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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토론방

Re:국내 지역과 국내 위나암성-國에 대한 의미 위주로 (1)

작성자키레네|작성시간15.07.17|조회수417 목록 댓글 40

<국내 / 위나암성>에 관하여

 

어떠한 글자의 의미에 대해 전혀다른 해석을 내놓으려면 그에 맞는 사례나 용례를 들어서 실제 그렇게 사용했음을 증명해야함이 논리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차원에서 지난글에서 수경 요수관련 해석에 대해 의견을 냈다면 이 글은 이라는 고구려 지명에 대한 의미에 대한 지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카론님의 원문은 색으로 저의 글은 검정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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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국내(國內)의 의미에 대해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은 무력으로 국경을 지킨다 이므로 국내성은 국경 지역에 있다라고 했는데요.(중략)

우리 역사는 중국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 해석은 반드시 중국의 시각에서 봐야 합니다.

==>카론님이 무력으로 국경을 지킨다.“ 라는 의미라고 보는 것은 가운데에 가 들어가서 그런 듯 한데 본래 자는 갑골문시기부터 상형문자입니다. 물론 글자의 어원을 카론님 처럼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국은 성읍국가시절에 생긴 개념이므로 1차적으로는 성읍국가나 도읍 자체를 의미하는 <명사>이고 이것이 국가규모가 커지고 발전되어 하나의 국가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무력으로 국경을 지킨다>라는 의미는 어원차원에서는 볼 수 있으나 실제 사용례에 비해서는 너무 여러단계 나아간, 실제 쓰이는 의미와는 다른 의미해석입니다. 그래서 저는 밑에서는 고구려의  자가 그런 의미와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다른 사례로 이야기를 풀어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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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시각으로 국내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 무력으로 국경을 지키는 곳

: 안쪽

 

===> 고구려인이 직접 사용했던 고구려인의 도읍 명칭을 왜 중국인의 시각으로 봐야 할까요???

중국사서에 국내성이 기록되기 훨씬 이전부터 고구려는 이라는 글자와 국내성을 썼고 삼국사기에 명확히 나와있습니다. 고구려인이 기록한 광개토대왕비문에도 을 도읍/수도라는 명사로 쓰지만 카론님의 의미로 쓰지는 않습니다. 카론님이 최소한 삼국사기기록은 고려하지않는다면 그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나가야 될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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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낙랑 동부 7현은 고구려가 빼앗았습니다. 카론은 국내, 불이, 남옥저, 낙랑 동부 7현을 모두 같은 곳으로 묶어 보았습니다. 먼저, 요동이 그림처럼 위치해 있어야 합니다. (중략..)

요동의 위치가 잡히면 대릉하가 패수가 되고, 지리적으로 강을 경계로 국경이 형성됩니다.

 

===> 요동의 위치비정에 대해서는 과제로 남겨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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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나라의 국내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패수 안쪽에서 수비를 하고 있던 낙랑군 동부 7현이 고구려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중국의 시각에서 고구려에게 넘어간 낙랑군 동부 7에 대해 그들은 뭐라고 불렀을까요?

국경을 지키던 곳의 안쪽. , 국내 지역이 됩니다. 국경 안쪽을 고구려에게 빼앗겼고, 고구려가 그곳에 성을 쌓았습니다. 그랬더니 중국 애들이 국내 위나암성. 국내 국내성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 낙랑군 동부도위가 관할하던 지역은 옥저, 예 지역입니다. 옥저와 동예가 고구려 세력하에 예속되어 놓이다가 아주 직할지로 바뀌는데에는 어느정도의 시간차가 발생합니다. 중국사서에 그 전후사정이 나와있고 삼국사기에도 옥저나 예가 간혹 등장하다가 사라집니다.

 

그런데 카론님의 주장은 동부7현지역을 <점령>하고 성을 쌓았고 그 성은 중국인들이 국내성이라고 부르게되었다는게 요지인 듯 합니다. 그럼 이런 조건들이 성립되어야 합니다.

