0344A_0340_020_0010_2013_002_XML DCI복사 URL복사
상고(上古)의 구이(九夷)가 살던 시절 초기에 환인씨(桓因氏)가 있었고, 환인이 신시(神市)를 낳았다. 신시가 처음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가르치니, 백성들이 그에게 귀의하였다.
신시가 단군(檀君)을 낳으니, 단군이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거처를 정하고, 호를 단군이라고 하였으며 처음으로 국호(國號)를 두어 조선(朝鮮)이라고 하였다. 조선이란 ‘동쪽 끝 해가 뜨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이름이다. 혹은 말하기를,
“선(鮮)은 산(汕)이다. 그 나라에 산수(汕水)가 있기 때문에 조선이라고 한다.”
하였다. 평양(平壤)에 도읍하니, 도당씨(陶唐氏)가 즉위한 지 25년이 되는 때이다.
단군씨가 부루(夫婁)를 낳았다. 혹은 말하기를,
“해부루(解夫婁)의 어머니는 비서갑(非西岬)의 딸이다.”
하였다. 우(禹)가 수토(水土)를 평정하고 도산(塗山)에서 제후들을 회합할 때에 부루가 도산씨에서 우에게 조회하였다.
후에 단군씨가 거처를 당장(唐藏)으로 옮겼다. 상(商)나라 무정(武丁) 8년에 이르러 단군씨가 죽었다. 송양(松壤) 서쪽에 단군의 무덤이 있다. - 송양은 지금의 강동현(江東縣)이다. - 혹은 말하기를,
“단군이 아사달(阿斯達)로 들어갔다.”
하였는데, 언제 죽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태백산과 아사달산에 모두 단군의 사당이 있다.

부루가 즉위하여 북부여(北扶餘)를 세웠다. 부루가 곤연(鯤淵)에 기도하여 금와(金蛙)를 얻었는데, 그 모습이 금개구리와 비슷하여 이름을 금와라고 한 것이다. 부루의 시대에 상나라가 망하자 기자가 조선으로 왔다. 그 후에 주(周)나라의 덕이 쇠퇴하니, 공자가 구이에 살고 싶어 하였다.

부루가 죽고 금와가 뒤를 이어 가섭원(迦葉原)으로 도읍을 옮기고 동부여(東扶餘)를 세웠다. 금와 말에 진(秦)나라가 천하를 병합하자 진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동쪽 경계로 들어와 진한(秦韓)을 세웠고, 한(漢)나라 고후(高后) 때에 위만(衛滿)이 조선을 점거하자 조선후(朝鮮侯) 기준(箕準)이 남쪽으로 달아나 금마(金馬)에 이르러서 마한(馬韓)을 세웠다. 한나라 효무제(孝武帝) 때에 예맥(薉貊)을 공략하여 예맥의 군왕 남려(南閭)가 항복하자, 처음에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였다가 승상 공손홍(公孫弘)의 계책을 써서 혁파하였다.

금와가 대소(帶素)에게 전위(傳位)하였다. 대소가 강대함을 믿고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가 끝내 격살당하고, 동생 갈사(曷思)가 대신 즉위하였다. 손자 도두(都頭)에 이르러 고구려에 항복하니, 동부여가 망하였다. - 갈사는 왕의 이름이 아니다. 갈사에 도읍을 정하였기 때문에 호를 갈사라고 하였다. -
이때의 연대를 상고해 보면 한나라 왕망(王莽)의 시대에 해당한다. 환인과 신시의 시대는 고찰할 데가 없고, 단군의 치세는 도당씨 25년부터 우(虞)나라 순 임금과 하(夏)나라 우 임금을 거쳐 상(商)나라 무정(武丁) 8년에 이르기까지 1048년이고, 해부루 이후부터 갈사가 망한 왕망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또 1000년이다. 그러고도 후손이 있어 진(晉)나라와 통하였다.

