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인구에 대해 20여만호 혹은 69만호 등의 기록 등으로 고대 삼국시대 인구를 추정해보고자 하는 노력들이 많이 있다.
본인은 관련 논문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객관적인 자료를 찾으려고 해보았는데..전근대의 가족구조가 크게 변하지 않았을것이라는 가정으로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인구구조에 대한 자료를 통하여 1戶당 인구수를 추정해 보기도 하였다. 물론 많은 학자들에 의해 선행된 연구이겠으나...
조선시대 각 시대의 호당 인구수에 대한 수치는 대략 1호당 3명에서 5명 정도로 시대마다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특징을 보이는 것은 한양의 호당 인구가 지방의 호당 인구보다 월등히 많다는 것이다. 이것이 수도와 지방의 한 차이라고 할 수 있음을 전제로 들고 넘어가자면..(물론 조선시대에 그랬다고 하여 고구려시대에도 그랬다는 보장은 없다.)
신라 촌락문서에서 1호당 인구는 대략 9~11명 정도였다. 그러나 이것은 표본의 수가 매우 적었기 때문에 기록된 69만호라는 수치에 적용하기는 무리라고 생각된다. 촌락문서가 비록 자세한 인구분석자료임에도 불구하고 촌락문서에 기재된 인구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최소 촌 이상의 규모에서 호당 인구의 평균수치를 뽑아낼 수 있다면 보다 실제에 가까운 인구를 추정해 낼 수 있을 것이다.
69만 호라는 인구수에 관하여 어떤 이는 호를 口로 해석하여 69만명이라고 해석하기도 했으나 이것은 분명 잘못된 해석이다. 고구려의 군사가 전성기에 최소 30만명임을 인지한다면 69만명이라는 인구수는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69만호라는 인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문제인데..대략적인 4명 내지는 5명으로 계산하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당장 수십만명의 호차범위가 나온다.
호구를 조사한다는 것은 民의 입장에서 民의 권리보장이나 행복추구와는 관계 없이 지배층의 효과적인 조세수취와 役의 부담을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즉, 국가 재정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것이 보다 복잡화되고 관례화 되거나 혹은 단순화 됨에 따라 3丁1戶의 단편적 계산방식도 발생하였고, 丁男(실질적인 조세 및 부역부담자)에 대한 정보를 국가가 파악하고 효율적으로 관리해야 할 필요성이 국가적으로 요구된다.
따라서 고대라고 하여 인구에 대한 조사가 미흡하다거나 허술하다고는 말할 수 없고 고대에도 인구에 대한 조사가 중요한 업무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전제하고서 이해하고자 한다.
물론 고구려는 고구려민 뿐만이 아니라 정복지의 민에 대한 호구정보도 보유하고 있었을 것이나 이것을 기존 고구려민과 피정복민을 어떻게 파악, 관리하였는지에 대한 단상은 자료가 충분치 못하기 때문에 정확한 모습은 그리기 어렵다. 그러나 광개토대왕비문에 징발한 인구기록이나 촌락문서에 기재된 인구분류..단편적으로 등장하는 고대국가의 인구수는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인구를 파악하고 관리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인구차악에는 많은 변수가 존재한다. 노예도 인구에 포함이 되었는지..분가한 가족도 戶에 포함이 되는지 아닌지..그리고 丁을 기준으로 파악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여러가지 분류기준을 상정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떠한 기준으로 적용한다 하더라도 그 기준으로 산출한 인구는 최소한 실제 당대 인구보다는 같거나 적었다는 사실을 전제하여야 한다.
즉..실제 인구는 산출된 인구 이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최소 촌 이상 일정 행정범위의 인구에 대한 자료를 접하게 된다.
고구려 멸마이에 연개소문의 동생으로 알려져 있는 연정토는 12성 763호 3천 4백 53인의 규모로 신라에 항복하게 된다.
763호에 3453명이므로 1호당 평균 4.53명이다. 12개 성으로 1개 성에 평균적으로는 63.6호의 가구가 있었고, 1개 성당 287.75명의 백성이 거주했던 셈이다.
