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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토론방

영주도독부는 요서에서 조양으로 이동했다.

작성자카론|작성시간14.08.11|조회수1,900 목록 댓글 17

역사를 퍼즐풀기나 킬링타임용이라고 말하면 역사를 연구하시는 분들에게는 실례가 될 것 같은데요.

저는 남들과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고, 새로운 논리를 통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말하는 것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토리를 신나게 써 내려가다가 순식간에 논리가 꼬여 시궁창으로 쳐박히는 경우도 허다한데요.

특히 가설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기록이 나왔을 때, 비껴가려고 하면 결과는 죽음 뿐이죠. 

 

논리적 한계에 봉착했을때마다 스스로 터득한 해결 방법은 잠시 모셔두기입니다. 

논리적으로 맞다고 생각되는 가설들을 계속 모으면서 묘수가 떠 오를때까지 난제를 보고 보고 또 보는 것입니다. 

끝까지 난제를 풀지 못했지만 뜻밖의 지원군들 덕분에 문제가 해결된 경우도 있는데요.

영주 문제가 저에게 그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신당서 지리지를 보면 영주는 조양지역에 있습니다.

영주는 요서에 있었던 지명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조양을 요서라고 해도 논리적으로 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조양은 요서가 아니다라고 주장을 했기 때문에 조양에 있는 영주를 반드시 설명해야만 했습니다.

자료를 찾아 보았습니다.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등에서 영주와 관련된 키워드를 모아 봤는데요.

이진충과 손만영의 거란 독립과 투쟁사에서 단서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영주 도독!

송막 도독! 

 

이게 뭐? 하실 분들 계실 것입니다.

이게 뭐냐면...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고구려 땅에  9도독 42주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는데요. 

저는 영주와 송막을 9도독에 편입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비웃으며 "공부 좀 해라"고 할 것입니다.  

왜냐 9도독부에 대한 구체적인 지명이 기록에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신성주도독부(新城州都督府), 요성주도독부(遼城州都督府), 가물주도독부(哥勿州都督府),

건안주도독부(建安州都督府), 위락주도독부(衛樂州都督府), 사리주도독부(舍利州都督府),

거소주도독부(居素州都督府), 월희주도독부(越喜州都督府), 거조주도독부(去朝州都督府),

 

 

없잖아! 영주~~~~~!

 

맞습니다. 당연히 영주는 이곳에 없어야 합니다. 

위에 표기된 9도독부는 고구려 땅에 설치한 42주에서 14주로 바뀐 이후 정리된 도독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주도독은 전멸하여 사라져 버린 군단이기에 이름이 없어야 한다는 거죠. 

 

42주의 9도독와 14주의 9도독은 서로 이름이 다를 수 있음을 생각해 주십시오. 

도독부은 "군정(軍政)을 맡은 지방 관청 또는 외지를 통치한 기관"으로 로마 시대와 비교하면 군단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키고 있는 지역 42주에서 무려 28주 66% 땅덩어리가 어디론가 사라진 상태입니다. 

당연히 군단의 변화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큰 사건은 고구려 부흥운동, 나당 전쟁, 이진충, 손만영의 거란 독립 뿐인데요.

고구려 부흥운동과 나당 전쟁은 알려진 것이 안동도호부가 요동쪽으로 갔다 정도입니다.

그러다면 이진충, 손만영의 거란 독립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송막 도독부는 당의 입장에선 다국적 용병 군단입니다. 

무엇인가 불만이 있었기 때문에 영주 도독 조문훼를 죽이고 독립을 외쳤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부분은 그들이 어디에 주둔하고 있었을까 하는 부분입니다. 

 

먼저, 송막 도독부가 공격한 영주 도독부는 요서에서 국경을 지키던 군단으로 고구려 침공의 주력군이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그들이 다시 요서로 돌아왔을까요? 

돌아올 가능성보다 돌아오지 못했을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돌아오면, 점령지를 지킬 병사를 새로 뽑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이 고구려에게 빼앗은 땅을 고구려인에게 맡길 수 있을까요?

도독부의 정원이 1만만 되어도 총 9만이고, 2만이면 18만입니다.