금와가 우발수(優浡水)의 여자를 사랑하였는데, - 우발은 늪〔澤〕 이름이다. 태백산 남쪽에 있다. - 우발수의 여자가 몸을 비추는 해그림자에 감응되어 주몽(朱蒙)을 낳았다. 주몽의 작은아들을 온조(溫祚)라고 한다. 단군씨의 후손에 해부루가 있고, 해부루의 후손에 금와가 있고, 금와의 후손에 주몽과 온조가 있어 고구려와 백제의 시조가 되었으니, 모두 단군씨에게 뿌리를 둔 것이다.

부여는 현도(玄菟)에서 북쪽으로 1000여 리 지점에 있었다. 남쪽으로는 선비(鮮卑)와 접경을 이루고 북쪽으로는 약수(弱水)까지 이르러 면적이 사방 2000리이고, 성읍(城邑)과 궁실(宮室)이 형성되어 있었다. 토지는 오곡에 알맞고, 사람들은 용맹하고 강한 것을 좋아하였다. 회동(會同)하고 읍양(揖讓)하는 예가 있어 중국과 비슷하며, 사신이 되어 나가는 자는 금계(錦罽)로 만든 의복을 입고 금과 은으로 허리띠를 장식하였다. 나라의 법은,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 다음 집을 몰수하고, 남의 물건을 훔친 경우에는 훔친 물건의 12배를 갚도록 하고, 남녀가 간음하거나 부인이 질투한 경우에는 모두 사형에 처하였다. 전쟁이 일어나면 소를 잡아 하늘에 제를 올리고, 그 소의 발굽을 사용하여 길흉을 점치되, 발굽이 떨어지면 흉하고 붙으면 길하게 여겼다.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치르되, 외곽(外槨)만 쓰고 내관(內棺)은 쓰지 않았으며, 순장(殉葬)으로는 살아 있는 사람을 쓰고, 거상(居喪) 중에는 남녀가 모두 흰옷을 입었다. 그 지역에서는 좋은 말, 담비 가죽, 표범 가죽, 아름다운 구슬이 생산되었고, 나라가 풍요롭고 부유하였다. 국왕의 인장은 ‘예왕지인(獩王之印)’이라고 되어 있으니, 그 나라가 옛 예맥의 지역이기 때문이다.
진 무제(晉武帝) 때에 중국과 교통하여 공물을 바쳤다. 태강(太康) 6년에 모용외(慕容廆)의 습격을 받아 왕 의려(依慮)는 자살하고 그 자제들이 옥저(沃沮)로 달아나 몸을 보전하였다. 진 무제가 동이 교위(東夷校尉) 선우영(鮮于嬰)이 구원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선우영을 파면하고 하감(何龕)으로 대신하였다. 다음 해에 뒤를 이어 즉위한 왕 의라(依羅)가 하감에게 가서 구원을 요청하니, 진 무제가 독우(督郵) 가침(賈沈)을 파견하여 모용외의 무리를 격파하였다. 이에 의라가 나라를 수복할 수 있었다. 이 뒤로도 모용외가 침략하여 부여 사람들을 약탈해 중국에 팔아넘겼는데, 진 무제가 조서를 내려 관가의 재물을 풀어서 몸값을 물고 돌려보내 주었으며, 사주(司州)와 기주(冀州)에 영을 내려 인신매매를 금지하였다.

숙신씨(肅愼氏)는 일명 읍루(挹婁)라고도 한다. 불함산(不咸山) 북쪽에 있는데, 동쪽으로는 대해(大海)에 닿아 있고 서쪽으로는 구만한(寇漫汗)과 접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약수까지 이르렀다. 깊은 산골에 위치해 있어서 수레나 말을 타고서는 다닐 수 없었다. 여름에는 나무 위에 움막을 짓고 살았으며 겨울에는 굴속에서 살았다. 아버지와 아들이 대를 이어 군장(君長)이 되었다.
