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어서 여기에 잠깐 옮겨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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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축제사(歸竺諸師)>
'광함(廣函)' 의 '구법고승전(求法高僧傳)' 에 이런 얘기가 있다. 중 '아리나(阿離那-那는 혹은 耶) 발마(跋摩-摩는 혹은 郞)'는 신라 사람이다. 처음에 '정교(政敎-불교)' 를 구하려 하여 일찍이 중국으로 갔는데 성인의 자취를 두루 찾아 보고픈 마음이 더했다. 그래서 정관 연간(627-649)에 당나라의 서울인 장안을 떠나 오천(五天)에 이르러 '나란타사(那蘭拖寺)' 에 머물며 율장과 논장을 만이 읽고 패겹에 베껴썼다. 고국에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홀연히 그 절에서 세상을 뜨니 그의 나이 70여 세였다.
그의 뒤를 이어 혜업, 현태, 구본, 현각, 혜륜, 현유와 그 밖에 또 이름을 알지 못하는 두 법사가 있었는데, 모두 자기 자신을 잊고 불법을 따라 '관화(觀化-교화를 보는것)' 를 보기 위해 '중천축(中天竺)' 에 갔었다. 그러나 혹은 도중에서 일찍 죽고 혹은 살아 남아서 그 곳 절에서 거주한 이도 있었지만, 마침내는 다시 '계귀(鷄貴-신라)' 와 당나라로 돌아오지는 못했다. 그 중에서 오로지 현태 스님만이 당나라로 돌아왔으나 그도 역시 어디서 세상을 마쳤는지는 알 수 없다.
천축국 사람들이 해동을 불러 '구구타예설라(矩矩咤□說羅)' 라 하는데, 이 '구구타' 란 '계(鷄-닭)' 를 말함이요, '예설라' 는 '귀(貴)' 를 말한 것이다. 그 나라에서는 이렇게 서로 전하여 말했다. "신라에서는 '계신(鷄神)' 을 존경하는 때문에 그 깃을 꽂아서 장식한다."
기리어 읊는다.
천축의 머나먼 길 만첩 산인데,
가련타, 힘써 올라가는 유사(遊士)들이여.
몇 번인가 저 달은 보내 외로운 배를 보냈는가.
한 사람도 구름따라 돌아오는 것 보지 못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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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축제사라 함은 천축국으로 간 여러 법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진평왕 49년(627)~진덕여왕 3년(649) 사이에 '아리나발마' 혹은 '아리야발랑' 이라는 신라 스님이 장안에 들렸다가 오천(천축국의 준말)에 들려 중인도 '마갈타국' 의 나란타사에 들렸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 절은 40년에 지어져 7세기 초에 당의 현장이 인도에 유학할 무렵에는 인도 불교의 중심지로 부흥하기까지 한 절로서 굉장히 유서가 깊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이후로 신라에서는 여러 스님들이 도를 구하기 위해서 당나라를 거쳐서 인도로 들어갔음을 적고 있다.
이때가 고구려 영류태왕과 백제 무왕 시절이었다는 것을 본다면 신라가 국가 말기에 불교가 어느정도로 발전했는지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불교가 상대적으로 고구려, 백제보다 상당히 늦게 유입되었다고 보여지는 신라에서 국가 말기에 오면서 불교에 더 귀의하려는 움직임이 많이 보인다고 생각하는 주인장이다. 이것은 아마 삼국 중 가장 중앙집권국가로서의 성장이 빨랐던 신라인만큼 사상적인 통일도 그만큼 빨랐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여기서 주인장이 보고 싶은 것은 신라와 불교의 관계가 아니라 여기에 나온 '신라국' 에 대한 명칭이다. '구법고승전' 즉, '대당서역구법고승전' 이 비록 당나라 사람이 지은 것으로서 인도에 가서 불법을 구하던 56명의 중국 사람들에 대해서 적은 글이지만 이 사람 역시 뭔가 어디서 듣고 본 기록들을 가지고 이 책을 썼을 것이다. 여기에 보면 신라를 가리켜 '계귀(鷄貴)' 즉, '귀한 닭의 나라' 혹은 '닭이 귀한 나라' 등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 나온다.
