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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 이후 숙군성을 지속적으로 차지하였을까요?

작성자★明治好太王★| 작성시간07.09.10| 조회수788| 댓글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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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 한단인 작성시간07.09.11 숙군성을 그렇게 생각하셨다니 묻고 싶군요. 그럼 왜 북위에서 요서 경략에 그렇게 신경이 쓰이는 숙군성에 대한 압박이나 공격 기사가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 것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합니까? 그리고 550년대 요서를 공격한 북제는 어째서 숙군성 공격을 하지 않았던 걸까요? 참 신기하군요. 반대로 님이 모델로 드신 낭비성이나 칠중성 같은 경우는 이후로도 전투 기사를 통해 계속 이름이 남는 것과 반대로 숙군성은 그 이후로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자꾸 고구려의 요서 '경영' 설을 주장하기 위해서 '내 말이 모순된다는 증거가 없으니(대한님의 관점에 한해서) 참이다' 라는 오류를 범하고 계신데 굉장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 역사님 작성시간07.09.11 북위때는 달리 보면 고구려도 강성한 시기를 구가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아시겠지만 북연와의 상황에서나 기타 몇번의 충돌 기회를 그들이 무모하게 도전 하지 않을 만큼 이미 북위의 침투왕조적 이중 구조에 비해 고구려는 대국화 정치적 기반화 되어 있었고 이후 고구려계가 진출하면서 고구려와의 친여성은 매우 높아지는 기록들이 나오죠. 그리고 고구려 말기 수에 선제 공격을 가하고 촉발된 대전에서 고구려가 이후 대군이 밀려 오는 상황에서는 요충지의 방어력이 강한 곳에 병력을 집결시키는 것이 더욱 전술적으로 타당할 것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 역사님 작성시간07.09.11 그리고 현재 요에 대한 개념에서 우리는 너무 인프라적 상황과 현재 부족한 고고학적 성과로 요하를 기준으로 두는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물론 반대로 만리장성을-만리장성에 대한 시대적 규모에 대한 부분도 - 두고 그들의 그 아래에 거대한 땅에 상당한 행정력을 미친것처럼 각인되어 있구요. 요에 대해 그 기준을 두는 영정하, 난하. 요하등 현재 오늘날에 와서도 이 부분에 대해 정확한 수위나 규모 계절적 변화등 연구가 부족합니다. 물론 고대의 당시의 유추적 내용도 전무하구요.현대의 좀더 발달된 기술로서 이런 부분들도 관념적이지 않고 좀더 구체적이고 정밀한 연구들이 선행한다면 전체적으로 좋은 밑거름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 사랑해요.대한민국. 작성시간07.09.11 고구려의 북위 이후의 북조들에 대한 조양 공략 또한 본기에는 나와 있지 않는 것으로 압니다. 모두 신하(혹은 타국)열전, 금석문에 단편적으로 나와 있기에 퍼즐 처럼 짜맞춰야 알 수 있죠. 왜 본기에 정식 기사로 기록 안되있고 기록들이 산재되어 있을까요? 더군다나 영주는 요충지로 중요한 것인데 말입니다. 이것은 단지 북조 사관들이 유독 고구려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수치스럽기에 기록하기 싫어서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네요. 또 하나의 이유는 고구려는 북조의 영주를 공격(대대적인 전면전은 아닌 약탈?)할 여건은 됐지만 북조는 주변 국가들 때문에 고구려의 숙군성을 공격할 여건이 되지 않았죠.
  • 답댓글 작성자 사랑해요.대한민국. 작성시간07.09.11 그리고 제가 낭비성과 칠중성을 거론한 이유는 그 성들의 위치가 통상적인 고구려, 신라의 경계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죠 (신라의 칠중성은 한참 동북부에 있는 반면 낭비성은서중부에 위치해있습니다.연개소문전 지도 참조)즉 영주와 숙군성도 이처럼 뒤죽박죽 되어 있을거란 생각에섭니다. 북주와 싸운 곳인 배산은 요서일 가능성도 큽니다. 그리고 숙군성은 고, 당전쟁 기간에 일시적으로 버렸을 가능성도 있죠 왜냐하면 방어하기 좋은 조건은 요하와 천산산맥등이니까요. 또 수양제의 조서는 근거가 불충분해 보일 수도 있지만 주서의 (고구려의) 서계는 요수 건너 2천리란 기록은 충분히 믿을 수 있는 기록이 됩니다.
  • 답댓글 작성자 사랑해요.대한민국. 작성시간07.09.11 위에서 말했듯이 요수에서 서쪽으로 2천리는 요수에서 유주이동이란 소리가 됩니다.
