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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자사 진

작성자돌부처| 작성시간11.06.16| 조회수821| 댓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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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귀거래사 작성시간11.06.16 일본학자 武田幸男은 진의 관위 가운데 건위장군. 요동태수는 후연에서 수여받은 것이며, 좌장군. 용양장군. 유주자사는 고구려에 망명한 후의 자칭이라고 추측하더군요. 유주자사는 幽州에 속하는 13군 태수의 來朝圖의 묵서명에 '州治廣계, 今治燕國'이라고 있는 바와 같이 燕郡의 계현에 치소를 두고 있었는데 그 계현은 廣陽郡이며, 광양군은 과거 후한의 郡名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 돌부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1.06.16 일반적으로 관직나열순서는 진이 역임한 관직의 순서라고 봅니다. 그런데 건위장군은 몰라도 국소대형을 거친 이후인 요동태수를 후연에게서 수여받았다고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今治燕國에서 연국은 본문의 논지대로라면 북연으로 보는게 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 작성자 zmazma 작성시간11.06.17 재밌는 가설이고 일리있는 설명이라 생각되긴 한데 좀 걸리는 게 있습니다. 이 가설의 최대 약점이라 생각되는데 바로 13군의 위치입니다. 본문에서는 상대적으로 단시간에 광역지대를 확보한 까닭에 고구려식 행정체계로 바로 편입시킨 것이 아니라 이전에 지배받던 중국식(후연)의 행정체계를 이용한 것으로 전제를 했는데 여기까지는 일리가 있습니다만 그렇다면 이전에 후연의 행정 규정이 고구려가 점령하여 유주로 설정된 부분에 13군이 설치가 되었다는 얘기로 귀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교치를 상정하신 거라 생각되는데 당시는 이 지역이 평주로 편제되어 있었고 유주 13군과는 어떤 교치상 연결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zmazma 작성시간11.06.17 그렇다고 고구려가 임의로 교치 지명을 설정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처음에 전제했던 '후연의 행정체계'를 거의 그대로 가져와 혼란을 막는다는 것과 상충되는 면이 있습니다. 물론 단순히 행정체계를 임시로 사용하는 것과 지명은 따로 쓸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별개이긴 하지만 어느 정도 연고가 있어야겠지요. 교치를 하는 주된 이유는 이전에 지배하던 곳이 모종의 이유로 상실하게 되었음에도 아직까지 지배력을 상실하지 않았다고 명분을 놓거나 혹은 수복 의지를 담는다거나 혹은 상실 지역주민을 따로 모아놓고 행정설치를 하는 것인데 고구려 유주는 이런 사례들과 맞는 면이 없다고 생각되는 바 그 부분의 전제는 무리라 생각합니다
  • 작성자 明治好太王 작성시간11.06.18 개인적으로 3-2 부분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다만, 숙군성은 고구려가 함락한 후에도 여전히 후연과 북연의 영토로 나오는데, 이는 고구려의 숙군성 함락이 일시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진서와 자치통감을 볼 때 고구려는 늦어도 403년 12월 이전에 모종의 이유로 숙군성으로부터 자진철수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 작성자 조수아 작성시간11.06.21 동이교위를 북연이 진에게 하사한 벼슬이라 생각지 않습니다. 이유는 진의 매장 연도가 408년이기 때문입니다. 진이 망명객이든 순 고구려인이든 장례시에 고구려의 풍습을 따랐을 것은 자명, 408년에서 3년을 거스르면 진의 사망 연도는 406년이 됩니다. 따라서 북연이 건국된 407년과는 오차가 있습니다. 진이 유주자사에 임명된 해는, 그러므로 406년 이전이 되어야겠지요. 아마 태왕이 404년 연군을 쳤을 때 진이 유주자사를 역임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동이교위는 신라에 대한 벼슬로 봅니다. 역동적이었던 고구려의 모습을 볼 때, 그리고 400~404년 동안 신라에 대한 벼슬을 역임하고 유주자사로 임명된 게 자연스럽다고 볼 때요.
  • 답댓글 작성자 쥬르센 작성시간11.06.21 그럴수도 있겠네요.ㅎㅎ 신선한 아이디어 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 돌부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1.06.22 물론 이미 김용만 선생님께서 예전에 고구려의 3년상을 고려한 사망년도를 판단한 글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같이 판단한 이유는 고구려가 동이교위를 설치했다고 보기에 역시 이질적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후에 신라를 관할한 '신라토내당주'나 '고모루성수사'와 비교하면 말이지요. 그리고 사지절을 단지 동이교위에 내렸다고 보기도 좀 어색하다는 생각입니다. 관례를 보면 보통 평주자사가 동이교위를 겸하고 사지절을 받지요. 사지절동이교위유주자사가 동시 역임한 관직이 더 자연스럽다고 봅니다. 4세기 평양지역 무덤을 보면 고구려 양식과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돌부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1.06.22 즉 그때까지는 진나라 등의 출신들은 그들의 양식이 친숙하다는 것입니다. 문화는 자신에게 친숙한 것을 따르기 마련입니다. 망명객이 절대적으로 고구려 문화를 따랐다고 단정지을 순 없다고 봅니다.
  • 답댓글 작성자 조수아 작성시간11.06.22 그렇게 보기에 덕흥리 고분은 굉장히 고구려적입니다. 벽화의 여러 그림도 고구려 풍속, 고구려의 군사 편제 등을 담고 있구요.
  • 답댓글 작성자 돌부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1.06.22 덕흥리고분의 형식과 어떤 벽화들이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무덤이 중국식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문화란 정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고구려식을 따른다든지 모두 중국식으로 따른다는 필연성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 조수아 작성시간11.06.22 네 필연성은 없지만 무덤 양식과 벽화 내용이 고구려식이므로 진의 장례도 고구려 풍습처럼 치러졌을 가능성이 높음을 말씀 드린 것입니다.
  • 작성자 백토벤 작성시간12.02.12 역사 초보인데요/.진의묘서명에 자손들이 후에 관급이 후왕에 오를것을기대하는 어귀가있는데,이는당시묘서명에나타난글귀지만 후왕을 칭할수있는신분은 유주자사신분이 고구려왕족이 아니었나하는점.또한 처음에 진의출신지명은어느곳이냐 하는점 무엇이논란이되는지 생각깊게하지말고 드러난데로 이해하면될것을 역사서 한건보다 죽은자의 무덤이 더 신빙성 있지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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