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 다물정신 작성시간09.03.10 양국의 묘한 이해관계라 봐야 하나요... 두 나라 다 각자의 비슷하다면 비슷하고 다르다면 다른 의미로 고구려의 ' 정복 관념 ' 에 대한 불씨가 자라고 있었던 셈이 되는군요~ 이 시기의 백제 - 신라 역시 성왕 때 북진시의 연합의 그 성질과 뭔가 오버랩되됩니다... 사실 말씀하신 전의 내물이사금 때 금성을 함락한 왜군 역시 백제와 관련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시각으로 따져보면 뭔가 ㅎㄷㄷㄷ 한데 (저 역시 그렇게 보구요) 그런 불편한 관계를 넘어설 정도의 이해타산이 맞았을 수 있었다는 얘기가 되려나요; ㅋ 뭐 가정을 통한 추론이겠지만
-
작성자 kamando 작성시간09.03.11 소강상태는 태왕비문 영락17년 백제정벌 인 407년으로 부터 440년 까지 약 30년간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소강상태가 백제가 고구려의 속민이 되고 태왕의 노객이 되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427년 평양천도와 435 -438 년의 북연접수와 북연 유민 흡수등 고구려 국내 문제 때문에 보류되었다고 보는편이 타당할것같습니다 그리고 백제개로왕 21년기에는 비유왕의 능이 만들어지지 못하고 가매장되었다고 한기록이 보이므로 이것은 비유왕 때부터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비유왕(427- 455)능조차 만들수 없었던 급박한 백제실정을 보여주는것이 아닐까 추정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 百濟 牟大王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09.03.12 비문의 영락 17년조는 후연과의 전쟁으로 봄이 타당하며, 소강상태는 440년까지가 아니라 455년까지입니다. 고구려가 평양천도를 할 수 있었던 이유 자체가 이미 백제가 평정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편이 타당하지 아직도 긴장이 지속되는데 백제국경 코앞에다 수도를 옮겼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비유왕 말기에 고구려의 압력 내지 공격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지만(비유왕의 반고구려성 정책과 흑룡출현) 역시 속단할 증거는 없으며, 비유왕이 가매장됐던건 백제 내부의 혼란 때문일수도 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부여곤지 작성시간09.03.14 또한 말년인 455년초에는 한산에 전렵을 하는데 전지왕 즉위이후 50년만의 전렵입니다. 특히 한산은 이전기사에 살펴보면 대고구려전의 전진기지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비유왕 말년에 대외정책의 변화로 인한 내부세력간의 갈등을 염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로왕은 이러한 정변의 과정에서 정권을 장악한 세력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위 후 해씨가 보이지 않는 점, 대고구려 강경정권이라는 점, 선왕의 장사를 후하게 지낸점 등은 오히려 비유왕이 개로왕에 의해 희생되었다기 보다는 그 밖의 세력 또는 인물에 의해 사망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 부여곤지 작성시간09.03.14 여담입니다만 백제사에서 흑룡이 두번출현합니다.^^;; 비유왕 사망과 문주왕대 왕제 곤지가 사망할때입니다. 여기서 후자인 곤지는 당시 병관좌평이던 해구와의 대결과정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대세적인 의견입니다. 흑색은 변고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전통적인 방위관념으로 북쪽에 해당합니다. 흑색이라는 것은 북부소속인 해씨세력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비유왕의 사망에도 해씨세력이 개입하였고 그것이 흑룡으로 표현되지 않았을까요?ㅎㅎ 여담이니 혹시 여러 선생님들 공부하시는데 인용하시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