뒤이어 기록되어 있기를, 천축국에서는 해동(海東)을 '구구타예설라' 즉, 해석하면 역시 '계귀' 라고 부르고 있다고 적고 있다. 그곳에서 서로 이렇게 말하기를 그 나라 사람들은 계신, 즉 닭신을 존경해서 모시고 그러하기 때문에 닭깃을 머리에 꽃아서 장식한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들을 알 수 있다. 그 첫째는 신라뿐 아니라 해동이 계귀라고 불리는 점, 둘째는 신라에 계신이 있다는 점, 셋째는 닭깃(새깃)을 머리에 쓰고 다닌다는 사람에 대한 얘기다.
과연 신라가 언제부터 인도에 불법을 구하러 다니는등, 민간 차원에서 천축과 교류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여러가지 정황을 미루어 봤을때 대강 신라의 인도 유학의 시대적인 배경이 나오기는 한다.
신라는 이미 6세기초에 한강 유역을 차지함으로서 당나라와 우호적인 교류 관계를 지속하였다. 이 일대에 대해서는 고구려와 백제의 지속적은 공세가 계속됐음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이 지역을 꿋꿋히 지켜내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대륙과 교류를 했던 신라는 저 멀리 당을 통해서 서역과 천축까지 신라인의 발자취를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신라인의 한 흔적이 이렇게 남아 삼국유사에 실린 것이다.
천축인들은 신라 뿐 아니라 해동, 즉 동방 전체를 '계귀' 라고 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천축인들이 접할 수 있던 동방 세력이 마치 신라 하나뿐이었다고 느끼게 한다. 이미 불교 교류에 있어서 신라보다 수세기나 빠른 고구려와 백제였다. 주인장은 백제같은 경우에는 인도 남부에 영역권을 가지고 있었고 동남아 여러곳에 해상권을 가지고 있었던 바, 소승불교든, 대승불교든 백제와 그 휘하 가야, 임나, 왜 열도에는 이미 불법이 일찍부터 전해져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거기다가 고구려는 북방 초원의 길을 통해서 저 멀리 서역 사마르칸트까지 사신을 보낼 수 있는 국가였으므로 반대로 천축과의 교류 역시 활발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천축에서는 해동을 계귀라고 하는가?
여기서 말하는 해동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해동의 일부분을 일컫는 말일 수 밖에 없다. 해동이라는 개념도 모호한즉, 우리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신라 사신 위두가 전진의 부견을 알현한 일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도 신라 사신은 신라를 두고 해동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아마 천축인들이 이렇게 말했고, 구법고승전에 이렇게 실려있다는 것은 신라인들이 천축에 가서 자신들에 대해서 그렇게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천축에서 단순히 해동이라는 표현을 쓸 이유가 없다.
그리고 신라를 두고 계귀라고 하는 이유, 그건 무엇일까? 우리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 계림국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알 수 있다. 계림은 본 까페의 대문에도 실려있는데, 오늘날 경주시 교동(校洞) 첨성대(瞻星臺)와 반월성(半月城) 사이에 가면 만날수 있는 숲이다. 이 숲은 여기서 닭이 울었고 김알지가 여기에서 탄생했다고 하여 신성시 여겨졌고 후에 국명으로까지 쓰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가 바로 김씨 신라가 막 건국되어 신라를 다잡아가던 5세기 초엽이었다.
아마도 이런 계림의 신성화 사상은 신라 당대부터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계림에서 시작한 김씨 신라는 이후 국호를 신라라고 확실하게 제정하기 전까지는 계림국이라는 국명을 계속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그들이 닭이라는 동물을 매개로 시조를 숭상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소지 마립간 때부터가 아닐까 한다. 왜냐하면 소지 마립간 시절에 가면 재위 9년(487) 봄 2월에 신궁(神宮)을 나을(奈乙)에 처음 설치했다는 기록이 나온기 때문이다. 나을은 단지 시조가 처음 태어나신 곳이라고만 적혀 있다. 이미 신라는 국초부터 시조묘에 대해서 즉위하면 친히 왕이 찾아가 늘 제를 올리곤 하였다.