  • 답댓글 작성자 한단인 작성시간07.09.11 대한님께서는 사료비판의 방법론을 숙지하신 다음에 사료를 검토하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언급하셨던 사료는 중국측 사관들이 윗대로 부터 들어온 '카더라' 류의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기록한 것에 불과합니다. 즉, 당대 사건에 대한 1차 보고를 접하고 쓴게 아니라 편견이나 두루뭉술한 정보 전달로 인해 잘못알려진 정보 습득 같은 것이 후대 사가에게 전해졌을 가능성이 첫번째요, 두번째는 사가 자신의 잘못된 기억이 사료에 실렸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관의 정직성이 높다고 하더라도 2차사료를 신뢰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역사가, 기억을 말하다' 라는 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기억과 역사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 답댓글 작성자 한단인 작성시간07.09.11 그리고 칠중성과 낭중성의 경우는 그 전제가 잘못되었습니다. 고구려와 신라는 국경을 접하고 공방전을 멈추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런 상황의 연출이 가능하지만 북조왕조들과 고구려는 거란을 완충지대삼아 충돌을 거의 벌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북제가 550년대에 거란 원정에 대한 이야기를 이미 했었고 그럴 때 고구려가 숙군성을 직접지배하에 두고 있을 경우 그걸 냅뒀을때 거란원정을 한 것이 소용없다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아실거라고 생각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만 말씀을 굳이 드려야 할거같군요. 일단 대한님은 사료 비판 방법에서 전제를 잘못하셨고 비교 대상에 대한 전제를 잘못하시는 두가지 오류를 범하셨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사랑해요.대한민국. 작성시간07.09.17 북제의 553년도 거란 원정은 돌궐 때문에 단기간에 그치지 않았나요? 거기에는 기록도 없지만 고구려의 압박도 한 몫했을거라고 생각드네요 거기에 숙군성의 역할이 중요했을지도 모를일이죠(사실 고구려의 요서에서의 활동기록은 대부분이 산재되어 있습니다 산재되어 있다는 것은 고의로 기록을 없애다가 실수로 남겼다는 것을 의미하는거겠죠) 게다가 상황으로 봤을 때 북제의 거란 원정은 무모한 감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실패가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서 일부 지역에 북조는 영주를 설치하여 군현지배를 했는데 고구려가 이를 방관하거나 하지는 않았겠지요 고구려도 군현을 설치했음 했지 안했을리는 없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사랑해요.대한민국. 작성시간07.09.17 영주에 비견될 만한 군현을 설치했을 가능성도 있지요 완충지대는 무력충돌을 피하기 위한 중간지점이라는 의미도 있는데 북위라면 몰라도 고구려에게는 완충지대가 아닙니다 고구려는 지속적으로 공략한 반면 북위는 주변 요건이 안 되서 고구려에 항의 밖에 못하는 수준에 그쳤지만요 그래서 북조의 숙군성 공격 기록이 없을 가능성이 크단 겁니다
  • 작성자 한단인 작성시간07.09.10 그리고 역사님. 완충지대의 의미를 혹시 모르시는 겁니까? 제가 댓글에서 고구려가 군현지배 포기를 했고 직접지배를 받는 일반민을 퇴각시켰다고 했으나 거란인 등의 부용세력으로 활용했다는 언급을 한 것이라면 간접지배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비슷한 의미인 셈입니다. 제가 본문에서 언급한 완충지대의 의미는 무인지대를 의미하는게 아닙니다. 문맥의 의미를 분명히 파악하고 반론을 제기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제가 댓글에서 언제 역사님이 언급하시는 '고정 관념적 투영'적 사고를 언급했나요? 요서 지역을 무인지대로 지배흔적이 아예 없다라는 식으로 지레 짐작하신 건 아니신지? 오히려 그런 사고가 고정관념이라 생각됩니다만
  • 답댓글 작성자 역사님 작성시간07.09.11 오해 없으시길. 위글은 한단인님의 반론글 보다는 일반인들의 오해 수준을 말한것입니다.(.한단님의 ... 인구 공동화작업이 실시되었습니다..) 그리고 서쪽 왕조도 북방민족을 그냥 미개하거냐 노략질적 부족으로,그리고 자신들이 통치 받은 경우에는 당연한 자기 역사로??,우리 역시도 단순한 북방의 고구려를 중심으로 주변 세력정도로만 언급하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북방 유목민족에 대한 특히 우리에게는 선비나 거란은 분명 깊게 연구 해볼 소재임에 환기 시킨 내용이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역사님 작성시간07.09.11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깊어 진다면 고구려의 대외관계나 위치,통치 방식등에 많은 소득이, 나아가 우리 고구려사를 지키기 위한 완전한 우리 소유 개념으로 현실적으로 갈수 없다고 해도 최소한 역사의 완충지 역할을 해 줄것으로 보입니다.북방 유목민족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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