(1)국내성 명칭은 동부7현 점령 이후에 발생해야 할 것

(2)점령직후에 성을 쌓고 도읍으로 삼았다면 그 이전 수도에 대해 명칭과 명확한 근거가 있어야 할 것.

(3)중국인들이 국내성이라고 불렀다면 정작 고구려인은 국내성을 무엇이라고 불렀는지.

(4)현재 집안시는 고구려인들이 무엇이라 불렀는지.

이런 조건과 전후사정을 밝혀가면서 논지를 밝혀나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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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레네) 위치비정에 대한 내용은 말이 너무 길어질듯하여 중략합니다. 아래는 댓글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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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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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경우 성리학이 주류였기에 집안에 사당을 뒀습니다. (...)하지만 고구려 시대의 사상은 성리학이 아닙니다. 그래서 도읍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붉은 색지역과 노랑색 지역을 제외하면 사람들이 어디에 살았을까요? 그리고 뭘 먹고 살았을까요?

 

 

===> 집안시 일대가 사람이 살기 힘든 곳일까요? 지금도 집안시와 마주보고 있는 만포시도 도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좁은 산악지대이니 평야지대에 비할바는 물론 아니겠죠 그래서 중국에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都於丸都之下方可二千里戶三萬多大山深谷無原澤隨山谷以為居食澗水無良田

雖力佃作不足以實口腹其俗節食

굳이 해석하지 않아도 이 원문으로 답이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 살기 힘들다는 곳에 위치하고 있음은 익히 알려져 있다는 사실이죠. 오곡이 풍성하고 살기 좋고 어쩌구...이런 곳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고구려는 꾸준히 다른 지역을 공략하고 주변 세력들을 복속해나가면서 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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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유리왕때 낙랑군의 호 수가 증가합니다. ....국내 위나암에 성을 쌓아 낙랑군의 침입에 대비합니다. 이때 부여가 움직입니다. 이는 고구려가 남쪽에 병력을 집중시키자 북쪽에 있던 부여가 5만을 동원해 고구려를 치려고 했던 겁니다. 일종의 낙랑군과 부여가 연합을 했던 것이지요.(...)

 

===> 삼국사기에 국내 위나암에 대한 언급, 도읍으로 삼게 된 경위가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물론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유리왕 이전에 접해보지 않았던 낙랑군을 대비해서 성을 쌓았다는 경위는 찾을 수가 없겠군요. 부여가 고구려를 치려 했다고 하여 또한 낙랑과 부여가 연합을 했다는 것도 어디서 그 상황을 찾을 수 있을까요? 거기에 대해 저는 오히려 고구려를 의식하여 부여가 접촉하고 왕래가 있었던 것은 현도군이라는 것은 다른 기록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싶군요. 고구려가 졸본을 떠나서 국내로 옮기게 된 것은 외부적 요인을 찾자면 부여의 위협에 대비하거나 피하기 위해서이지 낙랑을 넣어서 생각하기에는 상황이 부족해 보입니다. 삼국사기에는 부여의 위협이 여러번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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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시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나라 동쪽에 대혈이 있어 10월에 천제를 지낸 곳입니다. 지리적응로 많은 사람이 살수 없습니다. / 평양 인근은 평지여서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습니다. 그곳에도 명당이 있구요. 고구려 영역이므로 고구려 고분이 있어도 전혀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백제도 아주 넓은 평야지대잖아요. 사람 많이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백제 영역에 속하니 고분이 있어도 무방합니다.