 

만약, 일부를 회군시킨다고 했을 때 어디에서 온 병사부터 고향으로 보냈을까요?

저라면 수도와 수도 인근의 병사들부터 보냈을 것입니다. 

또한 국경에서 오랜기간 고구려와 싸워왔던 병사들을 점령지에 남겨두는 것이 관리에 더 효율적이라 생각합니다.  

 

영주가 움직였기 때문에 요서가 움직였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데요.

글쎄요. 이 부분은  군단으로 생각하면 어느 정도 정리가 가능할 듯 싶습니다.     

예를 들면, 안동도호부도 정원 2만의 군단입니다.

평양에 있다가 요동으로 가고, 요동에서 신성으로 가고...

영주도독부도 군단이므로 안동도호부처럼 생각한다는 개념입니다. 

 

참고로,

저 역시 영주에 딸려 있던 몇몇 부속 현들도 옮겨가지 않았을까 하고 자료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다 영주군으로 표시된 자료를 보았고, 좀 더 진척을 시키려고 했습니다. 

영주가 조양에 남게 된 이유, 즉 영주도독부의 이익과 연계시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료의 출처가 모호해서 (시대가 확실치 않음) 잠시 모셔두기 상태입니다. 

이것도 생각하고 있고, 저곳도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 주려는 욕심에 

아직 정리 안된 내용까지 살포하는 만행을 저질렀군요.

이 내용을 시궁창으로 뻥 차버리지 않는다면 이 부분도 차후에 정리하여 보여드릴 것입니다. 

요즘 중점적으로 보고 있는 부분은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 변하는 과정이다 보니... 

 

저는 송막도독부가 영주도독부와 인접해 있었다는 기록을 통해 조양에 있었다고 확신을 하였습니다. 

사실 송막도독부는 영주도독부보다 더 안좋은 처지입니다.    

남에 나라 용병들... 병법에 자주 등장하는 이이제이... 사자성어의 토사구팽...

송막도독부는 이런 느낌에 가까운데요.

한가지 흥미로운 내용은 그들이 당에 반기를 들고  독립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는 당과의 모종의 약속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거든요.

일 잘해주면 고구려의 영토를 떼어 주겠다는 거죠. 

 

이상으로 몇가지 추정을 해봤는데요.

앞에서 세운 논리들을 볼 때  결코 불가능 것이 아니라고 판단되어 지리적인 관계도 살펴보았습니다. 

 

설정.

1. 신당서 지리지를 보면 송월령을 경계로 서쪽은 해족이 있고, 동쪽에 거란이 있다고 합니다.

2. 조양지역에 영주도독부와 송막도독부를 두었습니다

3. 안동도호부는 신성에 있는 걸로...

4. 돌궐은 대흥안령산맥 서쪽에 있는 걸로... 

 

 

 

 

 

  

 

이진충, 손만영의 건란 독립 사건을 키워드로 정리해 보면   

 

696년 5월 

1. 송막 도독 이진충은 손만영등과 함께 영주도독 조문훼를 죽이고 거란 독립을 선언함.

2. 숭주(崇州)  용산군토격부사(龍山軍討擊副使) 허음적 체포  (숭주 - 한나라의 낙랑군 장잠현) 

 

당나라는 거란의 반란이 일어나자  조인사, 장현우, 이다조, 마인절 등에게 토벌령을 내림 ->도독에게 토벌령 내림,

 

3. 협석곡 전투 -> 거란 대승

 

당나라는 건안왕 무유의에게 총 지휘를 맡기고 길게 전선을 형성하여 거란과 교전.

(요동성 - 개모성 - 신성 - 건안성 라인)

 

4. 안동도호부, 평주, 단주 등지에서 교전이 벌어짐 - 조양 서남쪽 전선에서 전투가 벌어짐

5. 돌궐의 거란 배후 공격  -거란군 일시 회군

 

696년 10월

이진충이 사망하자 손만영이 거란군을 이끌고 당 공격 시작

기주(?) 함락(696.10), 영주(?) 속현 함락시킴

 

6. 협석곡 동쪽 전투- 거란군 왕효걸 소굉휘가 이끄는 당군에게 대승(697.3.12)

7. 마미성 함락(697.5.23)

 

8. 돌궐 거란 신성 점령 (697.6) -> 해족 돌궐에 항복 -> 손만영 전사 -> 기주 함락으로 거란 반란 종료

 

이야가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눈에 들어오는 몇몇 지명이 있습니다.  

