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序
유주자사 진은 고구려와 후연 및 북연과의 관계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인물이다. 유주자사 진의 출신과 활동내용이 좀 더 명확했다면 당시의 정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묘지명에 남아있는 출신지마저 불투명하여 순수 고구려인인지 혹은 망명객인지 여부가 가장 큰 논란이 되고 있다. 그런데 망명객인지 여부 자체가 문제라고 볼 수는 없다. 고구려는 본래 개방된 사회였다. 오래전부터 타국에서 고구려로 많은 이주가 있었다. 따라서 망명객으로 보더라도 결국은 고구려인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고구려와 연의 관계 및 진의 활동과 관련하여 해석상 문제가 될 것이다.
Ⅱ. 덕흥리고분에 등장하는 관직의 분석
1. 유주자사 진이 역임한 관직
유주자사 진이 역임한 관직은 建威將軍, 國小大兄, 左將軍, 龍驤將軍, 遼東太守, 東夷校尉, 幽州刺史이다. 또한 長史, 司馬, 參軍, 典軍錄事, 中裏都督과 같은 관직도 보인다. 나열되어 있는 관직을 보면 중국식 관직으로 보인다. 물론 국소대형과 중리는 순수한 고구려의 관직이다. 또한 태수는 고구려에도 설치된 바 있고, 장사·사마·참군 등의 관직은 광개토태왕이 설치했다는 명시적인 기록도 있다. 한편 용양장군 등은 백제의 관직으로도 등장하기 때문에 고구려 또한 설치했을 가능성이 있고, 동이교위의 경우 고구려가 신라를 동이로 불렀기 때문에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2. 고구려에 설치되었을 가능성
고구려에서 자사, 도독, 장군 등을 설치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고구려는 자사 및 도독에 해당하는 순수한 고구려식 관직이 있었고, 성-곡-촌의 행정구역 체계가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대장군-장군에 해당하는 대당주-당주의 군사체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의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위 관직들이 광개토태왕에 이르러 통상적으로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앞서 언급한대로 고구려가 이 시기에 장사, 사마, 참군을 설치했다는 명시적인 기록이 있다. 따라서 기타 장군 등의 관직을 설치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따라서 욕살, 당주 등이 도독 및 장군 등으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진이 망명객이라고 볼 근거는 전혀 없다. 다만 태왕비에 여전히 성-곡의 행정구역 체계가 존속하고, 중원고구려비에 수사나 당주와 같은 고구려식 관직이 다시 등장한다는 것은 모든 체제를 다시 환원시켰다는 것을 의미하거나 혹은 양자를 혼용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지, 통상적으로 모든 체제를 바꾸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둘째, 위 관직들이 일부 지역에서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광개토태왕은 불과 3년만에 빼앗긴 신성·남소성은 물론 요동성, 평곽이남 및 평주를 모두 점령하였다. 이 지역들은 일시적인 사건을 제외하고는 수백년간 한나라 혹은 북방민족의 땅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넓은 지역과 그 지역의 모든 관리를 단시간에 고구려의 행정체제로 편입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모든 관리들에게 고구려의 관등을 부여하는 것도 당시 고구려 관등체계를 고려한다면 매우 벅찬 일이다. 따라서 새로 얻은 땅에 유주를 설치하고 그들에게 친숙한 도독, 자사, 장군 등의 중국식 관직을 부여했을 가능성이 크다. 즉 기존의 고구려 영토와는 관계없이 오로지 새로이 얻은 지역에서만 실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은 망명객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이 경우를 전제로 진은 요동을 지키던 후연의 장수였으며 고구려에 투항한 후 국소대형의 관직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후에 한기라는 인물이 고구려에 잡혀와 대사자의 관등을 부여받았는데 그 관위가 비슷하다. 그 후 고구려는 새로 얻은 지역을 유주로 재편하여 진을 자사로 임명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Ⅲ. 진을 망명객으로 볼 수 있는가
1. 동이교위
두 번째의 가능성을 택하더라도 진이 망명객이어야만 한다는 필연성은 없다. 그런데 위 관직들을 고구려가 설치하였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결정을 주저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바로 동이교위다. 고구려가 신라를 동이라고 부른 사례가 있으므로 고구려가 동이교위를 설치하는데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진이 역임한 동이교위는 요동태수와 유주자사의 사이에 있다. 그렇다면 동이교위를 요동에 설치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고구려에 있어서 동이는 신라 등인데 왜 요동에 동이교위를 설치했을까. 일반적으로 요동에 동이교이를 설치하는 것은 중국이 동방을 제어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고구려가 진을 동이교위에 임명했다고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 시기에 진을 동이교위에 임명할 수 있는 것은 후연, 북위 또는 북연이다. 고구려와 전쟁중이던 후연이 고구려에 투항한 진을 동이교위에 임명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북위의 경우 장수태왕에 이르러 고구려와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북위가 진을 동이교위에 임명했을 가능성도 전혀 없다. 그렇다면 북연이 진을 동이교위에 임명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2. 동이교위는 겸직이다
동이교위와 유주자사는 진이 마지막으로 역임했던 관직이다. 따라서 그가 죽기 직전에 역임했다고 보아도 문제가 없다. 그는 408년 12월에 능에 묻혔다. 이 시기의 국제정세를 살펴보면 407년 후연이 몰락하고 북연으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고구려와 북연은 곧 접촉을 한다. 이때 고구려의 유주(요동과 평주를 포함하는 지역)를 관할하던 인물이 바로 진이다. 따라서 고구려가 아닌 타국에서 동이교위에 임명한다면 그 주체는 북연이 되어야 한다. 진이 본래 후연출신이었다면 북연이 진을 통하여 고구려에 용이하게 밀착하려던 수단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진은 죽기 직전에 고구려의 유주자사와 북연의 동이교위를 겸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Ⅳ. 진을 통하여 본 고구려와 북연의 관계