문자는 없었고, 말로 약속하였다. 소와 양은 없었고, 돼지를 길러 고기는 먹고 가죽은 옷으로 입었으며 털은 짜서 베를 만들었다. 각상(𨚷常) - 숙신씨 지역에 나는 나무 이름이다. - 이라는 나무가 있으니, 중국에 성왕(聖王)이 이어서 즉위하면 나는 나무로, 그 껍질로는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었다. 와격(瓦鬲)을 만들었는데, 곡식 4, 5승(升)을 담았으며, 그것을 사용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앉을 때에는 다리를 뻗고 앉았다. 소금과 철이 없었으며, 나무를 태워 재를 만든 다음 물을 부어 두었다가 그 즙을 취하여 먹었다.
남녀 모두 편발(編髮)을 하였고, 1자가량 되는 포첨(布襜)을 만들어 앞과 뒤를 가렸다. 부인은 정숙하고 미혼인 여자는 음란하였으며, 젊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늙은 사람을 천시하였다. 사람이 죽으면 죽은 그날로 들판 한가운데에 장사 지내되, 나무를 엇비슷이 세워 곽(槨)을 만들고 돼지를 죽여 그 위에 쌓아 놓아 이로써 죽은 이를 보내는 예로 삼았다. 흉포하고 사나운 것을 좋아하여 근심과 슬픔이 없는 것을 서로 숭상하였으며, 부모의 죽음을 당하여 곡하지 않는 남자를 장사(壯士)로 여겼다. 도둑질한 자를 보면 훔친 물건의 많고 적음을 막론하고 모두 죽였다.
석노(石砮)와 피골(皮骨)로 된 갑옷이 있었으며, 단궁(檀弓)은 크기가 3자 5치이고 호시(楛矢)는 크기가 1자 조금 넘었다. 그 나라 동북쪽에서 생산되는 석노는 예리하기가 철을 뚫을 정도인데, 그 나라 사람들은 이 석노를 가지게 되면 반드시 먼저 귀신에게 제사 지냈다.
주나라 무왕 때에 호시와 석노를 공물로 바쳤고, 주공(周公) 단(旦)이 성왕(成王)을 보필할 때에도 사신을 보내 입조경하(入朝慶賀)하였다. 위(魏)나라 경원(景元) 말엽에 호시, 석노, 활, 갑옷, 담비 가죽 따위를 공물로 바쳤으며, 위나라에서는 금계(錦罽), 면백(緜帛), 녹계(傉鷄)를 왕에게 하사하였다. 진 무제(晉武帝) 때에 다시 입공(入貢)하였고, 원제(元帝) 때에 석노를 공물로 바쳤으며, 성제(成帝) 때에 이르러 석진(石晉)에 조회하고 이르기를,
“소와 말이 서쪽을 향해 자는 것을 3년 동안 보았습니다. 이 때문에 대국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였다.
[주-D001] 구이(九夷) : 
동방에 위치한 9종의 민족을 말한다. 구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국역 동사강목》 부록 상권 상 〈고이(考異)〉에서는 《후한서(後漢書)》 및 《논어정의(論語正義)》의 설과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인용된 신라 승려 안홍(安弘)의 설을 소개하고, 구이의 명칭에 대한 시대적 고찰을 통해 《후한서》의 설을 근거 있는 것으로 보았다. 《후한서》 〈동이전(東夷傳)〉에 수록된 구이는 견이(畎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황이(黃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현이(玄夷), 풍이(風夷), 양이(陽夷)이다.
[주-D002] 신시(神市) : 
《삼국유사》 〈고조선(古朝鮮)〉에 “환인(桓因)의 서자 환웅(桓雄)이 태백산(太白山) 정상의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와 그곳을 ‘신시’라고 하였으니, 이 사람이 환웅천왕(桓雄天王)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시는 환웅이 처음 건설한 도시인데 여기에서는 환웅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태백산을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一然)은 지금의 묘향산(妙香山)이라고 하였다.
