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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토론방

Re: 새로 발견된 고구려 유민 고충운 묘지명과 해석

작성자김용만|작성시간25.10.11|조회수319 목록 댓글 4

大唐故高府君墓志銘(蓋)」唐故游擊將軍守左羽林軍上柱國高公墓誌并序」 
公諱冲雲,字冲雲,平原渤海人也.其先海東句驪國,世纉王業,」代為茂族.洎我唐太宗之受命也,虜其王,遷我區夏,其後」 子孫因命氏焉.曾祖達,皇國內城王,德重維城,望高盤石.」祖蒙,皇國內城左相,德感陰陽,道通神理.考文及,皇忠武」將軍, 守左衛府中郎將,上柱國,贈持節邢州諸軍,邢州刺史.雄」植英秀,特達風標.公即使君之嗣子也.少而明敏,長而魁岸,非」礼 勿動,非道勿行.初,公之出就外傅也,學綜百家,詞該六義,固」元海之節,欎為巨僄,抗仲昇之憤,慨然投筆.屬」王室多故,兵 草未遑,深翰而五色滿空,耀武而三軍即叙.有」诏累拜游擊將軍,守左羽林軍大將軍,上柱國,旌武功也.初,公」之從政於羽 林也,望重瑣闈,氣雄環烈,肅誰何之?令清」天步之威聲,駭於朝端矣.嗚呼!天不憗遺,仰翼扶未極,」以大曆九年(774)六 月廿五日薨于太原府福昌里官舍.以大曆十」年二月廿一日權殯於咸陽縣奉賢鄉蕭蔣里平原,禮也.嗣子」靡託,叩地無依, 虔恭宅兆之儀,式展送終之礼,用刊」贞石,铭乎泉扉.铭曰:」維岳降神,挺生哲人.在家必達,果行澡身.詞既曠代,武亦殊 倫.」威肅環烈,聲駭函秦.翼扶未幾,即世俄臻.蘭摧九畹,桂折三春.」靈鶴開兆,塗車載陳.勒貞石於大隧,期不朽乎陶均.」 大曆十年(775)二月廿一日建.

 

당나라 고 유격장군·수좌우림군·상주국 고공 묘지 및 서문 
묘주 이름은 고충운, 자는 충운으로, 평원 발해인이다. 그의 선조는 해동 구려국의 왕족으로, 세대로 왕업을 계승하며 권위 있는 문벌이었다. 당태종이 천명을 받아 고 구려 왕을 포로로 삼아 중원으로 이주시켰고, 이후 그 자손들은 “고(高)”를 성씨로 정 했다. 증조 고달(高達)은 국내성(國內城)의 왕으로, 덕행이 두텁고 명망이 높았다. 조 고몽(高蒙)은 국내성 좌상(左相)으로, 덕행이 천지를 감동시키고, 신명의 이치를 통달 하다. 부친 고문급(高文及)은 생전에 충무장군・좌위부 중랑장・상주국을 지냈고, 사 후에는 지절 형주제군・형주자사로 추증되었다. 그는 기상이 웅장하고 재능이 뛰어 나며, 독특한 풍모를 가지고 있었다. 고충운은 바로 그의 장자이다. 
고충운은 어릴 때 총명했고, 자란 후에는 키가 크고 기상이 웅장했으며, 예와 도에 어긋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 초기에 그는 학문 탐구를 위해 고향을 떠나 백가(百 家)의 학문을 두루 탐독하며 육예(六藝)를 정통하였다. 그는 유연(劉淵)처럼 높은 기 품을 지니며 용맹했고, 반초(班超)처럼 애국심이 강하여 붓을 버리고 군에 입대했다. 
당시 국가에 여러 차례 위기가 닥쳐 군량미(軍糧米)와 마초(馬草)가 준비되지 않았 으나 전쟁이 계속되었는데, 고충운은 군기를 펼쳐 전장에 활약하고 무력을 발휘하여 군대에 질서를 부여했다. 황제는 그의 무공을 인정하여 유격장군・좌우림군 대장군 ・상주국 등의 관직을 여러 차례 수여했다. 고충운이 처음에 우림군에서 근무했을 때, 궁궐에서 명망이 높았고 기세가 웅장했으며, 엄숙한 수비령을 준수하여 황가의 위엄 을 높여 조정에서 그를 경외했다. 
천불가년(天不假年)의 한으로 인해 그는 임금을 보필할 포부를 충분히 펼치지 못 채 대력 9 년(774) 음력 6 월 25 일에 태원부 복창리(福昌里) 관사에서 사망했다. 대 력 10 년(775) 2 월 21 일에 함양현 봉현향 소장리(蕭蔣里) 평원에 임시로 매장되었 으며, 이는 당시의 예절에 맞는 장례였다. 그의 아들은 극심한 슬픔에 휩싸여 의존할 곳을 잃었지만, 성심껏 장례 의식을 준비하고 묘비를 세워 그의 업적을 기념했다. 명 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산악의 신령이 현현되어 현명한 인물이 태어났다. 집안에서도 성공을 거두고 행동 으로 덕을 기른다. 문재(文才)는 세대를 초월하고 무력도 남다르다. 위엄은 금군에 스 며들고 명성은 관중(關中)지역까지 널리 퍼진다. 하지만 포부를 이루지 못한 채 육체 를 떠나고, 생명은 난초처럼 부서졌다. 영학(靈鶴)이 묘지를 지시하고 상장차가 진열 되며, 묘실에 돌을 새겨 그의 업적이 영원히 남도록 기원한다. 
대력 10 년(775) 음력 2 월 21 일에 세움

