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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토론방

삼국지의 시대와 고구려

작성자귀거래사|작성시간10.11.12|조회수1,020 목록 댓글 11

삼국지의 시대와 고구려

 

 

중국의 후한 말 정치적 혼란 속에 일어난 황건의 난(184년)은 곧 진압되었다. 하지만 그 후유증은 엄청나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이를 진압하는 군벌들의 세력이 커졌다. 189년, 군대를 이끌고 낙양에 들어온 동탁은 昭帝를 폐위시키고 獻帝를 옹립했다. 이를 계기로 군벌들의 실권다툼이 전 중국의 내전으로 발전하여 後漢의 중앙정부는 사실상 소멸했다. 이리하여 중국에서 위․촉․오의 삼국시대가 막을 열게 된다.

189년, 요동태수가 된 公孫度은 이러한 정세를 보고 요동군․현토군․낙랑군을 영역으로 자립하여 遼東候平州牧을 칭했다. 낙랑군은 이때부터 요동의 公孫氏 정권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고구려는 공손씨와 대치하게 되었다.

 

 

229년, 정식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吳의 손권은 蜀과 동맹을 맺고 동과 서에서 함께 魏를 공격할 것을 약속했다. 蜀과의 동맹에 성공한 손권은 海上을 통하여 요동의 公孫淵을 자기진영으로 끌어들일 공작을 시작했다. 232년에 파견한 손권의 使者는 귀국길에 산동반도 부근의 해상에서 魏軍에게 붙잡혀 처형되었지만 공손연의 사자는 무사히 南京에 도착하여 魏와 단교하고 손권과 손을 잡고 싶다는 공손연의 의향을 전했다. 크게 기뻐한 손권은 이듬해 다시 해상을 통하여 공손연에게 燕王의 칭호와 갖가지 보물을 보냄과 동시에 1만 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魏의 明帝는 이 불온한 움직임을 보고 하북성․산동성의 군대에게 공손연의 토벌을 명했다. 이에 놀란 공손연은 吳의 사자의 목을 베어 낙양으로 보내 明帝와 화해하고 吳의 군대를 억류했다. 공손연에게 번롱 당했음을 깨달은 손권은 크게 노하여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이 직접 遼陽을 공격하여 공손연의 목을 베어 바닷물 속에 던져버리지 않으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리라고 펄펄 뛰었으나 群臣의 만류로 겨우 분을 삭이고 있었다.

 

 

공손연에게 억류된 吳의 사절 가운데 태단, 장군, 두덕, 황강의 4인은 吳의 장병 60명과 함께 현토군에 격리 수용되어 있었다. 이들은 폭동을 일으켜 성을 탈취하려고 했지만 이 계획은 사전에 누설되고 말았다. 이를 알아차린 4인은 성을 탈출한 후 멀리 동쪽의 고구려를 향하여 필사의 도주를 했다. 그리고 무사히 고구려에 도착하여 동천왕의 보호를 받았다. 고구려는 이들을 使者를 딸려 南京으로 돌려보내주었다. 이것은 고구려가 공손연과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吳와 고구려 사이에 우호관계가 성립하였다. 손권은 이번에는 고구려를 경유하여 공손연을 치려고 계획했다. 고구려는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그러나 고구려는 공손연과 적대한다고 해서 魏까지 적으로 돌리면서 吳와 연합할 생각은 없었다. 236년, 고구려는 손권의 사자의 목을 베어 魏에 보냈다.

 

 

이와 같은 움직임에 불안을 느낀 魏의 明帝는 공손연 토벌을 결심했다. 西安에서 蜀軍과 대치하고 있던 司馬懿를 불러들여 원정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4만의 중앙군과 북경의 관구검(무구검이라고도 함)의 부대를 지휘케 했다. 238년 여름, 위군은 요하를 건너 요양성을 포위했다. 공손연은 수백 騎와 함께 포위망을 뚫고 탈주하려고 했으나 위군에 패하여 살해되었다. 이로서 50년에 걸친 공손씨정권은 막을 내리고 낙랑군은 다시 魏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해 연말, 明帝는 중병으로 자리에 누웠다. 명제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이듬해 정월, 명제가 죽고 명제의 養子인 8세의 曹芳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조방의 친척인 曹爽과 사마의가 어린 황제의 후견인으로 임명되었다. 조상은 蜀의 토벌작전을 계획하고 244년, 10만의 병을 이끌고 西安을 출발했다. 그러나 조상은 정말로 전쟁을 할 생각은 없었다. 위군은 촉군과 교전도 하기 전에 철수했다. 이 작전은 오랫동안 사마의의 텃밭이었던 서북지역에서 사마의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대신 자신의 영향력을 심어놓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사마의는 팔짱을 끼고 있지만은 않았다. 244년, 자신의 새로운 기반이 된 요동방면에서 대대적인 군사행동을 일으켰다. 고구려정벌을 꾀하여 부하 관구검을 앞세워 고구려를 공격했던 것이다. 동천왕은 분전했으나 결국 패하여 고구려의 수도는 관구검에게 점령당하고 동천왕은 옥저로 피난을 했다. 그러나 魏軍은 곧 고구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현토군 태수 왕기가 전사하는 등 적지 않은 피해를 입고 결국 퇴각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장수 유유와 밀우가 위군을 물리치는데 크게 활약하였다. 2년에 걸친 이 위군의 대대적인 공격은 고구려뿐만 아니라 부여와 옥저, 삼한 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威名을 더욱 드높인 사마의는 249년, 드디어 궁중쿠데타를 일으켜 라이벌 조상을 죽이고 그 일파를 모두 추방했다. 이로써 魏의 全權은 사마의의 수중에 돌아갔다. 사마의는 2년 후에 죽었지만 그의 손자 사마염은 魏의 元帝를 퇴위시키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晉朝를 열었다. 이것이 晉의 武帝이다.

