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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토론방

광개토왕시대 5 - 백제의 태자 전지는 인질이었나?

작성자귀거래사|작성시간11.07.03|조회수597 목록 댓글 3

광개토왕시대 5 - 백제의 태자 전지는 인질이었나?

 

태자 전지의 인질에 대하여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는 각각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여름 5월에 왕이 왜국과 더불어 우호를 맺고, 태자 전지를 인질로 보냈다. (백제본기 아신왕 6년)

 

<백제기>에 말하기를 아화왕(아신왕)이 貴國에 무례를 했기 때문에 우리 침미다례 및 현남, 지침, 곡나, 동한의 땅을 빼앗았다. 그래서 백제는 왕자 직지(전지)를 天朝에 보내 先王의 우호를 지킬 것을 약속했다. (일본서기 應神 8년)

 

아신왕 6년은 삼국사기 연표에 의하면 397년이지만 396년의 일로 보아야 한다. 396년 백제의 아신왕은 광개토왕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영원히 奴客이 되겠노라고 맹세를 했다. 그런데 바로 그해 아신왕은 왜국과 손을 잡고 태자 전지를 인질로 보낸 것이다. 왜 아신왕은 태자를 인질로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백제의 아신왕이 ‘귀국’에 무례를 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일본학자들은 일본서기를 근거로 하여 야마토정권의 군대가 369년에 가라7국을 평정한 뒤 전라도 소재의 땅을 백제에 할양해주었으며 백제의 근초고왕은 이를 감사히 여기며 백제가 영구히 야마토정권의 번국이 되어 조공을 하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396년 아신왕이 이 약속을 어기고 고구려의 속국이 되겠다고 광개토왕에게 맹세를 했기 때문에 야마토정권이 자신들과의 약속의 준수를 요구하여 침미다례 등의 땅을 회수하고 전지태자를 인질로 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과연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이야기일까? 일본서기에는 369년의 가라7국 평정에 관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있다.

 

神功49년 3월에 (神功황후는) 荒田別. 鹿我別을 장군으로 삼아 신라 원정군을 일으켰다. 그들이 구저(백제인)와 함께 卓淳國에 이르러 신라를 치려고 할 때 누군가가 말했다. ‘병력이 부족하여 신라를 칠 수가 없다. 沙白과 蓋盧를 보내 증원군을 요청하자.’ 그래서 그들은 본국으로 가 증원군을 요청했으며 (神功황후는) 木羅斤資. 沙沙奴跪에게 정병을 주어 보냈다.... 이들은 신라를 쳐부수고..... 가라 7국을 평정한 뒤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고계진에 이르렀다. 이어서 남만 침미다례를 도륙하고 이를 백제에 양도했다.... 비리. 벽중. 포미지. 반고 등 4읍이 자진 항복하였다.... 근초고왕은 千熊長彦에게 백제가 영구히 일본의 번국을 칭하고 조공할 것을 맹세했다.

神功50년 5월, 千熊長彦. 구저 등이 백제에서 돌아왔다. 神功황후는 구저에게 물었다. “바다 서쪽의 諸韓은 이미 다 너희나라에 하사했다. 지금은 무슨 일로 왔는가?”

 

369년에 일본의 해외원정군이 신라를 격파하고 가라7국을 평정하고 전라도지방을 복속시켰다는 것이다. 이것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일본군이 한반도에 건너온 뒤 본국에 증원군을 요청하고 그 증원군의 도착을 기다려 신라를 쳤다는 것은 현실적이 아니다. 본래는 신라를 치기 위한 군대였을 터인데 막상 신라에 대해서는 ‘擊新羅以破之’ 라고 지극히 간단히 서술하고 나머지는 가라7국과 전라도지방을 복속시킨 이야기 위주로 되어있다. 이 기사는 이 군사작전의 주체가 일본군이 아니라 백제의 군대였다고 할 때 비로소 이해가 되는 것이다. 荒田別. 鹿我別은 일본식 이름을 써 놓았지만 이것은 일본서기 편자의 조작이고 원래는 목지국 장군의 이름이었다고 본다. 사백, 개로, 목라근자, 사사노궤는 각각 백제의 호족 사씨, 해씨, 목씨이고 千熊長彦은 진씨라고 본다.