1. 요해에서의 고구려 영역
진이 유주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확보했기 때문에 북연이 진을 동이교위로 임명했다고 볼 수는 없다. 당시 고구려의 군사력은 막강했고 다만 행정편의상 별개의 주를 설치했을 뿐이다. 그런데 왜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하위에 있었던 북연이 고구려 유주자사에게 관직을 내릴 수 있었을까. 이것은 고구려와 북연의 영역과 관련해서 살펴볼 수 있다. 고구려는 402년 요동은 물론 평주까지 함락시켰다. 404년 다시 후연을 침범하였는데 평주에서 좀 더 진출했을 가능성이 있다. 혹자는 405년 이후 요동성을 공격받았다는 이유로 평주를 다시 빼앗긴 것으로 파악을 하는데 이는 잘못된 견해이다. 후연이 평주를 빼앗기고 후에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고 했다. 따라서 고구려가 평주를 다시 빼앗겼다고 볼 수 없으며, 후연의 요동성 공격은 북으로 조금만 우회해도 가능하다. 바로 다음 해인 406년에는 크게 거란영역을 우회하여 목저성을 공격하기도 하는데 이를 통하여 보아도 그렇다. 406년에 거란을 습격했던 이유가 아마도 405년 요동성을 공격할 때에 고구려에 복속한 거란에 의해 보급로를 차단당하는 등의 피해를 입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 평주를 비롯하여 용성을 제외한 요해의 남단의 대부분은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된 이후 계속 유지되었다.
2. 고구려 유주와 북연과의 관계
후연이 몰락하고 북연이 들어섰다. 분명 고구려 유주의 상당지역과 북연과의 영역은 겹치고 있다. 고구려로서는 북연을 완전히 병합하지 않고 완충지대로 존속시키기로 결정한 이상 고구려 유주의 재편이 불가피할 것이고 일부의 현은 북연에 이양하는 시간과 작업이 필요하다. 설사 이양하지 않더라도 북연 영역에 대한 고구려 유주의 관할권이 존속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업무는 결국 북연과의 공동작업이 될 것이고 이것을 담당하게된 고구려 유주자사 진에게 북연이 특별히 관직을 내렸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는 단기간에 상당히 넓은 영역과 인구를 확보하였다. 고구려 유주는 이 넓은 지역에 설치한 고구려 고유의 행정구역이므로 그 소속된 각 군을 기존 중국의 군과 일치시켜서 보아야 할 필연성은 없다. 따라서 고구려가 남긴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 이상 모든 13개군의 정확한 위치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고구려가 행정편의상 유주와 13개군을 요동과 평주 등에 걸친 지역에 설치를 하였고 일정기간 유지를 했기 때문에 덕흥리고분에서 볼 수 있듯이 유주자사 진이 각 군의 관리들과 업무를 수행하는 벽화가 남은 것이다. 북위가 장수왕을 도독요해제군사로 봉하는 것도 이 지역에서 고구려가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 유주와 북연과의 관계는 마치 후에 고려와 원나라와의 관계에 있어서 정동행성과 같은 기구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북연의 영역에서 여전히 고구려가 영향력을 미치고 고구려인이 그 지역 관리들을 통솔하는 모습이 그렇다. 결론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존의 중국에서 설치한 유주와는 별개로 고구려가 독자적으로 설치한 유주가 있음을 전제로 일정기간 이 지역에서의 고구려 영향력이 미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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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돌부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1.06.22 즉 그때까지는 진나라 등의 출신들은 그들의 양식이 친숙하다는 것입니다. 문화는 자신에게 친숙한 것을 따르기 마련입니다. 망명객이 절대적으로 고구려 문화를 따랐다고 단정지을 순 없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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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조수아 작성시간 11.06.22 그렇게 보기에 덕흥리 고분은 굉장히 고구려적입니다. 벽화의 여러 그림도 고구려 풍속, 고구려의 군사 편제 등을 담고 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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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돌부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1.06.22 덕흥리고분의 형식과 어떤 벽화들이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무덤이 중국식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문화란 정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고구려식을 따른다든지 모두 중국식으로 따른다는 필연성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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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조수아 작성시간 11.06.22 네 필연성은 없지만 무덤 양식과 벽화 내용이 고구려식이므로 진의 장례도 고구려 풍습처럼 치러졌을 가능성이 높음을 말씀 드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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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백토벤 작성시간 12.02.12 역사 초보인데요/.진의묘서명에 자손들이 후에 관급이 후왕에 오를것을기대하는 어귀가있는데,이는당시묘서명에나타난글귀지만 후왕을 칭할수있는신분은 유주자사신분이 고구려왕족이 아니었나하는점.또한 처음에 진의출신지명은어느곳이냐 하는점 무엇이논란이되는지 생각깊게하지말고 드러난데로 이해하면될것을 역사서 한건보다 죽은자의 무덤이 더 신빙성 있지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