[주-D003] 산수(汕水) : 
《사기》 권115 〈조선열전(朝鮮列傳)〉의 주에 “조선에 습수(濕水), 열수(洌水), 산수가 있는데, 세 강이 합하여 열수가 되었다.” 하였는데,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산수심원기(汕水尋源記)〉에서 “열수는 지금의 이른바 한수(漢水)이니, 이러고 보면 산수(汕水)와 습수(濕水)는 남강과 북강 두 강이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겠다. 옛사람이 나누어 지적해 놓지 않아 근거할 만한 문적은 없지만, 북강의 물은 모두 뭇 산의 골짜기에서 나오니 이것이 산수이고, 남강의 물은 모두 원습지(原隰地)에서 나오니 이것이 습수이다. 글자의 의미가 명확하여 서로 혼동되지 않거니와, 직접 답사해 보면 전연 의심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단정 지어 춘천(春川)과 낭천(狼川)의 물을 산수로 여긴다.” 하였다. 《국역 다산시문집 제22권 잡평》
[주-D004] 평양(平壤) : 
《삼국유사》 〈고조선〉에는 평양성(平壤城)으로 되어 있는데, ‘지금의 서경(西京)’이라고 주가 달려 있다.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권 〈경도 상(京都上)〉에는 “서경은 지대가 평탄하고 넓어 이름을 평양이라고 하였으며, 나라가 생길 때부터 이미 물에 임해 성을 높이 쌓았으니, 평양성은 가장 오래된 것으로 기자가 처음 봉해질 때 이미 있었다.” 하였다.
[주-D005] 도당씨(陶唐氏) : 
요(堯) 임금의 호이다. 《십팔사략(十八史略)》 〈오제(五帝)〉의 주에 “요 임금이 처음에 당후(唐侯)였다가 나중에 천자가 되어 도(陶)에 도읍하였기 때문에 호를 도당씨라 한다.” 하였다.
[주-D006] 비서갑(非西岬)의 딸 : 
대본은 ‘非西岬女’이다. 《삼국유사》 〈기이 제1 고구려〉에 〈단군기(檀君記)〉의 내용을 인용하여 “단군이 서하의 하백의 딸과 친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부루(夫婁)라고 하였다.〔君與西河河伯之女要親 有産子 名曰夫婁〕”라고 하였고, 《동사강목》,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다른 자료에서는 대부분 ‘비서갑하백지녀(非西岬河伯之女)’라고 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비서갑은 지명으로 서하의 이칭인 듯하다. 서하가 어디를 말하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한국문집총간 249집에 수록된 《자저(自著)》 권1 〈광한부(廣韓賦)〉에 “서갑의 아름다운 여자를 배필로 맞이하고〔配西岬之佚女〕”라고 한 구절이 있는데, 그 주에 “서갑은 지금의 영암(靈巖)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무엇을 근거로 하였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여기에서는 비서갑을 하백의 이칭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지명으로 볼 경우 ‘여(女)’ 자를 〈광한부〉에서처럼 ‘여자’로 해석해야 하는데, 다른 자료에 대부분 ‘하백의 딸’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D007] 당장(唐藏) : 
《삼국유사》에는 장당경(藏唐京)으로 되어 있다. 《국역 성호사설》 제15권 〈화령(和寧)〉에 “당장경(唐莊京)은 황해도 문화현(文化縣)에 있다.” 하였다.
[주-D008] 상(商)나라 무정(武丁) 8년 : 
상나라는 중국 탕(湯) 임금이 세운 나라로 은(殷)이라고도 한다. 무정은 쇠퇴해 가던 상나라를 다시 부흥시킨 왕으로 후에 고종(高宗)으로 일컬어진 인물이다. 이때는 중국 연표에 의하면 기원전 13세기에 해당된다.
