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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토론방

고구려의 신라, 북연 구원시 태도

작성자明治好太王|작성시간11.06.01|조회수983 목록 댓글 6

399년 신라의 구원요청을 받은 고구려는 이듬 해인 400년 초에 보기 5만 명을 파병하는데, 고구려군이 도착했을 시점에는 이미 신라의 수도가 왜군에게 점령당한 뒤였습니다. 달리 말하면 광개토태왕은 속국이었던 신라가 도성이 함락될 정도로 굉장히 위급한 상황이었음에도 즉각 구원군을 보내지 않았던 것입니다.

 

435년 말 북연의 구원요청을 받은 고구려는 이듬 해인 436년 2월에 북위로부터 북위가 북연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4월에 갈로와 맹광이 이끄는 2만 병력을 파병하여 북위보다 먼저 화룡성에 입성한 뒤 5월에 풍홍과 북연의 백성들을 북위로부터 구원하여 고구려로 데리고 옵니다. 첨언하자면 풍홍이 <만일에 사태가 급해지면 고려에 의지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볼 때, 풍홍으로서는 가급적이면 자력으로 북위와의 마찰을 해결하려고 생각했던 것으로 그에게 있어 고구려라는 카드는 정말 어쩔 수 없을 때 꺼내 쓸 최후의 비책으로 여긴 듯합니다.

 

고구려의 신라와 북연에 대한 구원 작전의 공통점은 신라와 북연이 위급함에도 불구하고 이 두 국가가 스스로 고구려에 구원요청을 하기 직전까지 일체의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으며, 구원 요청을 받은 뒤에도 짧게는 수 개월 길게는 1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군사를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기간 동안 파병준비도 하고 사태추이를 관망했을 것입니다. (북연 구원작전 같은 경우, 고구려는 북위가 북연에 1만 명만 파병한 것을 파악하고 북위에 압박을 주고자, 그 두 배인 2만 명을 파병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차이점으로는 고구려의 신라 구원군이 금성이 왜군에 의해 함락된 후에 신라에 도착했다면 고구려의 북연 구원군은 화룡성이 함락되기 전에 북연에 도착한 것으로 북연 구원에 대한 고구려의 대응이 좀 더 신속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가 비록 신속한 구원 작전으로 풍홍을 비롯한 북연의 지배층과 이하 백성들을 고구려로 데리고 오기는 했지만, 북연의 영토가 북위에게 넘어가는 것은 막지 못 했습니다. 반면 신라는 백제, 가야, 왜 연합군으로부터 완벽히 구원했습니다. 이는 아마도 현실적으로 고구려가 상대하기에는 다소 벅찰 수도 있는 국력을 가진 북위와 상대적으로 고구려보다 약한 백제, 가야, 왜 연합군의 국력의 차이에서 나온 결과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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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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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明治好太王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06.01 혹시 모두루 묘지명 관련해서 하신 말씀이신지요?
  • 답댓글 작성자쥬르센 | 작성시간 11.06.01 ㅇㅇ
  • 답댓글 작성자明治好太王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06.02 우선 저는 염모의 활동시기를 고국원왕이 아닌 서천왕 연간으로 추정합니다. 본 게시판의 5702번 글에서 이에 대해 자세히 쓴 바 있습니다. 사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당시 고구려가 북부여에 대해 성지 말고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 기록 자체가 거의 없기 때문에 고구려의 태도가 어땠을 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 본 바가 없는데, 이번 기회에 생각을 좀 해봐야 겠군요. 혹 따로 생각해보신 것이 있으신지요?^^
  • 작성자삼한 | 작성시간 11.06.04 '북연이 고구려의 속국이었다면 왜 바로 구원하지 않았을까'라는 주장의 반론이군요. 그런데 마지막 문단을 보면 모든 북연의 영토가 완전히 넘어간 것처럼 기술하셨는데 용성을 기준으로 용성의 동쪽은 완전히 고구려의 영역이 된 것으로 보는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답댓글 작성자明治好太王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06.05 저도 그러한 주장을 적극적으로 말하는 편인데, 구체적인 시기에 대해서는 장수태왕 대로 보지 않고 안장태왕 대로 보고 글을 쓴 바 있습니다. 본 게시판의 5695번 글을 찾아서 보시면, 도움이 되실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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