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하나의 추론일 따름이다. 노력에 비해 별 성과는 없는 추론이지만, 한번 제시해보겠다.
아래 이타인 묘지명을 해석해달라는 글이 있지만, 사실 묘지명은 무척 어렵다.
전문 전체를 정확히 해석하기란, 참 곤욕스럽다. 시간도 꽤 걸리고.
그런데 이타인 묘지명을 안 이후로, 늘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 하나 있었다.
* 이타인 묘지명은 [중국 소재 고구려 관련 금석문 자료집], 고구려연구재단, 2005년 을 참조했음.
바로 이타인의 조상과 이문진의 관계다.
확인 차 이타인 묘지명에 대한 글을 쓴 배근흥(중국 섬서사범대학 역사문화학원교수 - 한국에서 박사학위 받음)의 '당 이타인 묘지에 대한 몇가지 고찰' (충북사학 24집. 2010년)을 구해서 읽어보았다. 배근흥은 이타인은 고구려인이라고 하면서도, 그의 성씨인 이씨가 고구려 주요 성씨에서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씨가 있다. 바로 이문진이다.
이문진의 활동 연대는 서기 600년 '신집 5권'을 편찬 한 것에서 볼 때, 대략 560년 +-, 615년 +-
이 정도로 추정할 수 있겠다. 신집을 편찬할 때 나이를 40대 정도, 사망을 55세(고구려 평균수명-유아사망 제외) 를 기준으로 하면 그렇다.
조금 늦게 잡자면,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25세 이상이어야 하니 575년보다는 앞서 탄생했을 것이다.
그런데 익산이씨 족보에는 이문진이 577년에 출생하여 642년에 죽었으며, 영양왕때 태학박사, 문부전서, 오경박사로 공신후가 되고, 백제 공주와 혼인하여 백제로부터 익주를 식읍으로 하사 받았다고 하였다. 24세에 신집 5권을 편찬했다는 것이 좀 어색하기는 하다. 익산이씨 족보에는 이문진의 선대, 후대에 대해 모른다고 했다.
고구려 역사에서 발견한 두 사람의 이씨. 이문진과 이타인은 전혀 무관한 사람일까?
두 사람의 연결고리는 이타인의 아버지의 이름이 맹진(孟眞)이라는 점이다. 문진(文眞)가 뒤 글자가 같기 때문에, 혹시 형제 관계를 상정할 수 있지 않을까?
먼저 이타인에 대해 알아보자. 그의 묘지명에는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기록하지 않은 대신, 675년에 당나라에서 67세로 죽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는 609년생이 된다. 그는 고구려에서 책성도독을 지냈다. 그리고 당나라로 망명했다. 그의 망명 시기는 그가 책성도독을 할 때의 나이와 직접 관련이 있으므로, 주목되는데, 배근흥은 그의 망명시기를 666년 이후로 보고 있다. 645년 1차 고-당 전쟁 전후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배근흥이 비판한 바 있다.
666년은 고구려에서 남생-남건 형제의 내분이 일어난 시기로, 고자(高紫) 묘지명에 보이는 고자의 아버지 고문(高文)이 당나라로 망명한 시기이기도 하다. 고문의 아버지 고량(高量)은 3품 책성도독위두대형에 등용되고, 대상(大相)을 겸한 인물이었다. 고량의 지위는 이타인의 가문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이타인 묘지명에는 맹진의 아버지를 복추(福鄒)라고 했는데, 그는 대형의 벼슬을 했다고 한다. 여기서 대형(大兄)은 『한원(翰苑)』에 등장하는 고구려 13관등 가운데 7위 관등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대형은 비록 5위 이상이 참석하는 대로 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하지만, 상황에 따라 지방장관이 욕살도 할 수 있다. 645년 당나라 군대와 싸운 남부욕살 고혜진은 대형이었다. 물론 그는 연개소문의 측근이어서 관등 이상의 직책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복추의 아들 맹진은 대상(大相)을 지냈는데, 대상이 정확히 몇등급인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고량이 책성도독 위두대형이면서 대상을 겸했다는 한 만큼, 대상도 5위 위두대형 관등이 맡은 관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맹진의 아들 이타인은 책성도독 겸 총병마로, 12개 주를 관할하고, 37개 부락을 통솔했다는 그의 비문에 등장한다. 책성도독은 적어도 5위 위두대형이 맡는 직책으로, 욕살과 같은 것이라 생각된다.