 

사실 일본서기에는 이 원정군이 야마토정권의 군대라는 明文은 없다. 이 기사가 神功紀에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게 해석하는 것뿐이다. 神功황후는 200년대의 실제인물인 왜국의 여왕 히미코를 모델로 만든 가공인물이다. 이것은 거의 정설로 되어 있다. 그러나 왜국이 목지국이었음을 고려할 때 그녀를 진씨의 代役이라고 볼 여지도 있다. 神功(진구)은 근구수왕의 장인 ‘진고도’와 이름이 통한다. 일본서기 神功 49년(369) 조는 진씨가 주역이 되어 목씨, 사씨 등의 병력과 함께 출동하여 가야제국의 복속을 재확인한 뒤 전라도지방을 경유하여 위례성으로 귀환한 사건이었다고 본다. 이것은 침미다례(강진?)를 남만이라고 한 것에서도 명백하다. 침미다례가 어떻게 일본의 남쪽이란 말인가? 침미다례는 백제에서 볼 때 남쪽인 것이다. 이것은 이 이야기가 원래 백제에 관한 기사였는데 일본서기 편자들에 의해 조작된 것임을 말해준다. 神功49년조와 應神8년조는 모두 일본열도의 왜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인 것이다.

 

391년에 즉위한 백제의 아신왕은 실지회복을 위하여 끊임없이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광개토왕의 반격을 받고 396년에 오히려 58성 700촌을 잃고 말았다. 이때 아신왕은 항복을 하고 앞으로 고구려와 화평을 할 것을 광개토왕에게 맹세했는데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58성을 포함한 모든 失地에 대한 영유권의 포기선언이었다. 아신왕이 ‘귀국에 무례를 했다’는 것은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서 ‘귀국’은 백제의 호족들, 특히 진씨를 가리킨다고 본다. 그들은 58성의 실함과 아신왕의 항복에 크게 동요했던 것이다. <백제기>는 야마토정권에 영합할 목적으로 저술된 것이기 때문에 저자는 이것을 ‘백제의 아신왕이 귀국에 무례를 했다’고 애매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만일 일본학자들의 주장처럼 ‘귀국’이 야마토정권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백제기>의 저자가 굳이 ‘귀국’이라는 前例에 없는 생소한 단어를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古田武彦 같은 사람은 이 ‘귀국’이 실제로 북규슈에 있었던 국가라는 옹색하기 짝이 없는 설을 펴고 있는 것이다.

 

그럼 ‘우리 침미다례 등의 땅을 빼앗았다’(故奪我枕彌多禮...)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침미다례 등이 우리 땅이라고 했으니 이 땅들은 처음부터 왜국의 소유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국의 땅을 왜국이 빼앗았다는 말인가? 그렇진 않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진씨가 백제로부터 독립한 것을 가리킨다고 본다. 眞氏는 자신의 영지 —— 원래 목지국의 영역 —— 를 기반으로 하여 백제로부터 독립한 것이다. 목지국이 백제와의 통합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 ‘왜국’으로 새 출발을 한 것이다. <백제기>는 이것을 ‘귀국이 침미다례 등의 땅을 빼앗았다’고 표현한 것이다. 근초고왕 대부터 왕실의 외척이었고 대대로 조정의 宰相職을 이어온 진씨가문은 연이은 패전으로 약체화한 백제왕실 부여씨보다 우세했으므로 백제왕실은 그 독립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씨가 국명을 ‘왜국’이라고 한 것은 전라도지방의 왜인들을 통합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왜국’으로 독립한 진씨는 백제에게 先代 근초고왕의 약속 —— 백제와 목지국이 연합하여 고구려에 대처한다는 것 —— 을 지켜 끝까지 고구려에 항전하여 失地를 회복할 것을 요구하며 그 담보로 태자 전지를 데려간 것이라고 본다.

 

396년, 아신왕은 괴로운 입장에 처했던 것이다. 고구려의 압력에 굴복하여 고구려와의 화평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던 아신왕은 이에 반대하는 호족들의 압력에 또다시 굴복하고 곧바로 대 고구려 강경노선으로 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아신왕은 왜국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왜국에 전지태자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전지의 왜국행에 대하여 백제와 왜국은 입장이 서로 달랐다. <삼국사기>는 전지를 ‘인질’이라고 했지만 <일본서기>에는 ‘인질’이라는 말은 없다. 전지는 진씨에게는 외손자인 것이다. 백제. 신라의 외교사절을 모두 인질이라고 싸잡아 표현한 <일본서기>가 정작 전지는 인질이라고 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라고 본다.