남해차차웅 3년(6)에 처음으로 '시조묘(始祖廟)' 를 세운 이후 신라 왕이라면 즉위하고 봄 1~2월에 늘 여기를 친히 찾아갔었다. 물론 국가적으로 위기가 닥치면 봄뿐만 아니라 그때그때마다 이를 찾아가곤 했었다. 그만큼 시조묘는 신라인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미추이사금때에는 약간 의아한 기록이 나온다. 미추이사금 2년(263), 시조묘가 아닌 '국조묘(國祖廟)' 에 제를 올렸다는 것이다. 국조묘라는 존재는 신라史에서 여기에 딱 한번 등장한다. 이 시조묘와 국조묘가 어떻게 다르냐? 미추이사금은 북방계의 외부인이다. 당대 잠깐 신라를 지휘했던 그로서는 박혁거세는 단순히 그 나라의 시조일 뿐이지, 그 자신의 조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국조묘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이는 미추이사금이 북방계라는 근거라고 본다.
그런데 이후 김씨가 신라로 유입하고 나서도 즉위한 왕들은 여전히 시조묘에 제를 드린다. 내물 - 실성 - 눌지 - 자비 마립간에 이르는 120여년간(356~479) 김씨 세력은 박혁거세 거서간에 대해서 국조가 아닌 시조로서 제를 드렸을 것이다. 이제 김씨 왕실이 새로운 신라의 지배자였다. 그들은 신라에 유입한 외부인이었지만 결국은 전란 속에서 신라의 왕권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신라는 내물이사금때 고구려에 복속했다가 점점 독립적인 모습을 보이고 자비마립간때 고구려의 강성함 때문에 위기를 겪지만 이를 잘 이겨낸다.
이후 즉위한 소지마립간은 대내외의 문제를 크게 정리하고 재위 9년째 되는 해에 나을이라는 곳에 새로 신궁을 설치한다. 나을은 시조가 태어났다고 하는 것이라는데 아마도 김씨와 연관된 지역이 아닐까 한다. 이후 신라사에서 시조묘에 제사를 드리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후 역대 신라왕들은 이제 신궁으로 제를 드리러 간다. 시조묘가 신궁으로 바뀐 것이다. 이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신궁' 이라 하면 주인장은 그리스, 이집트 등의 '신전' 을 떠올리곤 한다. 신전은 어떤 신을 모시느냐에 따라 그 성격이나 종류가 달라지고 다양해진다. 그렇다면 이 신궁 역시 어떤 신을 모시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천축국이 말하는 계신이 바로 신궁에 안치된 존재는 아니었을까? 약간 비약이 심하기는 해도 한번쯤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한다. 계림이라는 지역은 이미 석씨 신라가 존속하고 있었을때도 신성화된 지역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 지역적인 특성을 김씨 세력은 석씨 신라와 연결시켰을 것이며 그 계림을 상징화할 수 있는 닭이라는 동물을 수신(獸神)으로 모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라가 수신을 모셨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지만 이렇게 연결해본다면 어느정도 상상해 볼 수도 있다.
참고로 북방초원史를 보면 기원전 수천년부터 그 지역의 유목민들은 동물을 조각하고 동물 문양을 즐겨 새겼었다. 페르시아나 그리스에서도 이런 동물 문양은 활발하게 애용되었고 다신교 국가였던 이집트에서는 악어, 개, 매 등등 수많은 수신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흔적이 신라에도 있었다고 주인장은 생각한다. 12지 신상이나 고구려 벽화에도 나타나는 수두인신(獸頭人身)의 형상 등등 모두 북방 문화의 한 전파는 아니었을까? 실제 몽골이나 거란족들은 이리나 늑대, 사슴 등을 민족의 시조로 보고 있다. 고구려의 사신도나 삼족오 역시 멀리 보면 동물을 신성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단순한 닭은 아니었을 것이며 용이나 봉황처럼 굉장히 상징화되고 신성화된 상상의 동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신은 닭을 모티므로 했던만큼 '계신' 이라고 불렸다고 본다. 박혁거세 거서간은 사람이며 이를 모신 것이 시조<묘> 였다. 그런데 이후 신라에서 시조묘는 등장하지 않는다. 역대 신라왕들은 이제 시조묘 대신에 신궁으로 들어가 즉위 사실을 천명하게 된다. 앞서 말했지만 이 신궁을 주인장은 신라의 신전으로 본다. 사제장과 사제들, 이를 숭배하는 집단도 있었을 것이다.
