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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토론방

왜 고구려 사람들은 시루를 사용했을까?

작성자김용만|작성시간15.05.17|조회수1,104 목록 댓글 17

우리나라 조상들이 곡물을 섭취하는 방법은 대체로

토기에 곡물을 넣고 물을 부은 후 끓여서 먹는 죽에서,
시루를 곡물을 쪄서 먹는 떡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솥에 밭을 해먹는 죽-떡-밥 순으로 발전해왔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구려의 2대 유리명왕 때에 이미 부정씨라는 집단이 솥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나오며,
쇠솥 유물도 꽤 등장한다.
그런데 357년에 만들어진 안악3호분과 5세기초로 편년되는 약수리 고분의 벽화에는 
시루에 음식을 해먹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때 시루에 먹는 음식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떡이었을까? 아니면 밥이었을까?
왜 솥으로 밥을 먹지 않았을까? 408년 덕흥리고분 묵서명에는 쌀이 등장하며,
6세기 무등리보루에서도 쌀이 등장하는데, 쌀밥을 먹으려면 솥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고구려 최상층의 식생활이 여전히 떡이었을까?  
이 문제에 답을 구해보시기 바란다.  (유력한 견해 하나는 알고 있으나, 나중에 댓글로 달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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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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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미주가효 | 작성시간 15.05.28 미주가효 (또한 조리기술의 미숙으로, 고구려에서는 아직 솥으로 지은 밥보다 찜기(시루)로 지은 밥이 더 맛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작성자麗輝 | 작성시간 15.06.01 오늘 논의의 중심이 솥과 시루에만 포인트가 맞춰지는 감이 없지 않아 몇자만 적습니다. 고구려의 경우, 솥과 시루를 동시에 혹은 따로 따로 썼다는 것은 분명합니다(고구려의 남쪽 변경인 한강유역의 소규모 보루, 10명 정도가 주둔하던 보루의 아궁이에서 시루 위에 솥이 걸린 채로 확인되었습죠. 변경의 소규모 주둔기지가 그러하다면, 고구려의 일상적인 부엌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는건 어렵지 않습니다. 물론, 그걸 오히려 특수한 경우로 보는 입장도 있습니다만 전 전자쪽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동시기의 백제, 신라, 가야에서 그런 문화가 확인되지는 않는다는 거죠. 위에도 막고해님이 쓰셨지만 원삼국시대부터 한반도 중남부
  • 작성자麗輝 | 작성시간 15.06.01 의 주요 자비용기는 장란형토기와 시루였습니다. 그리고 심발형토기에서 쌀 짓기 복원실험을 하기도 했었고, 태토에 공극이 크고 팽창-수축이 가능한 것들이 자비용기로 쓰였을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죠. 하지만 한반도 중남부에서 솥과 시루를 동시에 사용했다고 보는 견해는 적다는 것입니다. 그건 고구려와 달리 백제, 신라, 가야 애들은 다른 식으로 밥을 해먹었다는 것이죠. 그걸 두고 고구려의 식문화가 더 우수하다, 라고 단순히 결론내릴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양자의 식재료, 조리방법, 요리 종류 등이 달랐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봐야할 듯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 북쪽에서 내려온 고구려가 한반도 중부까지 왔음에도 자기 식
  • 작성자麗輝 | 작성시간 15.06.01 대로 음식을 해먹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한반도 중남부의 고구려 토기가 나온 주거지를 보면 재지계의 방형, 여자, 철자형 주거지에 고구려식 쪽구들이 결합된 형식이 많습니다(알다시피 고구려의 전형적인 주거지는 중국에서 제대로 발굴조사된 바가 없습니다. 건물지는 일부 있지만요). 이처럼 북쪽에서 내려온 고구려인들은 자기들만의 문화를 한반도 중남부에 가져왔고, 식문화에서 있어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그렇게 봤을때 김용만 선생님이 말씀하신대로 쌀보다 잡곡을 주식으로 선호했다는 결론도 충분히 가능한 추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암튼, 제가 여기에서 몇자 적으려는 궁극적인 이유는, 고구려가 조리기
  • 작성자麗輝 | 작성시간 15.06.04 술이 부족했다...는 시각은 적절하지 않다는 얘기를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까페 점검때문에 이제사 마무리를 짓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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