 

왜국의 분리 독립을 인정하고 전지태자를 보내어 왜국과 우호를 맺은 백제는 404년 왜국과 함께 다시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해 아신왕이 죽자 백제의 호족들은 대 고구려 강경파(친 왜국파)와 화평파(반 왜국파)로 나뉘었다고 상정한다. 전지태자의 귀국에 대하여 일본서기와 삼국사기는 각각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 해, 백제의 아화왕(=아신왕)이 죽었다. 천황은 직지(=전지)를 불러 말하기를 ‘너는 귀국하여 왕위를 이어라’ 라고 하였다. 이에 의하여 ‘東漢의 땅’을 하사하여 전지를 보냈다. (일본서기 應神 16년)

是歲, 百濟阿花王薨。天皇召直支王謂之曰, 汝返於國以嗣位, 仍且賜東漢之地而遣之 

 

전지는 왜에 있던 중 父王의 부음을 듣고 슬피 울면서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왜왕은 호위병 100명을 붙여 그를 돌려보냈다. 전지가 이윽고 국경에 들어서자 한성사람 解忠이 와서 알리기를 ‘대왕께서 세상을 뜨신 후 설례왕자가 형을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었습니다. 원컨대 태자께서는 경솔하게 들어가지 마소서.’ 라고 하였다. .... 전지가 섬에 의거하여 기다렸더니 國人들이 설례를 죽이고 전지를 맞이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왕비는 팔수부인이며, 아들 구이신을 낳았다. (백제본기 전지왕 원년)

 

아신왕이 죽자 백제의 조정에서는 강경파가 아신왕의 둘째아들 훈해를 임시 왕으로 내세우고 전지태자의 귀국을 기다렸으나 화평파는 훈해를 살해하고 막내 설례를 왕으로 옹립하였다. 한편 왜국의 應神천황은 인질 전지에게 마치 자신의 자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정하게 ‘너는 귀국하여 왕위를 잇도록 해라’ 라고 말한다. 그리고 백제의 요구도 없는데 아무 조건 없이, ‘인질’을 신변안전을 염려하여 100명의 호위병을 붙여 정중하게 귀국시킨다. 더욱이 그의 귀국에 맞추어 왜국은 백제에 東漢의 땅을 반환하고 있다. 이것은 전지가 인질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전지태자에게 東漢의 땅을 하사했다는 것은 왜국이 일본열도라면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왜국이 백제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야 가능한 일인 것이다. 나는 應神천황을 목지국(왜국)의 진씨라고 생각한다. 진씨는 백제조정에서 반 왜국파가 득세하자 전지태자를 서둘러 귀국시켜 백제의 왕위에 앉히고자 했던 것이다. 東漢之地의 반환은 백제가 전지를 왕으로 앉힌다는 조건부였을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술로 보아 전지는 귀국 전에 이미 결혼을 하여 아들 구이신을 얻었을 가능성이 크다. 나는 팔수부인을 應神의 딸이라고 보며, 그가 정략적으로 자신의 딸을 전지태자와 결혼시킨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씨가문은 근초고왕 대부터 대대로 왕비를 배출했다.

 

전지의 귀국에 관한 삼국사기의 내용을 보면 정황상 전지일행은 일본열도에서 대한해협을 건너 한성까지의 먼 뱃길여행을 한 것 같지 않다. 전라북도의 어느 지점에서 한성까지의 여행길이라면 딱 어울리는 정황인 것이다. 백제의 호족 解忠이 국경으로 태자를 맞이하러 나왔다는 것은 해충이 태자의 귀국일정을 알고 있었다는 것과 전지일행이 육로로 왔다는 것을 시사한다. 왜국이 일본열도라면 해충은 태자의 일정을 알 수 없었을 것이며 또 그들이 일본에서 海路로 왔다면 국경으로 마중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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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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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불사조 | 작성시간 11.07.03 왜국이 정식 국명이 된적이 있나요? 백제의 호족은 마한의 소국의 왕들이 아니었을까요? 백제의 호족은 곧 목지국의 호족이 아니었을까요?
  • 답댓글 작성자귀거래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07.03 불사조님이 제 글에 가장 많은 관심을 보여주시는군요. 근초고왕대의 백제는 왕은 북방, 진씨는 남방을 맡고 있었다고 상정합니다. 367년경의 대 가야수교, 369년의 가야 및 전라도지방 복속 확인(이른바 신공황후의 가라7국 평정)을 통하여 가야지역은 진씨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고 봅니다. 칠지도는 369년의 치양전투를 기념하기 위하여 제작된 것이며 그 승전에 기여한 진씨에게 준 것이라고 봅니다. 칠지도의 '왜왕 旨'는 진씨라고 보며, 그를 왜왕이라고 한 것은 남쪽지방을 책임지고있던 진씨가 그 칭호를 원했기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그 진씨의 목지국이 왜국이라고 불리게 되는 것은 396년 백제로부터 분리독립한 이후라고 봅니다.
  • 작성자불사조 | 작성시간 11.07.03 칠지도가 언제 어떻게 제작되었는지 정말 모르겠네요. 목지국은 마한, 혹 한인데 왜라는 칭호를 원했을까요? 그리고 그 지역은 원래 한의 영역이 아니었나요? 어쨌든 답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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