중국 사서를 보면 신라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어 흥미롭다.
--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엄격하다 --
이상하지 않은가? 화랑세기를 통해 본 신라 지배층의 남녀 관계는 상상을 초월한다. 오죽하면 화랑세기가 위서라는 근거로서 신라가 이렇게 성적으로 문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겠는가. 그런 신라에서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엄격하다니, 이것은 또 무슨 말인가? 고구려에는 남녀의 구분이 없고 밤 늦도록 노래하고 춤추며 논다고 중국인들은 이를 문란하게 봤다. 청학동 사람들이 나이트를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하지만 화랑세기에 나온 신라인의 성문화는 고구려를 묘사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것을 주인장은 신궁에 있는 사제들을 일컫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남자와 여자를 엄격히 구별한다는 것으로 봐서 아마 신궁에는 남자가 아닌 여자가 들어가 있었고, 이 곳에는 남자는 발을 들이지 못 하지 않았을까 한다.
거기다가 신라인은 '계신' 을 섬기기에 닭깃을 꽂고 다닌다고 한다. 이는 얼핏 보면 '조우관(鳥羽冠)' 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가죽이나 명주로 만든 변형모(弁形帽)의 절풍건(折風巾)이나 소골(蘇骨)에 새의 깃털(鳥羽)을 꽃아 장식한 이 모자는 고구려의 대표적인 문화로 알려져 있는데 실은 조우를 장식하는 풍습은 수렵시대의 유속(遺俗)으로 북방 유라시아 기마민족 사이에서 옛날부터 행해져 왔었다.
고구려에서 조우관을 닭깃을 꽂았다는 기록을 주인장은 보지 못 했다. 하지만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인들은 닭깃을 꽂았다고 한다. 신라인은 북방 스키타이부터 내려오는 유목 민족, 모용선비족이었다. 이런 조우관을 신라인 역시 사용했는데 삼국유사는 여기에 닭깃을 꽂았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신궁에 안치된 계신을 숭배하는 집단만이 그렇게 했다는 것인지, 일반인들도 그랬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했으리라고 생각된다.
일본에는 '신교(神敎)' 라는 것이 있다고 하다. 김용만님은 고구려에 독자적인 신앙 체제가 있다고 하신다. 주인장은 한때 사신도를 토대로 사신교(敎)라고 하는 신앙이 존재한 것은 아닐까 의문을 가지기도 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백제에도 독자적인 신앙 체제가 있었다고 보여진다. 독자적인 문명권을 보유한 국가들인만큼 독자적인 신앙이나 사상 체계는 없었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그리고 신라 역시 그러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계림' 에서 난 시조가 나라를 세우니 나라 이름도 '계림' 이라고 하고 신궁을 설치해 '계신' 을 모시고 그 신을 존경하므로 '계우' 를 머리에 달고 다니던 신라인들을 천축인들은 '계귀' 에 사는 사람이라고 했었다. 신라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하는 기록이었으며 이에 대해서는 주인장이 다시 글을 쓰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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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축제사(歸竺諸師)>
'광함(廣函)' 의 '구법고승전(求法高僧傳)' 에 이런 얘기가 있다. 중 '아리나(阿離那-那는 혹은 耶) 발마(跋摩-摩는 혹은 郞)'는 신라 사람이다. 처음에 '정교(政敎-불교)' 를 구하려 하여 일찍이 중국으로 갔는데 성인의 자취를 두루 찾아 보고픈 마음이 더했다. 그래서 정관 연간(627-649)에 당나라의 서울인 장안을 떠나 오천(五天)에 이르러 '나란타사(那蘭拖寺)' 에 머물며 율장과 논장을 만이 읽고 패겹에 베껴썼다. 고국에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홀연히 그 절에서 세상을 뜨니 그의 나이 70여 세였다.
