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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토론방

5세기 전반기, 고구려와 백제는 싸우지 않았다.

작성자百濟 牟大王|작성시간09.03.10|조회수585 목록 댓글 18

"하늘이여, 왜 세상에 저를 내시고, 또 제갈공명을 내셨습니까?"

 

삼국지연의에서 주유가 제갈량에게 농락당한 끝에 죽을 때 했다는 한탄.

죽을 때 저런 비슷한 한탄을 했을법한 인물을 우리 역사에서 찾아본다면

고구려 광개토왕에게 떡실신당한 백제 아신왕이 아닐까 싶다.

백제의 국운이 정점에 이르던 시기 왕실의 적장자로 태어났지만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부왕이 죽는 바람에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이어지는 숙적 고구려의 파상공세

이 절대절명의 시기, 절치부심. 고구려에게 무기력하게 밀리는 숙부를 제거하고 왕위를 되찾은 후,

그야말로 와신상담하며 모든 것을 쏟아부어 고구려 광개토왕과 대결.

그가 대고구려전을 위해 강행한 전시체제의 가혹한 수탈로 인해 백제는 기근과 인민의 이탈이 발생하는 등 바닥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아신왕은 연전연패. '노객'의 치욕과 영토의 상실, 그 패배와 굴욕속에서 그 또한 젊은 나이에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서론이 너무 길었고...

어쨌든 그런, 고구려와의 대결에 모든 것을 올인했던 아신왕이 죽은 후

해씨세력에 의해 왜에서 귀국하여 즉위한 전지왕과 그 뒤의 구이신왕 - 비유왕에 이르기까지

서기연대로는 대략 5세기 전반기에 해당하는 근 50년의 기간동안

 

놀랍게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백제본기에는

고구려-백제간에 단 한건의 전쟁기사도 전하지 않는다.

 

한편 광개토왕릉비문에는 광개토왕의 치세를 평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17세손(世孫)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 하였다. (王의) 은택(恩澤)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무(威武)는 사해(四海)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니, 백성이 각기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말하자면, 광개토왕대에 이르러 고구려 사방의 적이 모두 평정되어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족한' 평화로운 태평성대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단지 왕을 기리는 공덕비의 미사여구에 불과할까?

 

하지만 실제로 삼국사기를 비롯한 다른 역사기록은 이러한 비문내용에 부합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광개토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의 치세 동안, 고구려는 거의 외침을 받지 않았다. 삼국사기에서 80년에 가까운 그의 긴 치세가 거의 '조공' 기사로만 채워진 것은 그것이 그만큼 평화로운 시기였다는 것을 반증한다. 광개토왕이 등장하기 이전에, 적의 침략에 도성이 함락되어 천도하기를 두 번이나 하였고, 또 왕이 적의 침략을 막다 전사하기도 했던 고구려의 역사였음을 생각하면, 이는 너무나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라가 그처럼 평화롭고 넉넉했음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광개토왕의 조부인, 고국원왕을 죽인 원수의 나라

비문에서 '백잔'이라는 멸칭으로 불렀고 비문의 전쟁기사 대부분을 차지하는

그 '악의 축'인 백제와의 전쟁도 없었다는 것이다.

 

원수와, '악의 축'과 싸우지 않았다.

무엇을 의미할까?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건이 안 좋아서 싸울 수가 없거나,

아니면 싸울 필요가 없거나.

그런데 분명히 전자는 아닌 듯 하다.

그 시기 고구려는 어느 때보다 윤택했고 힘이 남아 돌았다.

그랬기에 당시의 최강대국 북위와의 갈등도 불사하면서 요서에서 일어난 북연멸망 사건에 개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비문에서 백제를 가리켜 '舊是屬民' 이라 하였는데

이것이 터무니없는 관념이 아니라면, 실상 비문을 세운 당시의 관점을 반영한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다.

 

악의 축 '백잔'이 위대하신 태왕의 감화를 받아 순순히 복종하는 '속민'이 되었다면, 더 이상 싸울 이유가 없을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이어지던 여-제간의 평화 시대가 끝난 것은

백제 개로왕의 즉위년부터이다.