[주-D009] 아사달(阿斯達) : 
《국역 성호사설》 제26권 〈삼성사(三聖祠)〉에 “아사(阿斯)는 우리말로 구(九)이고, 달(達)은 우리말로 월(月)이니, 지금의 구월산(九月山)이 이것이다.” 하였다. 구월산 역시 황해도 문화현에 있다.
[주-D010] 가섭원(迦葉原) : 
하서량(河西良)이라고도 한다.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제5집 정법집 제3권 경세유표 권3 〈군현분예(郡縣分隷)〉에 “가섭은 하서(河西)의 소리가 전이된 것이니, 지금의 강릉(江陵)이다.” 하였다.
[주-D011] 한(漢)나라 고후(高后) 때 : 
고후는 고황후(高皇后) 여씨(呂氏)이다. 한 고조(漢高祖)의 비로 혜제(惠帝)를 낳았다. 혜제가 죽고 태자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고후가 임조칭제(臨朝稱制)하였는데, 이 시기를 말한다. 《漢書 卷3 高后本紀》
[주-D012] 금마(金馬) : 
전라도 익산(益山)의 옛 이름이다.
[주-D013] 승상 공손홍(公孫弘)의 계책 : 
공손홍이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있을 때에 “중국을 피폐하게 하여 쓸모없는 땅을 받든다.”라는 이유로 창해군의 혁파를 주장한 것을 말한다. 《漢書 卷58 公孫弘傳》
[주-D014] 갈사에 …… 때문에 : 
《국역 동사강목》 제1하 임오년에 “부여가 왕의 동생을 세워 왕으로 삼고 갈사수(曷思水) 가에 도읍하였다.” 하였고, 한국문집총간 247집에 수록된 《수산집(修山集)》 권4 〈선춘령기(先春嶺記)〉에 “갈사왕(曷思王)이 거처로 삼은 갈사수는 지금의 소하강(蘇下江)인 듯하다.” 하였다. 소하강은 백두산 동북쪽에 있다고 한다.
[주-D015] 우발수(優浡水)의 여자 : 
한국문집총간 256집에 수록된 《무명자집(無名子集)》 시고(詩稿) 권6 〈동사를 읊다〔詠東史〕〉에 “금와가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만났는데, 그 여자가 말하기를 ‘나는 하백의 딸이고, 이름은 유화(柳花)이다.’라고 하였다.” 하였다.
[주-D016] 태강(太康) 6년 : 
태강은 진 무제(晉武帝)의 연호로, 6년은 서기 285년이고, 신라(新羅) 유례왕(儒禮王) 2년에 해당한다.
[주-D017] 숙신씨(肅愼氏)는 …… 한다 : 
《국역 다산시문집》 제14권 〈강역고의 권단에 제함〉에 “우(虞), 하(夏), 은(殷), 주(周) 때에는 ‘숙신’이라고 하였고, 한(漢)나라 때에는 ‘읍루(邑婁)’, 당(唐)나라 때는 ‘말갈(靺鞨)’, 송(宋)나라 때는 ‘여진(女眞)’, 지금은 ‘오랄영고탑(烏喇寧古塔)’이라고 한다.” 하였다.
[주-D018] 불함산(不咸山) : 
백두산(白頭山)의 옛 이름이다. 《국역 다산시문집》 제13권 〈백두산을 유람하러 가는 진택 신공 광하를 전송하는 서〉에 “백두산은 《산해경(山海經)》에서 말한 불함산이고, 지지(地志)에서 말한 장백산(長白山)이다.” 하였고, 《국역 동사강목》 부록 하권 〈개마대산고(蓋馬大山考)〉에 “개마대산이 백두산인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조위(曹魏) 시대에는 불함산으로 일컬었다.” 하였다.
[주-D019] 각상(𨚷常) : 
《진서(晉書)》 권97 〈숙신씨열전(肅愼氏列傳)〉에는 ‘낙상(雒常)’으로 되어 있다.