그의 뒤를 이어 혜업, 현태, 구본, 현각, 혜륜, 현유와 그 밖에 또 이름을 알지 못하는 두 법사가 있었는데, 모두 자기 자신을 잊고 불법을 따라 '관화(觀化-교화를 보는것)' 를 보기 위해 '중천축(中天竺)' 에 갔었다. 그러나 혹은 도중에서 일찍 죽고 혹은 살아 남아서 그 곳 절에서 거주한 이도 있었지만, 마침내는 다시 '계귀(鷄貴-신라)' 와 당나라로 돌아오지는 못했다. 그 중에서 오로지 현태 스님만이 당나라로 돌아왔으나 그도 역시 어디서 세상을 마쳤는지는 알 수 없다.
천축국 사람들이 해동을 불러 '구구타예설라(矩矩咤□說羅)' 라 하는데, 이 '구구타' 란 '계(鷄-닭)' 를 말함이요, '예설라' 는 '귀(貴)' 를 말한 것이다. 그 나라에서는 이렇게 서로 전하여 말했다. "신라에서는 '계신(鷄神)' 을 존경하는 때문에 그 깃을 꽂아서 장식한다."
기리어 읊는다.
천축의 머나먼 길 만첩 산인데,
가련타, 힘써 올라가는 유사(遊士)들이여.
몇 번인가 저 달은 보내 외로운 배를 보냈는가.
한 사람도 구름따라 돌아오는 것 보지 못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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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축제사라 함은 천축국으로 간 여러 법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진평왕 49년(627)~진덕여왕 3년(649) 사이에 '아리나발마' 혹은 '아리야발랑' 이라는 신라 스님이 장안에 들렸다가 오천(천축국의 준말)에 들려 중인도 '마갈타국' 의 나란타사에 들렸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 절은 40년에 지어져 7세기 초에 당의 현장이 인도에 유학할 무렵에는 인도 불교의 중심지로 부흥하기까지 한 절로서 굉장히 유서가 깊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이후로 신라에서는 여러 스님들이 도를 구하기 위해서 당나라를 거쳐서 인도로 들어갔음을 적고 있다.
이때가 고구려 영류태왕과 백제 무왕 시절이었다는 것을 본다면 신라가 국가 말기에 불교가 어느정도로 발전했는지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불교가 상대적으로 고구려, 백제보다 상당히 늦게 유입되었다고 보여지는 신라에서 국가 말기에 오면서 불교에 더 귀의하려는 움직임이 많이 보인다고 생각하는 주인장이다. 이것은 아마 삼국 중 가장 중앙집권국가로서의 성장이 빨랐던 신라인만큼 사상적인 통일도 그만큼 빨랐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여기서 주인장이 보고 싶은 것은 신라와 불교의 관계가 아니라 여기에 나온 '신라국' 에 대한 명칭이다. '구법고승전' 즉, '대당서역구법고승전' 이 비록 당나라 사람이 지은 것으로서 인도에 가서 불법을 구하던 56명의 중국 사람들에 대해서 적은 글이지만 이 사람 역시 뭔가 어디서 듣고 본 기록들을 가지고 이 책을 썼을 것이다. 여기에 보면 신라를 가리켜 '계귀(鷄貴)' 즉, '귀한 닭의 나라' 혹은 '닭이 귀한 나라' 등으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 나온다.
뒤이어 기록되어 있기를, 천축국에서는 해동(海東)을 '구구타예설라' 즉, 해석하면 역시 '계귀' 라고 부르고 있다고 적고 있다. 그곳에서 서로 이렇게 말하기를 그 나라 사람들은 계신, 즉 닭신을 존경해서 모시고 그러하기 때문에 닭깃을 머리에 꽃아서 장식한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들을 알 수 있다. 그 첫째는 신라뿐 아니라 해동이 계귀라고 불리는 점, 둘째는 신라에 계신이 있다는 점, 셋째는 닭깃(새깃)을 머리에 쓰고 다닌다는 사람에 대한 얘기다.
과연 신라가 언제부터 인도에 불법을 구하러 다니는등, 민간 차원에서 천축과 교류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여러가지 정황을 미루어 봤을때 대강 신라의 인도 유학의 시대적인 배경이 나오기는 한다.