협석곡, 마미주, 건안왕, 안도도호부, 요동주, 개모주

고구려의 방어선과 느낌이 비슷하지 않으신가요?

 

요동성 - 마미성 - 협곡성 - 안시성

요동성 - 개모성 - 신성 - 건안성  

 

전쟁은 항상 같은 지역에서 반복되는데요.

협석곡은 돌이 있는 협곡인데요.

그냥 협곡이라고 해도 의미가 크게 바뀌지 않을 것 같은데요.

당 태종이 두 장수를 옆구리에 포박한 주필산 전투가 협곡성에서 벌어진 전투라고 생각이 되고...  

마미성은 만리장성에 인접해 있어서 당태종이 전투없이 손쉽게 획득한 성이고...

 

다른 분들의 주장에 따르면 협석곡은 다른 지역이라고 하는데요.

일단 고구려의 방어선이 있었던 지명과 비슷한 키워드가 이진충 손만영 거란 독립에 있다는 점 말씀드리고요.

 

 

영주가 조양에 있었다의 결정적인 증거는 돌궐의 움직임입니다.

거란이 돌궐의 1차 침입을 받은 후 거란 신성을 쌓았다고 하는데...

조양에서 400리라면 그곳은 졸본 = 고국원입니다. 

선비가 고구려를 공략했을떄의 역사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같은 지역이기 때문에 다른 시대의 전투가 비슷하게 느껴진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정리하면...

1. 당산 지역에 영주가 있다고 했을 때 돌궐의 배후 침입을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2. 거란의 독립 선언 : 당나라의 땅에서 거란이 독립을 했을까요? 그들이 독립한 곳은 빼앗은 고구려의 땅입니다.

3. 숭주의 옛 지명 - 한나라 낙랑군 잠장현 (이동전) -> 진주시 북쪽 어느곳에 있다고 사료됨

4. 전투 지역이 고-당 전투 지역과의 연관성

5. 신당서 지리지의 내용으로 역사서의 기록을 지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음.  

 

추신.

아주 간략하게만 설명을 드렸지만 좀더 지리적 보강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아직 충분하지 못해서 나중에 설명을 드리겠다고 했는데...

삼수갑산님이 근거에 대해 말씀을 주시니 급한대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10% 정도 정리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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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내용입니다. 

영주가 이동하기 이전상황 기록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무덕원년(618년) 탁군을 유주총관부로 고치고  유주, 역주, 평주, 단주, 연주, 북연주, 영주, 요주를 총괄하게 됩니다.

 

주요 위치를 말하면

- 유주 - 탁군, 계까지의 범위

- 평주 - 임유, 비여 2개군

- 단주 - 밀운

- 연주 - 요서, 노하, 회현,

- 영주 - 요주와 연주를 관할 함.

 

당은 먼저 돌궐과 전쟁을 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당은 다음 타겟을 고구려로 삼습니다.

여기서 잠시...

요주가 태원 쪽에 있었다라는 글을 봤는데요. 

일단 돌궐과 전투를 했기 때문에 그곳에 요주가 있었다 하더라도 개의치 않으려고 합니다.   

돌궐과의 전쟁이 끝났고, 요주 병력을 영주로 옮겼을 개연성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당시 고구려에서 권력 다툼을 벌이면서 당을 끌어들인 상황입니다. 

당은 원정 준비를 한 것도 아니고, 좋은 기회였기에 최대한 빨리 고구려로 군을 보내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국경에 있던 군이 동원 됩니다. 

바로 영주에 있던 군이지요.

 

영주가 빠져나갔으니 그 자리를 누군가가 대신해야 합니다.

기록을 찾아봤더니 연주가 영주로 치소를 이전했다고 하더군요.

연주가 대신 한 것입니다. 

연주의 규모는 만명 밖에 안되기 때문에 요주(8만명)를 붙여서 지역 수비를 대비한 것이지요.  

 

지역이 이동하는 것은 항상 있었습니다. 

