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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신분제도는 유동적이다?

작성자밀리터리 나그네| 작성시간06.11.24| 조회수329| 댓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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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안양사랑 작성시간06.11.24 신라의 신분도 변동 가능합니다. 신분상승은 몰라도 신분강등은 꽤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낭혜화상비> 에 의하면 낭혜화상의 아버지인 진골이 6두품으로 강등되는 사례가 나오고, 김유신의 가문도 신라에 투항한 뒤 진골로 편입되었지만 김유신의 현손이라는 김암은 6두품으로 나옵니다. 어느 순간인가부터 김유신의 후손은 진골에서 6두품으로 강등된 것이죠.
  • 답댓글 작성자 을불 작성시간06.11.24 이 부분 서강대 이종욱 선생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즉 일정 Generation 이 흐른 뒤 ( 6대인가 7대인가 잘 기억이 안남) 종가를 제외한 지파(支派)는 족강(族降)이 된다고. 즉 진골은 6두품 , 그 다음은 그 아래로. 이렇지 않을 경우 지배계급의 수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니 이것은(족강은) 신라 뿐 아니라 어느 신분제 사회에도 필연적이죠. 낭혜화상의 경우는 바로 이런 경우고.. 김유신 장군 후손의 경우는 잘 모르겠는데, 역시 종가가 아닌 지파의 족강이 아닐까요 ?
  • 작성자 밀리터리 나그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06.11.24 하지만 내려갈수는 있어도 올라가지는 못하지 않았습니까??
  • 답댓글 작성자 을불 작성시간06.11.24 그렇지요. 내려갈 길(^^) 만 있을 경우는 신분이동이라고 하지 않지요 ^^
  • 작성자 이도형 작성시간06.11.24 간혹 그런 예가 있습니다. 상승이. 상승할 희망이 조금도 없다면 나라 자체가 유지될까요?
  • 작성자 이도형 작성시간06.11.24 고구려 역시 골품과 비슷한 그 무엇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다만 기록이 없어서 확증못할 뿐이지요
  • 답댓글 작성자 밀리터리 나그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06.11.24 비슷한것은 있었어도..고구려에서는 평민도 상위계급으로 올라가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대표적인것이 온달의 경우에도 그렇구 말입니다.. 평민이라도 귀족에게 심하게 차별 받는것도 아니었던것도 아니구요... 제가 잘못 알고 있나요? 차별이 크게 심하게 없었던것도 고구려군대의 원동력중 하나로 알고 있어서요..
  • 답댓글 작성자 을불 작성시간06.11.24 ' 강신 호족들이 국권을 잡고 서로 파당을 지어 편애함이 풍속을 이루니 (隋書)' ; 물론 고구려에 적대적인 중국측 기록으로 그것도 대 고구려 개전의 명분을 잡으려고 한 서술이긴 합니다만 고구려가 귀족제 사회였다는 것만은 알 수 있고- 이것은(귀족사회였다는 것은) 다른 기록들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고구려 후기로 올수록 귀족의 권한이 왕권을 능가하는 경향이 있는 데, 이런 조건에서는 신분이동이 힘들기 마련이지요. 신분이동의 문은 고려때가 삼국/신라보다 넓어졌고 또한 조선왕조로 내려 오면서 더욱 넓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 ZARD 작성시간06.11.25 '별이 없었다->고구려 군대의 원동력'라는 나그네님의 말씀은 처음 듣습니다만.. 어느 책에서 나왔는지 알 수 있을런지요.. 그리고 역사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군대라는 조직에 차별이 없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만 장성급-영관급-위관급-부사관-사병 이런 계급에 따른 차별이 엄연히 있습니다만 ...
  • 답댓글 작성자 밀리터리 나그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06.11.25 밀리터리 사이트등에서 고대군대를 설명한 부분에서 있어서 그리 알고있어서 질문 드린겁니다만... 계급간의 차별을 말하는것이 아니라 승진에 대한 것이지요.. 여기서는요... 평민출신이라도 능력이 있다면 큰차별없는 승진이 가능했는지 여부를 저는 말하는것입니다만..
  • 답댓글 작성자 jo-jo 작성시간07.04.03 그렇습니다 .고대사에서 귀족은 부귀영화르 누리는 것은 동 서양 마찬가지 였죠 그러나 고구려를 제외한 나라는 귀족을 숭상 나머지 기술자 등등 장인들은천대했죠 그러나 고구려는 평민 아니 천민이라고 기술자나 장인이라면 유망받고 존경 받았다고합니다
  • 작성자 돌부처 작성시간06.11.25 삼국보다 고려, 고려보다 조선에 있어서 신분이동이 용이했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왕조에서 조차도 사회적 상황에 따라 다르기도 합니다. 고구려가 물론 귀족사회임에 틀림없으나 신분이동 또한 매우 용이했다고 생각합니다. 을지문덕장군도 무명에서 대표적인 장수로 성장했고 연개소문가문도 전통귀족이 아니었으나 최고명문가문으로 성장했습니다. 이정도 상승폭은 사례를 찾기가 쉽지 않아보입니다.
  • 작성자 百濟 牟大王 작성시간06.11.26 고려와 조선을 비교하자면 오히려 조선보다는 고려가 신분이동이 더 용이했던 사회였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례들이 많습니다. 이른바 '신진사대부'에 의한 조선 건국은 결코 역사의 진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삼국의 경우는 기록이 워낙 적은 탓에 자세히 살피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신라의 골품제는 이른바 '통일'이후에 실질적으로 강화된 것으로 생각되며, 고구려나 백제에도 그런 게 있었을 거라는 추측은 근거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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