 

====>

집안시가 산이 깊고 면적이 크지 않음은 알수 있지만, 집안시일대만 수도영역이라고 보기보다는 그 건너편에 만포시일대도 있으며, 하루거리 내에 압록 상류나 하류쪽으로도 취락이 발달할만한 곳은 있습니다. 물론 국가가 거대해진 평양도읍시대와 비할바는 아니죠. 그래서 중국사서에서는 산이 깊고 좋은 밭이 없고..힘써경작을 해도 음식을 아껴야 하고..등등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살기힘들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집안시가 국동대혈이 있는 곳이고 천제를 지낸 곳이라면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곳입니다. 그럼. 카론님 주장에 수도가 아닌 집안시는 어떤 곳이며, 고구려 역사에서 관련기록을 찾을 수 있는지, 왜 그곳인지, 고구려인들은 그곳을 어떤 지명을 불렀는지...고분들은 고고학적으로 5세기까지 이어지고 있고 오랜시간 무덤들이 조성되었으나 도읍은 아닌곳.도읍과 전혀 다른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그런 곳....뭔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중요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도읍지는 아니지만 고구려 영역이니 그정도 고분군이 있어도 문제될 것이 없다...라는 것은 조금 비상식적이지 않을까요? 다른 동시대 국가들이 전부 도읍지인근에 왕과 지배층의 무덤을 조성하는데 고구려만 전혀 한참 떨어진 지역에 그렇게 조성해야한다는 것은 그냥 문제 없다는 식으로 넘어갈 사항은 아닙니다. 다른 사례, 논리적 근거가 더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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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레네)다음부터는 고구려가 사용한 에 대한 저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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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예나 지금이나 국가를 의미하지만 고구려인들의 은 그 의미 외에도

 

보통명사로서 도읍지, 수도

고유명사로서는 국내성과 그 일대 수도지역 자체를 의미(평양으로 완전히 천도하기 전까지)

로 썼다고 할 수 있다.

 

국내성에 관한 견해

 

국내성은 최초에 유리왕이 도읍을 옮긴 곳이며 처음에는 위나암성을 쌓았다. 이후에는 환도성을 쌓았고. 국내성을 쌓았다. 장수왕의 천도 이전에 이미 平壤 지역으로 옮긴 것으로 보이는 기록들이 있으나 왔다갔다 한것인지, 또는 장수왕의 平壤과는 다른 지역인지는 불명확하나 여기에서는 주 대상이 아니므로 소략.

 

집안시의 고구려 고분은 12천기 이상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졸본으로 보고 있는 환인지역에는 750기 정도가 분포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자료는 잘 안찾아지는데 집안시 맞은편인 만포시에도 고구려 고분과 유적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집안시와 바로 이어져있는 만포시 일대 역시 국내성에 부속된 지역으로 봐야 할것이며, 현재 환도산성으로 불리는 지역과 인근지역까지 국내로 봐야한다. 또한 압록강 하류방향으로도 평지가 있고 고구려유적지가 이어지는데 이 지역까지 포함하여 하나의 國內 지역으로 봐야한다. 왜냐하면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고 붙어있으며 집안시에서 하루내에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이기 때문이다. 집안 서남향의 마선향(??)이란 곳에서 집안시를 지나서 만포시 끝까지 하나의 생활권이며 거리는 약 20KM(직선거리)정도 된다. (구글지도로 측정했을 때)

 

아래 지도에서 고분군 지역이 상당부분 차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부분을 제외하면 (정확하지는 않지만 지도에서 찍어보면)2~3키로 ~ 길이 20키로 정도의 지역적 공간은 나온다고 보인다.

아래 사진은 현재 환도산성 지역 일대는 표시하지 않은 것임을 감안해서 봐야 한다. 집안시 시내 정도로만 보통 인식해왔던 국내성지역은 이처럼 다소 멀리서 보면 더 많은 지역이 국내에 부속된 지역임을 확인할 수 있다. 多大山深谷無原澤隨山谷以為居食澗水無良田雖力佃作不足以實口腹其俗節食 라는 기록에 부합해 보인다.