물론 이것이 군사의 숫자가 관여된 숫자가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잇겠지만, 이것은 군대의 수와는 관련이 없는 순수 보유하고 있는 호구조사결과라고 생각된다. 몇호 몇명이라는 표현은 거주민을 통털은 숫자이지 군대의 수와 戶의 수는 함께 기술될 수 없다고 생각된다.
평균 4.53명이라는 숫자를 기반으로 69만호라는 전체 호구에 대입하면 312만5700명이라는 결과가 나온다.
물론 지역적 차이에 따라 인구가 희박한 지역과 밀집된 지역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략 300만 명 정도의 내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과거에는 대가족제도이므로 최소 4명보다는 훨씬 많은 가족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있겠으나 그것은 분가된 형태의 대가족제도임을 가정한다면 어렵지 않은 문제이다. 전근대에 자연촌으로서 형성된 집성촌은 대가족화 되면서 자연스럽게 분가된 족성이 촌락을 이룬 형태이다..즉, 과거 1개 촌락은 혈연으로 대부분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결론도출방식은 매우 단편적으로서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으나 69만이라는 숫자를 口가 아닌 戶가 맞다는 판단하에 접목해 본 것이다.
인구에 대한 단편적인 자료는 이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경우를 통해서도 종합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지금까지 삼국사기를 다시 읽다가 언뜻 해본 한번의 실험이었습니다.>
본인은 관련 논문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객관적인 자료를 찾으려고 해보았는데..전근대의 가족구조가 크게 변하지 않았을것이라는 가정으로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인구구조에 대한 자료를 통하여 1戶당 인구수를 추정해 보기도 하였다. 물론 많은 학자들에 의해 선행된 연구이겠으나...
조선시대 각 시대의 호당 인구수에 대한 수치는 대략 1호당 3명에서 5명 정도로 시대마다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특징을 보이는 것은 한양의 호당 인구가 지방의 호당 인구보다 월등히 많다는 것이다. 이것이 수도와 지방의 한 차이라고 할 수 있음을 전제로 들고 넘어가자면..(물론 조선시대에 그랬다고 하여 고구려시대에도 그랬다는 보장은 없다.)
신라 촌락문서에서 1호당 인구는 대략 9~11명 정도였다. 그러나 이것은 표본의 수가 매우 적었기 때문에 기록된 69만호라는 수치에 적용하기는 무리라고 생각된다. 촌락문서가 비록 자세한 인구분석자료임에도 불구하고 촌락문서에 기재된 인구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최소 촌 이상의 규모에서 호당 인구의 평균수치를 뽑아낼 수 있다면 보다 실제에 가까운 인구를 추정해 낼 수 있을 것이다.
69만 호라는 인구수에 관하여 어떤 이는 호를 口로 해석하여 69만명이라고 해석하기도 했으나 이것은 분명 잘못된 해석이다. 고구려의 군사가 전성기에 최소 30만명임을 인지한다면 69만명이라는 인구수는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69만호라는 인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문제인데..대략적인 4명 내지는 5명으로 계산하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당장 수십만명의 호차범위가 나온다.
호구를 조사한다는 것은 民의 입장에서 民의 권리보장이나 행복추구와는 관계 없이 지배층의 효과적인 조세수취와 役의 부담을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즉, 국가 재정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것이 보다 복잡화되고 관례화 되거나 혹은 단순화 됨에 따라 3丁1戶의 단편적 계산방식도 발생하였고, 丁男(실질적인 조세 및 부역부담자)에 대한 정보를 국가가 파악하고 효율적으로 관리해야 할 필요성이 국가적으로 요구된다.
따라서 고대라고 하여 인구에 대한 조사가 미흡하다거나 허술하다고는 말할 수 없고 고대에도 인구에 대한 조사가 중요한 업무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전제하고서 이해하고자 한다.