신라는 이미 6세기초에 한강 유역을 차지함으로서 당나라와 우호적인 교류 관계를 지속하였다. 이 일대에 대해서는 고구려와 백제의 지속적은 공세가 계속됐음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이 지역을 꿋꿋히 지켜내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대륙과 교류를 했던 신라는 저 멀리 당을 통해서 서역과 천축까지 신라인의 발자취를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신라인의 한 흔적이 이렇게 남아 삼국유사에 실린 것이다.
천축인들은 신라 뿐 아니라 해동, 즉 동방 전체를 '계귀' 라고 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천축인들이 접할 수 있던 동방 세력이 마치 신라 하나뿐이었다고 느끼게 한다. 이미 불교 교류에 있어서 신라보다 수세기나 빠른 고구려와 백제였다. 주인장은 백제같은 경우에는 인도 남부에 영역권을 가지고 있었고 동남아 여러곳에 해상권을 가지고 있었던 바, 소승불교든, 대승불교든 백제와 그 휘하 가야, 임나, 왜 열도에는 이미 불법이 일찍부터 전해져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거기다가 고구려는 북방 초원의 길을 통해서 저 멀리 서역 사마르칸트까지 사신을 보낼 수 있는 국가였으므로 반대로 천축과의 교류 역시 활발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천축에서는 해동을 계귀라고 하는가?
여기서 말하는 해동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해동의 일부분을 일컫는 말일 수 밖에 없다. 해동이라는 개념도 모호한즉, 우리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신라 사신 위두가 전진의 부견을 알현한 일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도 신라 사신은 신라를 두고 해동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아마 천축인들이 이렇게 말했고, 구법고승전에 이렇게 실려있다는 것은 신라인들이 천축에 가서 자신들에 대해서 그렇게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천축에서 단순히 해동이라는 표현을 쓸 이유가 없다.
그리고 신라를 두고 계귀라고 하는 이유, 그건 무엇일까? 우리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 계림국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알 수 있다. 계림은 본 까페의 대문에도 실려있는데, 오늘날 경주시 교동(校洞) 첨성대(瞻星臺)와 반월성(半月城) 사이에 가면 만날수 있는 숲이다. 이 숲은 여기서 닭이 울었고 김알지가 여기에서 탄생했다고 하여 신성시 여겨졌고 후에 국명으로까지 쓰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가 바로 김씨 신라가 막 건국되어 신라를 다잡아가던 5세기 초엽이었다.
아마도 이런 계림의 신성화 사상은 신라 당대부터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계림에서 시작한 김씨 신라는 이후 국호를 신라라고 확실하게 제정하기 전까지는 계림국이라는 국명을 계속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그들이 닭이라는 동물을 매개로 시조를 숭상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소지 마립간 때부터가 아닐까 한다. 왜냐하면 소지 마립간 시절에 가면 재위 9년(487) 봄 2월에 신궁(神宮)을 나을(奈乙)에 처음 설치했다는 기록이 나온기 때문이다. 나을은 단지 시조가 처음 태어나신 곳이라고만 적혀 있다. 이미 신라는 국초부터 시조묘에 대해서 즉위하면 친히 왕이 찾아가 늘 제를 올리곤 하였다.
남해차차웅 3년(6)에 처음으로 '시조묘(始祖廟)' 를 세운 이후 신라 왕이라면 즉위하고 봄 1~2월에 늘 여기를 친히 찾아갔었다. 물론 국가적으로 위기가 닥치면 봄뿐만 아니라 그때그때마다 이를 찾아가곤 했었다. 그만큼 시조묘는 신라인에게 있어서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미추이사금때에는 약간 의아한 기록이 나온다. 미추이사금 2년(263), 시조묘가 아닌 '국조묘(國祖廟)' 에 제를 올렸다는 것이다. 국조묘라는 존재는 신라史에서 여기에 딱 한번 등장한다. 이 시조묘와 국조묘가 어떻게 다르냐? 미추이사금은 북방계의 외부인이다. 당대 잠깐 신라를 지휘했던 그로서는 박혁거세는 단순히 그 나라의 시조일 뿐이지, 그 자신의 조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국조묘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이는 미추이사금이 북방계라는 근거라고 본다.