원래 영주가 있었던 곳도 산동 동래 인근 인데요. 

어떤 사정에 의해 요서 쪽으로 이동을 해 온 것이지요. 

저는 전쟁을 통해 이후 변화를 살펴보기 때문에 내용이 정면충돌하는 기록이 나오면 먼저 이동부터 생각합니다.

어디가 더 시급했지를 따져보면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영주가 연주와 요주를 통치하고 있었다면 만세통천기간 거란과의 싸움에 연주가 반드시 등장해야 합니다. 

그런데 안 나옵니다.  

평주, 단주가 조금 나오더니 어디인지 확실치 않은 기주와 바닷가로 위치한 걸로 추정되는 영주가 등장합니다. 

두 곳은 아마 고구려의 영역에 설치된 42주에 해당할 것입니다.     

 

당이 거란을 제압한 이후 과정에 대해 말씀을 주셨는데요

722년에 영주로 돌아갔는데 다시 해족에게 빼앗겼다고...

해족은 697년 돌궐에게 항복하고, 732년 현종때 당에게 패배해 거점을 유주로 옮기게 됩니다. 

이 말은 해족이 살던 곳은 공지가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구요,     

거란이 그곳을 차지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거란은 조양지역을 차지한 후 계속 영주라고 부릅니다.

고구려가 그곳을 다시 차지했다면 본래의 이름을 찾았겠지만 거란이 차지했기에 영주로 고착된 것입니다. 

요사 / 원사 / 명사는  그냥 따라가는 거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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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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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삼수갑산 | 작성시간 14.08.12 중희 10 년(?) 흥중부로 승격시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번에는 <원사>.<명사>와 <청사고>를 볼까요?
    <원/지> 대녕로 상에는 본래 해의 거처 또는 부락이고 당 초기에는 영주에 속하였다. 요는 중경 대정부로 삼았고 흥중부와 의.서.흥...화 등 10 주와 대정.용산 등 7 현을 통령하였고라 씌여 있고,
    <명/지> 북평행도지휘사사 영주중둔위 설명에는 원 시기의 용산현 땅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청/지>에는 직예성 소속의 조양부에서,
    명 시기의 영주위 땅이며...건륭 43 년(1779) 조양현을 설치하고 광서30 년(1904)년 개간한 땅에 수확이 많아 부로 승격하였으며 건창을 예속시켰다라 설명하고 건창현의 설명에서는 명 시기 영주폐위
  • 작성자삼수갑산 | 작성시간 14.08.12 댓글 횟수를 초과하게 되었군요. 죄송합니다. 카페지기님께 양해를 구합니다.

    (영주폐위) 땅이며 ...동쪽에는 포고도산이 있는데 한 시기의 백랑산이며 백랑수가 발원하는데 지금의 대릉하이다...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와 같이 한 시기의 요서군 유성현 지역은 청 시기까지 약 2100 여년 동안 유성.영주.조양으로 명칭이 바뀌였지만 그 위치는 동일하였고 청 시기의 대릉하 또한 지금의 대릉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동.현토.낙랑군 지역 역시 당연히 변동이 없었으니 현대의 지도에 표시된 지명만을 근거로 서국의 정사 지리지 기록을 재단하는 우를 범한다면 다람쥐 쳇바퀴 돌듯 지리 고증만으로 세월을 다 보낼 것입니다.
  • 작성자김준수 | 작성시간 14.09.11 카론님과 삼수갑산님의 논의가 이 카페를 풍성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김용만 선생님은 아닙니다만 운영진의 한 사람으로서 두 분께서 댓글 정리를 해달라고 요청해야 하는데 중간에서 자르기도 실례인 것 같아 일단은 기다렸습니다. 두 분께서 논의가 대략 끝나신 것 같아 댓글 정리를 부탁드립니다.
  • 답댓글 작성자카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09.21 댓글 정리는 어떻게 하는 건가요? 본글에 추가로 올리면 되나요?
  • 답댓글 작성자김준수 | 작성시간 14.09.28 네. 쓰셨던 댓글을 모두 모아 본글에 추가로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혹여 본글이 많다 싶으시면 별도의 글로 올려주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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