[주-D020] 와격(瓦鬲) : 
흙을 구워 만든 솥의 일종으로 음식을 끓이는 데에 쓴다.
[주-D021] 편발(編髮) : 
머리카락을 땋아 내려뜨린 것을 말한다.
[주-D022] 포첨(布襜) : 
베로 만든 앞치마 따위를 말한다. 《진서》 권97 〈숙신씨열전〉에는 ‘이포작첨(以布作襜)’으로 되어 있다.
[주-D023] 부인은 : 
《진서》 권97 〈숙신씨열전〉에 의거하여 대본의 ‘夫’를 ‘婦’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24] 위(魏)나라 경원(景元) 말엽 : 
경원은 위(魏)나라 원제(元帝)의 연호로, 서기 260년에서 265년에 해당된다. 《진서(晉書)》 권97 〈숙신씨열전〉에는 이 앞에 주나라 성왕 이후로 1000여 년간 진(秦)나라, 한(漢)나라처럼 융성한 나라가 있었어도 중국과 통하지 못했다는 내용이 있다.
[주-D025] 성제(成帝) …… 조회하고 : 
석진(石晉)은 석경당(石敬塘)이 세운 오대(五代) 시대 후진(後晉)의 이칭으로 서기 936년에서 946년까지 존속했던 나라이다. 진 성제(晉成帝)의 재위 기간은 서기 325년에서 342년으로, 진 성제와 석진은 시대가 맞지 않다. 《진서》 권97 〈숙신씨열전〉에 “성제 때에 이르러 석계룡(石季龍)에게 공물을 바쳤다.”라고 되어 있는데, 석계룡은 진 원제(晉元帝) 때 후조(後趙)를 세운 석륵(石勒)의 종자(從子)로 후에 석륵의 아들을 쫓아내고 즉위하여 연호를 건무(建武)로 바꾼 인물이니, 이때가 진 성제 함강(咸康) 1년이다. 따라서 여기의 석진은 석계룡의 오류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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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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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김용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8.02.06 제발 단편적인 단어 몇개에 혹해서, 자신의 입론에 마구 갖다 붙이지 말고, 원문을 제대로 찾아서 확인해보기 바랍니다.
  • 작성자해란 | 작성시간 18.02.07 거참. 이상하군요.

    `단군의 치세는 도당씨 25년부터 우(虞)나라 순 임금과 하(夏)나라 우 임금을 거쳐 상(商)나라 무정(武丁) 8년에 이르기까지 1048년이고, 해부루 이후부터 갈사가 망한 왕망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또 1000년이다.`

    위 원문과 같이 허목은 단군 치세가 1048 년이고 또 1000 년의 시작을 해부루라고 하였는데,
    해부루는 해모수 이후에 등장하는 동부여의 왕이고 시기적으로도 고구려 건국 직전이니 허목이 단군 왕검의 아들인 부루의 후손과 2000 여 년 후에 나타나는 해부루를 혼동한 것은 아닌지 아니면 원문이나 번역에 착란이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 답댓글 작성자신농 | 작성시간 18.02.07 사실 단군신화를 처음 수록한 일연도 이미 <삼국유사>에서 부루가 단군의 아들이고, 주몽도 단군의 아들이라는 기록 때문에 혼선을 빚어 부루=해부루로 보고 해부루를 해모수의 아들이라고 하는 기록을 남긴 바 있습니다. 동부여 신화에 따르면 해모수는 해부루를 가섭원(동부여)으로 내쫓고 북부여를 세운 임금이기 때문에, 해부루가 해모수의 아들이 될 수 없는데 말이죠. 이러한 혼동이 조선시대에도 지속되어서, <동국여지승람>에서도 짬뽕된 인식이 계속 왕왕 나타나게 됩니다. 허목의 혼동 또한 이와 같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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