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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토론방

문무왕이 안승에게 보덕왕에 책봉하는 말에서

작성자아시아의 게르만족|작성시간03.10.26|조회수371 목록 댓글 10
함형(咸亨) 원년 경오(670) 가을 8월 1일 신축에 신라 왕은 고구려 후계

자 안승에게 책봉의 명을 내리노라. 공(公)의 태조 중모왕(中牟王)은 덕

을 북산(北山)에 쌓고 공을 남해(南海)에 세워, 위풍이 청구(靑丘)에 떨

쳤고 어진 가르침이 현도를 덮었다. 자손이 서로 잇고 대대로 끊어지지

않았으며 땅은 천리를 개척하였고 햇수는 장차 800년이나 되려 하였다.

남건(男建)과 남산(南産) 형제에 이르러 화가 집안에서 일어나고 형제간

에 틈이 생겨 집안과 나라가 멸망하고 종묘 사직이 없어지게 되었으며

백성들은 동요하여 마음 의탁할 곳이 없게 되었다. 공은 산과 들에서 위

험과 곤란을 피해 다니다가 홀몸으로 이웃 나라에 의탁하였다. 떠돌아다

닐 때의 괴로움은 그 자취가 진문공(晉文公)과 같고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킴은 그 사적이 위후(衛侯)와 같다. 무릇 백성에게는 임금이 없을

수 없고 하늘은 반드시 사람을 돌보아 주심이 있는 것이다. 선왕의 정당

한 후계자로는 오직 공이 있을 뿐이니, 제사를 주재함에 공이 아니면 누

가 하겠는가? 삼가 사신 일길찬 김수미산 등을 보내 책명을 펼치고 공

을 고구려 왕으로 삼을지니, 공은 마땅히 유민들을 어루만져 모으고 옛

왕업을 잇고 일으켜 영원히 이웃 나라로서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야 할

것이다. 삼가하고 삼가할지어다. 아울러 멥쌀 2천 섬과 갑옷 갖춘 말

한 필, 무늬비단[綾] 다섯 필과 명주[絹]와 가는 실로 곱게 짠 베[細

布] 각 10필, 목화솜[綿] 15칭(稱)을 보내니 왕은 그것을 받으라.


여기서 중모왕은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 추모왕 고주몽을 말하는 것이고 덕을 북산에 쌓고 공을 남해에 세워 이 뜻이 무엇인가요?

북산에 쌓다 남해에 공을 세우다가 어떤 의미인가요? 고구려 역대왕의

영토업적들인것 같기도 합니다

혹시 북산은 멀리 태흥안령 산맥중에 어떤 산을 말하는 것이고 남해(광개토대왕때의 가야정벌)는 말 그대로 남해를 말하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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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JEFF hardy | 작성시간 03.10.28 우리 고대사는 잘 모르는게 더 많습니다. 확실히 기록으로 보이는게 고려일지는 모르지만 고구려의 염색 기술이 뛰어났음을 볼때 우리 삼국에 있었을 가능성이야 왜 없을까요...
  • 작성자호태왕 | 작성시간 03.10.28 목화에서 추출한 솜은 옷의 재료, 즉 옷감입니다. 염색기술이 뛰어났다고 목화가 있었다는 건 논리적 비약이 심하지요. 삼베나 모시에도 염색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정통 사료에 근거한 것과 개인적 추측, 둘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신빙성이 있을가요? 우리 역사라고 해서 무조건 미화시키는 게 바람직한건지...
  • 작성자박혁거세 | 작성시간 03.10.28 제 추측이지만 혹시 문익점이 들여온 목화솜이 우수종자 목화솜이 아닐까 싶습니다. 심지어 기억은 안나지만 문익점 목화솜이 들어오기 이전에 솜옷을 입었다는 내용이 있더군요.
  • 작성자안양사랑 | 작성시간 03.10.28 문익점 이전에 한반도에 '목화'가 있었는지는 의문스럽지만, 삼국지 위서 동이전이나 몇몇 사료들을 보면 삼국 시대의 한반도에 '면'(綿)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더군요. 문익점 이전에 목화가 없었다면 이 '면'은 목면이 아닌 뭔가 다른 직물이라는 의미인데.....
  • 작성자★明治好太王★ | 작성시간 03.10.28 저도 그런 기록들에 근거해서 목화가 고려 이젼에 들어온거라고확신 한답니다...^^;; 아직 섣부른 단정은 무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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