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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五胡)의 쟁패 5 - 석륵과 유요

작성자야스페르츠|작성시간09.02.27|조회수982 목록 댓글 4

흉노가 건설한 한(漢)은 상당히 정체가 모호한 국가였다. 국가의 핵심은 흉노였다고 하지만, 유연의 직계 일족들조차도 군사력이 압도적이지는 않았고, 거의 동등한 군사력을 갖춘 여러 군단, 그것도 흉노족이 아니었던 군단들이 존재하고 있다. 갈족의 석륵을 비롯하여, 한족 출신의 왕미, 유연의 일족이기는 하지만 직계는 아니었던 유요, 그 외에도 제각기 독자적인 군사 집단이 있었다.


이들 군단장(?)들은 모두 일세의 효웅이라 칭해도 손색이 없을 강렬한 개성을 갖춘 인물들이었다. 왕미는 이미 앞선 포스팅에서 언급한 바 있고, 유요와 석륵 역시 마찬가지였다.


석륵은 흉노의 하위부족인 갈족 출신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한족이 갈족으로부터 노략질해서 노예로 팔렸던 인물이다. 후에 도적떼를 이끌다가 다시 흉노의 부중에 가는 등, 다난한 역경을 거쳐 유연에게 항복하였다. 왕미와 같은 망명장군 출신인 것이다.


석륵은 유연의 휘하에서 그야말로 기라성 같은 전공을 세웠다. 사료에서 보이는 석륵의 활동 범위를 살펴보면 삼국시대의 조조와 맞먹을 정도다.


영가의 난 이전에 한군이 벌인 군사 활동은 항구적인 정복보다는 약탈과 더불어 및 낙양에 대한 압박이 주요한 목표였던 것 같다. 석륵은 310년 초까지 왕미와 함께 황하를 넘나들며 하북과 하남, 산동 일대를 초토화시키고 다녔으며, 310년 말에는 황하를 건너 남양(南陽)을 거쳐 양양(襄陽)을 노략질하고 한수 서쪽, 장강 이북 일대에서 겨울을 났다. 흉노의 군사가 마침내 형주까지 위협하게 된 것이다.


한편, 유요는 유연의 일족이기는 했지만 직계가 아니었던지라 계승권과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계승권에서 약간 멀었던 유총-유총은 유연의 서자-과 함께 주로 낙양 공략에 참여하였는데 유총이 쿠데타로 황제가 된 이후에는 유총을 대신하여 낙양 방면의 전선을 담당하였다.


311년, 결전의 해가 밝았다. 장강에서 출발한 석륵은 한수를 건너 강하(江夏)를 격파하고 하남 일대를 초토화시키면서 마침내 허창까지 진격하였다. 유요를 비롯한 주요 군단들 역시 낙양을 목표로 진격하였다. 이후에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는 앞서 서술한 바 있다.



낙양을 함락한 이후에도 석륵·유요·왕미 등의 장수들은 독자적인 군단을 유지하였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한군의 기본 전략(?)은 영토를 정복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화북 일대에는 진 왕조의 여러 세력들이 버티고 있었다. 주요 세력들을 꼽아보면, 산동 및 황하 하류 일대를 통치하던 구희, 유주의 왕준, 병주(진양을 중심으로 산서성 북부를 유지하고 있었음)의 유곤 등이 있다. 한의 실질적인 통치 영역은 산서성 중남부 일대에 불과했던 것이다.


유총의 명령에 따라 유요는 낙양을 거쳐 장안을 점령하였고, 석륵은 주로 황하 이남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왕미는 황하 이북에서 활동하였는데, 반란을 꿈꾸며 석륵의 군대를 탈취하려다가 오히려 자신이 털려 일찌감치 퇴장하였다. 왕미의 행동이야 당연히 반역에 해당하지만, 그의 군대를 그대로 흡수해버린 석륵의 독단은 평양의 황제 유총에게 기분 나쁜 일이었다. 그러나 황제 유총은 석륵에게 말로만 가볍게 꾸짖었을 뿐, 오히려 직책을 높여주었다. 석륵의 세력이 황제로서도 무시 못 할 크기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석륵은 이 무렵에 어머니 왕씨·조카 석호(石虎)와 상봉하게 된다. 노예로 팔렸었던 석륵의 어머니와 조카를 찾은 것은 병주의 유곤이었는데, 그는 애써 찾은 인질을 석륵에게 고이 보내주면서 ‘우리편 될래?’ 하고 유혹한다. 석륵이 바보가 아닌 이상 저런 유혹(?)에 넘어갈 리가 없다. 당연히 어머니와 조카만 낼름 모셔 놓고 유곤에게는 ‘즐’....


312년, 석륵은 마침내 강남의 보루 수춘을 넘보기 시작한다. 그러나 마침 장마로 인해 병사들이 병에 걸리고 강남의 군사들이 대응해오자 난관에 봉착하였다. 이때 석륵의 모사 장빈(張賓)은 유명한 ‘갈피 대책’을 진언하였다. (권중달 선생님은 갈피 대책을 한신이 유방에게 한중에서 말한 계책이나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와 동급으로 유명하다고 서술하였는데, 사실 처음 들었다...ㅡㅡ;)


원래 석륵은 까막눈이었다. 그러나 인물 자체는 원래부터 비범하였던 것 같다. 글씨는 읽을 줄 몰라도 사리분별은 학자들만큼이나 뛰어났고, 무엇보다 인재를 사용할 줄 알았다. 석륵은 309년경부터 학식이 뛰어난 이들을 모아 군자영(君子營)이라는 부대(?)를 만들었던 바 있다. 이 군자영 출신으로 석륵군의 총참모 역할을 하게 된 것이 바로 장빈이다.