그런데 이후 김씨가 신라로 유입하고 나서도 즉위한 왕들은 여전히 시조묘에 제를 드린다. 내물 - 실성 - 눌지 - 자비 마립간에 이르는 120여년간(356~479) 김씨 세력은 박혁거세 거서간에 대해서 국조가 아닌 시조로서 제를 드렸을 것이다. 이제 김씨 왕실이 새로운 신라의 지배자였다. 그들은 신라에 유입한 외부인이었지만 결국은 전란 속에서 신라의 왕권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신라는 내물이사금때 고구려에 복속했다가 점점 독립적인 모습을 보이고 자비마립간때 고구려의 강성함 때문에 위기를 겪지만 이를 잘 이겨낸다.
이후 즉위한 소지마립간은 대내외의 문제를 크게 정리하고 재위 9년째 되는 해에 나을이라는 곳에 새로 신궁을 설치한다. 나을은 시조가 태어났다고 하는 것이라는데 아마도 김씨와 연관된 지역이 아닐까 한다. 이후 신라사에서 시조묘에 제사를 드리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후 역대 신라왕들은 이제 신궁으로 제를 드리러 간다. 시조묘가 신궁으로 바뀐 것이다. 이것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신궁' 이라 하면 주인장은 그리스, 이집트 등의 '신전' 을 떠올리곤 한다. 신전은 어떤 신을 모시느냐에 따라 그 성격이나 종류가 달라지고 다양해진다. 그렇다면 이 신궁 역시 어떤 신을 모시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천축국이 말하는 계신이 바로 신궁에 안치된 존재는 아니었을까? 약간 비약이 심하기는 해도 한번쯤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한다. 계림이라는 지역은 이미 석씨 신라가 존속하고 있었을때도 신성화된 지역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이 지역적인 특성을 김씨 세력은 석씨 신라와 연결시켰을 것이며 그 계림을 상징화할 수 있는 닭이라는 동물을 수신(獸神)으로 모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라가 수신을 모셨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지만 이렇게 연결해본다면 어느정도 상상해 볼 수도 있다.
참고로 북방초원史를 보면 기원전 수천년부터 그 지역의 유목민들은 동물을 조각하고 동물 문양을 즐겨 새겼었다. 페르시아나 그리스에서도 이런 동물 문양은 활발하게 애용되었고 다신교 국가였던 이집트에서는 악어, 개, 매 등등 수많은 수신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흔적이 신라에도 있었다고 주인장은 생각한다. 12지 신상이나 고구려 벽화에도 나타나는 수두인신(獸頭人身)의 형상 등등 모두 북방 문화의 한 전파는 아니었을까? 실제 몽골이나 거란족들은 이리나 늑대, 사슴 등을 민족의 시조로 보고 있다. 고구려의 사신도나 삼족오 역시 멀리 보면 동물을 신성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단순한 닭은 아니었을 것이며 용이나 봉황처럼 굉장히 상징화되고 신성화된 상상의 동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신은 닭을 모티므로 했던만큼 '계신' 이라고 불렸다고 본다. 박혁거세 거서간은 사람이며 이를 모신 것이 시조<묘> 였다. 그런데 이후 신라에서 시조묘는 등장하지 않는다. 역대 신라왕들은 이제 시조묘 대신에 신궁으로 들어가 즉위 사실을 천명하게 된다. 앞서 말했지만 이 신궁을 주인장은 신라의 신전으로 본다. 사제장과 사제들, 이를 숭배하는 집단도 있었을 것이다.
중국 사서를 보면 신라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어 흥미롭다.
--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엄격하다 --
이상하지 않은가? 화랑세기를 통해 본 신라 지배층의 남녀 관계는 상상을 초월한다. 오죽하면 화랑세기가 위서라는 근거로서 신라가 이렇게 성적으로 문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겠는가. 그런 신라에서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엄격하다니, 이것은 또 무슨 말인가? 고구려에는 남녀의 구분이 없고 밤 늦도록 노래하고 춤추며 논다고 중국인들은 이를 문란하게 봤다. 청학동 사람들이 나이트를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하지만 화랑세기에 나온 신라인의 성문화는 고구려를 묘사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것을 주인장은 신궁에 있는 사제들을 일컫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남자와 여자를 엄격히 구별한다는 것으로 봐서 아마 신궁에는 남자가 아닌 여자가 들어가 있었고, 이 곳에는 남자는 발을 들이지 못 하지 않았을까 한다.