물론 고구려는 고구려민 뿐만이 아니라 정복지의 민에 대한 호구정보도 보유하고 있었을 것이나 이것을 기존 고구려민과 피정복민을 어떻게 파악, 관리하였는지에 대한 단상은 자료가 충분치 못하기 때문에 정확한 모습은 그리기 어렵다. 그러나 광개토대왕비문에 징발한 인구기록이나 촌락문서에 기재된 인구분류..단편적으로 등장하는 고대국가의 인구수는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인구를 파악하고 관리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인구차악에는 많은 변수가 존재한다. 노예도 인구에 포함이 되었는지..분가한 가족도 戶에 포함이 되는지 아닌지..그리고 丁을 기준으로 파악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여러가지 분류기준을 상정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떠한 기준으로 적용한다 하더라도 그 기준으로 산출한 인구는 최소한 실제 당대 인구보다는 같거나 적었다는 사실을 전제하여야 한다.
즉..실제 인구는 산출된 인구 이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최소 촌 이상 일정 행정범위의 인구에 대한 자료를 접하게 된다.
고구려 멸마이에 연개소문의 동생으로 알려져 있는 연정토는 12성 763호 3천 4백 53인의 규모로 신라에 항복하게 된다.
763호에 3453명이므로 1호당 평균 4.53명이다. 12개 성으로 1개 성에 평균적으로는 63.6호의 가구가 있었고, 1개 성당 287.75명의 백성이 거주했던 셈이다.
물론 이것이 군사의 숫자가 관여된 숫자가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잇겠지만, 이것은 군대의 수와는 관련이 없는 순수 보유하고 있는 호구조사결과라고 생각된다. 몇호 몇명이라는 표현은 거주민을 통털은 숫자이지 군대의 수와 戶의 수는 함께 기술될 수 없다고 생각된다.
평균 4.53명이라는 숫자를 기반으로 69만호라는 전체 호구에 대입하면 312만5700명이라는 결과가 나온다.
물론 지역적 차이에 따라 인구가 희박한 지역과 밀집된 지역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략 300만 명 정도의 내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과거에는 대가족제도이므로 최소 4명보다는 훨씬 많은 가족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있겠으나 그것은 분가된 형태의 대가족제도임을 가정한다면 어렵지 않은 문제이다. 전근대에 자연촌으로서 형성된 집성촌은 대가족화 되면서 자연스럽게 분가된 족성이 촌락을 이룬 형태이다..즉, 과거 1개 촌락은 혈연으로 대부분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결론도출방식은 매우 단편적으로서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으나 69만이라는 숫자를 口가 아닌 戶가 맞다는 판단하에 접목해 본 것이다.
인구에 대한 단편적인 자료는 이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경우를 통해서도 종합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지금까지 삼국사기를 다시 읽다가 언뜻 해본 한번의 실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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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광개토경평안호태왕 작성시간 05.08.21 고구려가 멸망 시에 고구려유민들은 대부분이 고토에 남겨져 있었습니다.. 초기에는 당의 지배를 받았지만, 지속적인 저항으로 인해 결국 고구려 멸망 30년만에 발해(대진국)이 건국하게 되었습니다. 발해의 건국으로 인해 흩어졌던 수많은 고구려 유민들이 발해로 유입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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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율리우스카이사르 작성시간 05.08.21 음;;; 그런데 문제는;;; 연정토가 귀환할때 같이 복속되었던 땅이 평야지대라는거죠;;; 살기좋은;;(아닌감??'''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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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닭꼬리 작성시간 05.08.22 평야지대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살기좋은 땅이었다면 호수가 많았을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해도 호당 인구수가 특별이 많거나 해야하는 연관성은 없을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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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미나모토노 요시쓰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5.08.22 전근대시대에 1호당 대가족이라고 믿기 쉽지만 그나마 있는 자료는 꾸준히 4명 내외를 유지합니다. 이는 분가를 통한 자연 집성촌같은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인구를 근사치에 가깝게 파악하려면, 어떤 목적으로 어떤 대상으로 어떤 방법으로 파악했나를 고려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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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율리우스카이사르 작성시간 05.08.28 300여 만명으로 30만이라는 대군을 유지하는것은 미친짓으로 보이는데;;;; 조선도 700만이 넘을때 20여만 정도였고;;; 로마도 정규군30만에 속주군30만밖에 운영을 안했으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