장빈은 석륵에게 무의미한 약탈 전쟁을 그만두고 하북의 기주 일대를 중심으로 세력을 구축할 것을 건의한다. 이에 따라 석륵은 양국(襄國)을 거점으로 하북을 점거하고 사실상의 독자적인 정권을 세운다.(312년) 314년에는 유주의 왕준을 멸하고 사실상 태행산맥 동쪽 대부분을 지배하게 된다.


석륵의 세력은 한 황실에게도 상당한 위협이 되었던 것 같다. 심지어, 석륵이 한의 청주자사 조억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므로 토벌하게 해달라고 표문을 올리자 석륵의 세력이 커질 것을 두려워해 허락하지 않을 정도였다. 석륵이 아직까지는 충성을 다하고 있기는 했지만, 이미 한으로써는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커진 상태였다.


한편, 유요는 311년에 장안을 점령하였으나 하서(河西)의 장궤가 보낸 원군으로 세력을 보충한 진 왕조군에게 패하여 312년, 장안을 내주고 퇴각하였다. 장안에서는 사마업을 중심으로 임시정부가 구축되어 316년까지 버티게 된다. 장안을 빼앗긴 유요는 주로 산서 북부의 유곤과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유곤은 선비족 탁발부와 동맹을 맺고 굳게 버텼기 때문에 전쟁은 지지부진하였다.


316년, 유요는 장안을 함락하고 관중 일대를 사실상 평정하였다. 유요의 압박에서 풀려난 병주의 유곤은 그 틈을 타서 무리하게 석륵을 공격하다 스스로 무너져 버렸고, 석륵은 마침내 산서 북부까지 통제하게 되었다. 유요의 세력도 사실상은 독립 정권이었으므로, 당시 한 정권의 상황은 한 줌밖에 안 되는 본국의 세력을 석륵과 유요라는 대세력이 둘러싸고 있는 형세였다.


318년, 유총이 죽고, 그의 아들 유찬이 즉위하였다. 유찬 자신도 졸렬한 황제였기 때문에 유찬의 외척이었던 근준(한족으로 추측됨)은 바로 난을 일으켜 유찬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근준이 잡을 수 있었던 정권(?)이라고 해봤자 산서성 중남부의 한 줌밖에 안 되는 세력뿐이었다. 근준은 평양에 머물러 있던 유씨 일족을 모조리 몰살시키고 황제의 능묘를 파헤치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유요와 석륵은 각기 동서에서 근준을 공격하였다. 유요는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서쪽에서 근준을 압박하였고, 석륵 역시 압도적인 세력을 바탕으로 근준을 격파하였다. 12월, 근준은 내부 반란으로 인해 죽고, 근준의 잔존 세력은 유요에게 항복하였다. 석륵으로서는 죽 쒀서 개 준 꼴이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른 석륵은 평양을 거세게 공격하였다. 근준의 잔존 세력은 평양을 버리고 도망쳐 유요에게 항복하였고, 석륵은 평양을 불태우고 돌아갔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공식적으로 유요와 석륵이 결별한 것은 아니었다.


319년 봄, 석륵은 유요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평양을 함락하였다고 고하였다. 이에 유요는 석륵의 작위를 올려 조왕(趙王)으로 삼았다. 그러나 유요의 세력은 석륵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석륵이 배반할 것을 두려워한 유요는 때마침 석륵을 참소하는 말을 좇아 석륵에게 돌아가는 사신을 추격하여 잡아 죽였다. 이로써 석륵과 유요는 공식적으로 결별하게 된다.


관중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유요와, 관중을 제외한 화북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던 석륵이 화북의 패권을 놓고 격돌하게 된 것이다.

 

※ 유총 사망 무렵의 중국 정세 (석륵의 활동 범위 표시는 310~312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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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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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김준수 | 작성시간 09.03.03 지도자 개개인의 능력도 만만치 않지만 석 륵의 성공은 역시 그 당시 역사 흐름과도 무관하지 않겠지요. 서한대까지는 관중 등 서부의 땅을 차지한 쪽이 우세를 점했지만(예, 서주⇒은상, 서한⇒항초) 동한대부터는 하남 등 동부의 땅을 차지한 쪽이 족족 우세를 점했고 석 륵의 시대에는 그러한 경향이 최근의 일이었으니까요. 여러 요소들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이러한 흐름이 주요한 요인이 되었으리라 봅니다. 인재 수급 등의 문제에 있어서도요.
  • 답댓글 작성자야스페르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03.03 그런가요. 그런데 꼭 그렇게만 볼 수도 없는게... 수나라는 관중에서 출발했고, 당나라도 관중을 장악하는 것이 사실상의 출발선이었죠. 꼭 흐름이라 보기 보다는, 결국은 정황의 변화에 따라 관동이 유리할 때도 있고, 관중이 유리할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뭐, 송대 이후로는 관중이 완전히 마이너가 되기는 합니다만...
  • 작성자김준수 | 작성시간 09.03.05 네, 동의합니다. 다만 북주의 건국 이전까지는 관동 쪽이 우세를 점한 기간이 길었다는 이야기를 했어야 했는데 설명이 부족했습니다. 여러 변수도 있었지만 역시 관동 쪽이 '인재 수급'에는 유리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말이지요.
  • 작성자백랑수 | 작성시간 09.05.15 유익하게 읽고 있습니다. 늦게나마 감사드립니다. 혹시 유주의 왕준에 대한 기록이 더 있나요?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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