이러했으므로 249년의 사마의의 쿠데타는 晉의 사실상의 건국이었다. 그리고 사마의에게 쿠데타의 찬스를 준 것은 238년의 공손연정벌의 혁혁한 戰功이었다. 동북의 공손연의 舊領은 晉의 황실에게는 창업의 地였고,  건국의 기반이었던 것이다. 진의 무제 시대에 陳壽에 의해 편찬된 正史 三國志에 동이전이 별도로 들어있는 것은 이와 같이 동북의 地가 진조의 건국과 인연이 깊은 땅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원래 서역진출에 관심이 많았던 나라이다. 하지만 삼국지에 서역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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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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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귀거래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11.13 고구려초기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서에 나오니까 대충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4세기 이전의 백제.신라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서에 나오지 않습니다. 물론 삼한은 나오지만요. 2백년대 백제.신라의 역사는 안개속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당유고라는 것은 잘 모르겠지만 그 성립이 최근의 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남당유고는 그 기사의 원사료가 무엇인지가 밝혀지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2차적인 사료의 의미 밖에 없지 않을까요?
  • 답댓글 작성자낙랑 | 작성시간 10.11.13 남당유고는 아직 진서라는 근거가 없으니 위서라고 보는 편이 합당합니다. 극소수의 일부 아마추어 분들을 제외하고 학계 연구자들은 화랑세기를 제외하고는(화랑세기 마저도 지금은 부정론쪽에 거의 완전히 기울어진 형국이지만요) 거들떠보지도 않았죠. 이러한 형국이니 독자연구의 범위를 벗어난 역사토론에서는 남당유고 언급을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성일님이 남당유고를 토대로 이런저런 열린 가능성을 시사하시는 것은 좋은 태도라고 생각합니다만 요즘은 다소 최소한의 기본적인 틀을 넘으신 듯한 느낌도 듭니다. 덕흥리 벽화 무덤을 근초고왕의 것이라 주장하시는 것도 그렇구요...
  • 작성자정성일 | 작성시간 10.11.15 남당유고는 일본 궁내성 서릉고에서 남당 박창화 선생이 필사하여 가져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저본을 확인할 수 없는 관계로 위서로 분류되고 있음은 사실입니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타사서(삼국사기, 중국정사조선전, 일본서기)와 교차검증 또는 고고학적 유물과 비교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남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전미추왕릉과 전내물왕릉과 황남대총(실성왕릉)의 피장자의 유전자를 추적하여 내물왕릉의 피장자와 미추왕릉의 피장자를 가려낼 수 있다면 남당유고의 진위여부의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만약 내물왕과 실성왕의 부인이 미추왕과 부녀사이가 성립한다면 그 증거가 되겠죠.
  • 답댓글 작성자정성일 | 작성시간 10.11.15 현재는 미추왕릉으로 전해지는 대릉은 미추왕의 사망시기와 고고학적으로 1세기 정도가 차이나는 관계로 미추왕릉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데, 미추왕릉이라고 주장하는 분들은 남당유고가 진서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황남대총의 남분의 피장자가 60세 전후 혹은 60대에 죽은 것이며 금동관이 출토되고, 북분의 피장자는 그 보다 20년후에 묻힌 것으로 보이며 여성이라고 하였는데, 탄소연대측정을 통하여 5세기 전반에 죽은 내물-실성-눌지 3분중에서 한 분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남당유고에 의하면 실성의 무덤이라고 볼 수 있는데, 부정론자들은 왕릉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함이 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정성일 | 작성시간 10.11.15 내물왕릉은 아직 조사발굴이 이루어져 있지 않는데, 미추왕의 외손자이고, 삼국사기에 의하면 미추왕의 몰년이 284년이며, 내물왕의 재위기는 356-402(47년간)이다.
    내물왕의 어머니 나이와 출산가능 나이를 고려하여 내물왕은 최소70대에 돌아가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남당유고에는 내물왕이 돌아가실 때 나이가 53세이다.
    만약 나의 주장이 고고학적 발굴과 일치하였을 때 또 다시 이젠 내물왕릉으로 전하는 무덤이 내물왕릉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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