이렇게 본다면, 이타인은 할아버지, 아버지 보다 더 출세한 인물로 볼 수 있겠다.
그런데 그가 666〜668년 사이에 당나라로 망명하기 직전에 책성도독을 지냈다면, 책성도독이 되었을 때 나이는 어느 정도였을까? 5위 위두대형이 대로회의의 구성원으로 높은 직위라는 것과, 그의 집안이 차츰 성장하는 가문이었음을 우선 고려해야 한다. 묘비에 그는 어려서 학문을 배우고, 약관(弱冠-20세)에 관직에 오르기 시작했다고 했다. 고구려 후기 최고 권력자인 연개소문의 아들인 남생, 남건은 가문의 후광으로 20대에 위두대형이 될 수는 있었지만, 이타인은 최상위 가문 출신이 아닌 만큼 적어도 40대에서 50대 정도에 책성도독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50대 후반에 망명하여, 당나라에서 종 3품 우령군장군을 지냈다.
609년에 태어난 675년 67세에 사망한 이타인. 그렇다면 그의 아버지 맹진은 언제 출생한 것일까?
아버지와 아들의 나이 차이가 가장 적으면 15세에서 많으면 40세까지 차이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맹진은 605년에서 570년까지 나이의 폭이 넓어진다. 하지만 570년에 맹진이 태어났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감이 많다. 대략 20세 전후에 자식을 둔 것으로 본다면 580〜590년 무렵에 태어난 것으로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문진과 이맹진 두 사람의 나이를 비교할 때 아무래도 이문진이 윗사람일 가능성이 훨씬 많다. 이문진이 익산이씨 족보에 기록된 577년에 태어났다고 한다면, 이문진은 이 맹진의 형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맹진의 맹(孟)이란 글자는 한자로는 큰 아들을 의미하는 말이다. 맹이란 글자가 이 의미 그대로 사용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문진과 맹진이 사촌 정도로 볼 수는 있겠지만, 친 형제 사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문진이 맹진에 비해 가문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태학박사 문진의 관등은 13위 관등 가운데 불과 10위인 소형에 불과하다. 고구려에서 글 쓰는 사람은 그리 큰 대접을 받지는 못했다. 높은 벼슬을 하려면 전쟁에 나가 승리하거나, 무장 출신이 유리하다. 문진이 더 승진했다고 하더라도, 맹진에 비해 낮은 관직을 가졌다. 형제간에도 관직이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무엇보다 큰 차이는 두 사람의 출세 경로가 다르다고 하겠다. 문진이 학문이라면, 복추 - 맹진 - 타인은 아무래도 무장으로 성장했던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비록 문진과 맹진이 친형제간이라고 보기는 어려워도, 복추 - 맹진 - 타인으로 이어지는 신흥 귀족가문과 이문진의 활동시기가 겹치는 점은 분명 주목할 만하다. 복추, 맹진의 이씨 가문은 연개소문을 비롯한 연씨가문, 을지문덕 가문, 고량(고자) 가문 등과 마찬가지로 평원왕, 영양왕 때 성장한 가문이라고 하겠다. 이때에 이씨 가문에는 학문으로 이름을 떨친 이문진도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겠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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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明治好太王 작성시간 10.10.27 역시 이타인은 1차 고당전쟁 때 투항했다는 견해에 비판이 있었군요. 저도 윤용구 선생님의 논문을 읽고 망명시기 부분이 미심쩍어서 원문을 살펴봤었는데, 아무리 봐도 645년으로 볼 건덕지를 찾을 수 없었거든요.ㅋ 그때 윤용구 선생님이 이타인의 망명시기를 1차 고당전쟁으로 본 손철산 선생의 논문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 매우 실망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무튼 좋은 글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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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돌부처 작성시간 10.10.27 12개주와 37개 말갈부락의 규모를 보았을 때, 고구려의 책성을 통한 흑수지역 말갈의 통치를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계루라는 단어는 묘지명에서 처음 보는군요. 단지 고구려를 뜻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후기에 간간이 계루라는 것을 접하게 되는데, 어떤 부서의 명칭이 아닐까도 생각되는군요. 여하튼 전체적으로 해석이 되었으면 좋겟는데 어렵긴 정말 어렵네요. 한편, 이문진과의 관계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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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麗輝 작성시간 10.10.28 잘 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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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미주가효 작성시간 10.10.28 이문진과 이타인이라...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