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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明治好太王 작성시간09.12.16 고려가 30만을 동원할 수 있었다는 것은 단순히 대문예의 발언 때문만은 아닙니다. 1차 고당전쟁 때 고려가 동원한 병력이 30만을 상회했다는 기록도 이를 뒷받침 합니다. 저는 1차 고당전쟁 때 고려가 동원한 병력과 대문예의 발언을 전후맥락을 고려하여 반전파인 대문예가 과장했을 가능성은 적으며 오히려 축소 내지 정확한 발언이라 생각하는데, 님께서는 어떠한 근거로 대문예의 발언이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지 궁금합니다. 초기 고구려라면 몰라도 후기의 고려는 거의 농업경제국가로 봐도 무방할 듯 합니다. 초기에 비해 중, 후기에 들어서면서 고려의 약탈 비중이 점차 적어지면서 거의 사라지다시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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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 明治好太王 작성시간09.12.16 이러한 변화의 원인은 부여, 책성, 한반도 서북부, 요동일대의 농경지를 확보하여 더 이상 불안정한 약탈에 의존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안정적인 자급자족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양당서에 의하며 고려의 농경은 당과 비슷하다고 할 정도지요. 그리고 주필산 전투 때 참여한 말갈족은 북부 흑수말갈으로 수서에 의하면 흑수말갈의 정병은 3천 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주필산 전투 때 참여한 흑수말갈족은 아무리 많게 잡아도 6천 명 안팍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15만 대군에서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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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 데우스엑스마키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09.12.16 "강병 30만" 운운이 과장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 이유는 대문예가 무왕에게 당과의 화호를 건의하는 과정에서 나온 발언이었기 때문입니다. '고구려가 저렇게 강했는데 결국은 당나라한테 망했다'는 취지로 한 말이었으니 고구려 병력을 과장하면 과장했지 축소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또한 고구려의 핵심 지역인 요동, 압록강 유역, 서북한 지역 등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농경화 정도를 가늠하기엔 자료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고구려의 동원 병력에 말갈은 물론 선비 거란 등의 유목 민족이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상정할 수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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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데우스엑스마키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09.12.16 고구려에 복속된 종족은 부여뿐만 아니라 읍루 말갈 등도 있죠. 고구려의 영향권에 놓여 있던 지역 중 상당 부분은 후의 여진-만주족의 거주지로서 유목민은 아니더라도 목축 수렵 채취 등의 비중이 높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고구려 시대에도 경작화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 오해하실 수 있는데 저도 기본적으로 고구려가 정주 농경 사회였음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런 모습이 전 지역에 걸친 것일까 하는 데에는 다소 의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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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수신 작성시간09.12.31 생산력 뿐 아니라 국가시스템도 동원력의 개념에 포함될 수 있겠지요. 수나라의 경우 2차 여수전쟁때 대략 5천만 안쪽의 인구로 전투병만 113만명을 동원했습니다. 보급부대 등 부수인원 합쳐 3~4백만이었다고 하죠. 주워듣기로 17세기 독일의 라이프니츠였던가요 근대유럽의 지식인들도 "중국의 국가시스템을 배워야한다"고 했을 정도임을 상기할 필요는 있겠지요. 동아시아 국가들의 동원체제는 타문명권에 비해 비교적 일찍 발전했던 듯 합니다. 고려 인구를 4~5백만쯤으로 잡고 중국과 대등한 동원력을 가졌다고 보면 30만의 군대를 유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더군다나 공격이 아닌 방어 입장이라면 더더욱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