거기다가 신라인은 '계신' 을 섬기기에 닭깃을 꽂고 다닌다고 한다. 이는 얼핏 보면 '조우관(鳥羽冠)' 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가죽이나 명주로 만든 변형모(弁形帽)의 절풍건(折風巾)이나 소골(蘇骨)에 새의 깃털(鳥羽)을 꽃아 장식한 이 모자는 고구려의 대표적인 문화로 알려져 있는데 실은 조우를 장식하는 풍습은 수렵시대의 유속(遺俗)으로 북방 유라시아 기마민족 사이에서 옛날부터 행해져 왔었다.
고구려에서 조우관을 닭깃을 꽂았다는 기록을 주인장은 보지 못 했다. 하지만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인들은 닭깃을 꽂았다고 한다. 신라인은 북방 스키타이부터 내려오는 유목 민족, 모용선비족이었다. 이런 조우관을 신라인 역시 사용했는데 삼국유사는 여기에 닭깃을 꽂았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신궁에 안치된 계신을 숭배하는 집단만이 그렇게 했다는 것인지, 일반인들도 그랬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했으리라고 생각된다.
일본에는 '신교(神敎)' 라는 것이 있다고 하다. 김용만님은 고구려에 독자적인 신앙 체제가 있다고 하신다. 주인장은 한때 사신도를 토대로 사신교(敎)라고 하는 신앙이 존재한 것은 아닐까 의문을 가지기도 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백제에도 독자적인 신앙 체제가 있었다고 보여진다. 독자적인 문명권을 보유한 국가들인만큼 독자적인 신앙이나 사상 체계는 없었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그리고 신라 역시 그러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계림' 에서 난 시조가 나라를 세우니 나라 이름도 '계림' 이라고 하고 신궁을 설치해 '계신' 을 모시고 그 신을 존경하므로 '계우' 를 머리에 달고 다니던 신라인들을 천축인들은 '계귀' 에 사는 사람이라고 했었다. 신라인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하는 기록이었으며 이에 대해서는 주인장이 다시 글을 쓰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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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麗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7.09.13 이 글을 쓴지도 벌써 3년도 더 됐군요. 지금도 여기서 크게 바뀌지는 않았지만...암튼 신라인들이 닭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썼다고 볼만한 '정황' 근거는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수탉이라고 한 표현에는 뭔가 함축적인 뜻이 담겨있는 것이라는 데에는 동의합니다. 저도 지금까지 별 생각없이 넘어갔던 부분인데...다시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제게 자극을 줘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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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단인 작성시간 07.09.13 그냥 닭도 아니고 수탉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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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티얼 작성시간 07.09.13 죄송한데, 윗글에서 '삼국 중 가장 중앙집권국가로서 발전이 빨랐던 신라'라는 건 구체적인 근거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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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麗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7.09.15 거대한 영토를 가진 제국으로 커갈수록 중앙집권국가로서의 발전은 늦어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라는 달랐죠. 신라의 중앙집권화 정도는 고구려와 백제를 초월합니다. 유목민족적인 정치스타일도 그렇지만, 내부적으로 혈연적인 유대관계가 강하게 작용한다는 점, 다독여야할 내부집단의 규모나 숫자가 적었다는 점 등이 그러하겠죠. 그래서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군현제로 드넓은 영토를 다스리던 중국의 제왕조들 사이에서도 봉토를 받은 제후들은 늘상 존재했습니다. 고구려나 백제 역시 마찬가지구요. 물론 신라에 제후왕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차이가 있었다는 겁니다. 고구려와 백제와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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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성법맨 작성시간 07.09.15 후발주자로서의 응집력이 다른 두 국가와는 확연히 다르게 뛰어났던 점입니다. 백제가 관등을 가장 먼저 정비하지만 실제 운용에서는 다른나라에 비해서 한참 뒤떨어졌죠. 그리고 고구려 역시 각 지역의 성주들의 사병문제와 복속한 말갈족이나 다른 여타 부족 문제도 있어서 신라에 비해서는 확실히 국가 전체적으로 중앙집권화가 떨어진 면도 있으니까요. 아마 그걸 말씀하시는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