 

이 묘지명에 대한 해석은 [고구려 유민 고충운 묘지명에 대한 고찰]을 발표한 루정호(중국 절강해양대학)가 한 것 입니다.

안정준은 이 글의 토론자입니다. 

루정호의 논문은 2025년 9월 신라사학회 233회 정기발표회에서 발표되었고, 곧 학회지에 실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묘지명에서 고충운의 증조부인 고달이 국내성왕을 지냈고, 조부인 고몽이 국내성 좌상을 지냈다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됩니다. 고구려인 4명의 이름이 새로 알려진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이 문제가 가장 눈에 띄입니다.

물론 누가 임명한 것인가 하는 문제도 걸리고, 언제 국내성왕으로 활동했는지 등, 풀어야 할 숙제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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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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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가라모리스 | 작성시간 25.10.12 감사합니다, 혹시 최근에 발견된 재당유민 묘지명은 이 고충운 묘지명이 1개일까요? 김영 묘지명 이외에 여흥군 부인 천씨 묘지명과 관련된었던 천경선이라던가 이런 사람들의 묘지명이 더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 작성자kyeon | 작성시간 25.10.26 수당시기 고구려 수도가 평양인데 국내성왕은 뭘까요? 혹시 욕살을 왕이라 생각한 것일까요? 중앙집권을 강화해 가던 고구려가 봉건적인 지방 왕 따위를 허용하진 않았을 것인데....
  • 작성자好太聖王天可汗 | 작성시간 25.11.10 풍홍이나 신찬성씨록의 사례로 봐서 고구려 군주의 이칭 일부는 즉위 전의 왕작 아닐까 생각했는데 국내성왕을 보니 더 그렇게 생각되네요.
  • 작성자두막루 | 작성시간 25.11.16 皇國內城王, 皇國內城左相이라... 표현이 일견 독특해보이긴 합니다만, 일단 황(皇)자가 앞에 왜 붙었을까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듯 합니다. 묘지명은 대체로 앞부분은 조상의 내력을 설명하는 파트인데, 고충운이라는 사람의 선조에 대한 내용에서 증조 앞에 "당태종이 천명을 받아 고구려 왕을 포로로 삼아 중원으로 이주시켰고, 이후 그 자손들은 고(高)를 성씨로 정했다(洎我唐太宗之受命也,虜其王,遷我區夏,其後 子孫因命氏焉)."는 문장이 있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어보입니다. 당태종이 고구려왕을 포로로 잡았다는 것이나 이후 자손들이 고씨를 성씨로 정했다는 정보의 진위는 둘째치더라도, 이것은 당시 고충운이 몸담았던 당나라의 공식입장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문장이 앞에 놓인 것을 감안할 때, 제가 보기에는 증조부가 역임했다는 황국내성왕(皇國內城王)은 당나라(皇) 치하의 국내성왕을 의미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세대상으로도 고충운이 775년경에 사망했다면, 당시 평균적인 세대 나이차가 대략 20년 정도로 짧다는 것을 감안하면 적어도 증조때부터는 이미 당나라에서 벼슬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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