 

고구려 왕명으로 본

 

장수왕 이전의 고구려 왕호는 왕이 죽고 장사지낸 장소와 관련이 깊다. 표를 보면 상당수 초중기 왕들의 왕호가 장소이름으로 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수도의 이름, 고구려인들이 부른 서울의 이름이 <국내>였기 때문에 관련 국내지역에 장사지낸 왕들의 상당수 이름에 과 관련된 지역명이 들어가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국양, 국천, 국강상, 국원...과 같은 이름들이다. <이때의 은 국내성(수도)에 대한 고유명사이다.> 

NO

왕호

다른 왕호

장사지낸곳

비고

1

東明聖王

 

龍山

 

2

瑠璃王

 

두곡 東原

國內 천도

3

大武神王

 

大獸林原

 

4

閔中王

 

閔中原

유언이 있었음

5

慕本王

 

慕本原

 

6

太祖王

 

 

 

7

次大王

 

 

 

8

新大王

 

故國

 

9

故國川

國壤

 

태후 우씨도 國壤이라 호칭

10

山上王

 

上山陵

 

11

東川王

 

尸原

시원의 유래 기록

12

中川王

中壤

 

 

13

西川王

西壤

 

 

14

烽上王

 

烽山之原

 

15

美川王

 

美川之原

 

16

故國原

國罡上

 

환도성 보수 및 국내성 축성

17

小獸林王

 

小獸林

 

18

故國壤

 

故國壤

 

19

廣開土王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비문)

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호우총)

國罡上大開土地好太聖王(모두루묘)

-

그 이후

양원(양강상), 평원(평강상) 등 지명 관련 왕호가 보이지만

더 이상 왕호에 은 등장하지 않음

*보장왕대 남생이 국내성으로 도주

*지리지에 당에 항복한 압록강이북 11개성중 국내성

 

기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대응 (고국천:국양 의 대응)

동천왕(東川王) : 동양왕(東襄王)(11), 중천왕(中川王) : 중양왕(中壤王)(12), 서천왕(西川王) : 서양왕(西壤王)(13), 미천왕(美川王) : 호양왕(好壤王) (15) 등 여럿이 있는데 : ()의 대응이다

 

쓰다보니 내용이 너무 길어졌다..이를 바탕으로 위 용례에서의 國의 의미는 국내성을 비롯한 국내지역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은 국내를 완전히 떠난 5세기중후반부 이후로는 故國으로 쓰기 시작했다고 보입니다.

그래서 실제 고구려인 당시에 쓰인 국내시절 말에는 國이라고 쓰이고 후대에 국내지역을 일컬을 때에는 자연스럽게 <고국>이 되었다고

판단이 된다. (태후 우씨의 말, 광개토왕비문의 글)

 

이에 대한 논거는 2부를 통해서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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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보니 하자체가 되었네요.. 글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이후에 다시 정리해서 추가 논지를 이어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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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조수아 | 작성시간 15.07.20 카론 그런 식으로 모르신다는 느낌 어쩌구 라고 얘기하지 마십시오. 학계 운운하시는데 글자 하나하나에 집착하면서 어떻게든 자기 의견 근거 만드려고 애쓰는 분은 학계엔 없는 것 같습니다. 지키다의 뜻을 취해도 님이 생각하는 망상과는 직결될 수 앖음은 이미 지적했습니다.
  • 작성자조수아 | 작성시간 15.07.18 키레네님 애쓰시네요. 우이독경인데...
  • 답댓글 작성자키레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7.18 이분이 혹시 한자를 쪼개서 의미를 만드시는 분이던가요?
  • 답댓글 작성자조수아 | 작성시간 15.07.18 키레네 네 댓글에서 보시다시피요... 듣도 보도 못한 기상천외한 해석이죠
  • 답댓글 작성자카론 | 작성시간 15.07.18 키레네 한자를 쪼개서 의미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자의 원래 의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학자들도 문헌 해석을 할 때 한자의 원래 의미부터 정리했다고 하더군요. 그때는 갑골문의 존재도 모르던 시대였기에 해석의 오류가 있었다고 합니다. 최근 갑골문을 발견되면서 한자의 원형에 대해 연구가 진행되고 있어 그 부분을 참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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