재위 말기에 신라와의 동맹을 추진했던, 백제의 비유왕이 '흑룡'의 출현과 함께 죽고, 이어 개로왕이 즉위한 바로 그 해에, 고구려는 50년의 기나긴 평화를 깨고 백제를 침공한다.

그리고 곧이어 백제는 청목령 등지로 진출하며 북침을 개시하면서, 북위와 물길 등과 연결하여 고구려를 포위하는 외교전략을 구사한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여-제간 대결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결국 한성함락이라는 사실상 백제의 멸망이나 마찬가지인 사태로 결말지어졌다.

 

대려결전의 화신 아신왕의 죽음과

이어지는 50년의 평화

그리고 개로왕의 즉위를 기점한 전쟁의 재개

 

이것이 기록을 통해 재구성되는 5세기 전반의 흐름이다.

'평양천도와 고구려의 남진' 이라는 단순한 명제로 점철되어 있는 5세기 전반.

그 구체적인 역사상은, '고구려의 남진과 나제동맹의 대응'이라는 통설적인 관념과는 많이 달랐던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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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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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부여곤지 | 작성시간 09.03.14 흑룡을 학계 일반에서는 개로왕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 개인적으로는 개로왕보다는 당시 '왕비족'으로 표현될만큼 강성한 세력인 해씨세력의 정변으로 보는 것은 어떨까합니다. 오히려 개로왕은 비유왕의 적자라고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비유왕대 나제동맹으로 불리워지는 신라와의 교린기사와 더불어 말년에는 고구려와의 전쟁을 염두해둔 행동을 보이는데요 450년에 송에 풍야부를 파견하여 '요노'를 수입하는데 요노는 분명 전쟁무기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부여곤지 | 작성시간 09.03.14 또한 말년인 455년초에는 한산에 전렵을 하는데 전지왕 즉위이후 50년만의 전렵입니다. 특히 한산은 이전기사에 살펴보면 대고구려전의 전진기지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비유왕 말년에 대외정책의 변화로 인한 내부세력간의 갈등을 염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로왕은 이러한 정변의 과정에서 정권을 장악한 세력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위 후 해씨가 보이지 않는 점, 대고구려 강경정권이라는 점, 선왕의 장사를 후하게 지낸점 등은 오히려 비유왕이 개로왕에 의해 희생되었다기 보다는 그 밖의 세력 또는 인물에 의해 사망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 작성자성법맨 | 작성시간 09.03.14 제 생각이지만 아마 침류왕-아신왕-전지왕-구이신왕계열로 이어지는 근초고왕계열의 부여씨가 비유왕이 즉위하면서 모조리 숙청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구이신왕은 도대체가 한 게 없는 왕입니다. 게다가 비유왕도 정상적으로 죽지 않은게 확실합니다. 어쩌면 흑룡의 존재가 근초고왕의 적손을 지지하던 세력일지도 모른다고 봅니다. 아니면 다물정신님의 말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 답댓글 작성자부여곤지 | 작성시간 09.03.14 여담입니다만 백제사에서 흑룡이 두번출현합니다.^^;; 비유왕 사망과 문주왕대 왕제 곤지가 사망할때입니다. 여기서 후자인 곤지는 당시 병관좌평이던 해구와의 대결과정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대세적인 의견입니다. 흑색은 변고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전통적인 방위관념으로 북쪽에 해당합니다. 흑색이라는 것은 북부소속인 해씨세력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비유왕의 사망에도 해씨세력이 개입하였고 그것이 흑룡으로 표현되지 않았을까요?ㅎㅎ 여담이니 혹시 여러 선생님들 공부하시는데 인용하시지 마세요~
  • 작성자부여곤지 | 작성시간 09.03.14 저도 한성함락을 고구려 천하관에서의 이탈에 대한 응징 성격을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절대로 백제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백제는 근초고왕 대와 같은 백제 중심의 세계로의 복귀를 원하였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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