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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이란계 이태백

작성자麗輝|작성시간09.05.13|조회수1,491 목록 댓글 6

손가락과 달, 그리고 거울

 

달을 가리키면서 손가락 밖에 보지 못하는 인간을 향해 이태백(701~762)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 명경같이 밝은 달 …….”

 

그는 달을 순수의 극치인 명경(거울)으로 간주하면서도 결국은 현세에서 같이 놀던 유희의 대상으로 끌어내렸다. 인간은 유희의 단계를 벗어나 거울과 같은 마음으로 차원을 높이고자 하지만 이 시는 그런 단계로 이행하지 못하는 인간들의 실존적인 고뇌를 그리고 있다.

 

이태백, 그는 누구인가? 그는 어디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선조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아직껏 이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지 않고 있다. 이태백이 타계한지 1,300년이 지났지만 그의 시에 관한 해설도 일부 밝혀지지 않은 채 여러 가지가 의문으로 남아 있다. 일부 이란 학자들은 이태백이 이란계 중국 시인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이태백의 출신에 관한 의문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미트라’는 페르시아어로 ‘매흐르’라고도 하는데 이는 태양을 뜻한다. 즉, 미트라교는 태양(빛의 신)을 숭배하는 종교이다. 조로아스터교의 경우도 불을 숭배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때 불은 구체적 대상이기도 하지만 영적인 깨달음을 뜻하는 내면의 불(빛)을 의미한다. 페르시아의 고대 사상은 미트라교를 통해 기원전 로마제국에 널리 퍼져 성행했으며, 페르시아 불교는 중국 초기 불교의 토대가 되면서 중국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태양과 달은 서양과 동양에서 깨달음과 욕정을 자제하는 의미를 깨우쳐 주고 있다. 명경이란 단어가 페르시아에서 중요한 시어로서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의 신앙이 내면 정화에 그 토대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달에서 온 신선이라고 불리는 이태백은 중앙아시아의 쇄엽에서 태어났다. 쇄엽은 현재 키르키즈스탄 북부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중앙아시아에는 키르키즈스탄의 일부 지역을 포함해서 2천 5백만 명 이상의 타직인들이 지금도 페르시아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지역의 페르시아어를 쓰는 타직인들은 구소련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키릴 문자에도 익숙하지만, 구소련에서 독립한 90년대 이후 이 지역의 학생들은 페르시아 문자를 배우고 있다.

 

이란 동부의 코라손 주와 더불어 중앙아시아의 페르시아권을 합쳐 大 코라손권이라고 부르는데, 이태백은 당시 코라손권 출신으로 5세 때 부친과 함께 사천성의 江油 지역으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부친이 코라손의 지사를 지냈다는 설도 있다. 이태백은 어릴 적부터 시에 대한 조예가 깊었으며 수많은 시를 지었다. 배움에 대한 갈증에 목말라 하면서 25세 때 사천성을 떠나 오랜 세월 여러 지역을 돌아 다녔으며,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사회적인 상황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는 744년에 낙양에서 두보를 만났고, 노년에는 방황하며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762년 안징성의 당도에서 농협증으로 눈을 감았다.

 

중국학자들이 쓴 자료들을 통해서 이태백이 살았던 시대상을 알 수 있다.

 

그 외국인들 가운데에는 무역을 위해 온 사람들, 특히 페르시아 상인이 수적으로 가장 많았으며 그중 일부는 장기간 당나라에 체류하기도 하였다. 두보가「灩澦」라는 시에 “뱃사람 낚시꾼이 노래를 부르고 估客 胡商(페르시아 상인)은 눈물을 적신다.” 라는 시구가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 사천(촉) 지방에까지 서역 상인이 진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변 지역뿐만 아니라 당의 중심부에서도 서역 상인들의 자취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구당서』124권 ‘전신공’에 의하면 상원 원년(760년)에 반란이 일어났을 때, 진압군과 반란군이 전투를 벌이는 가운데 수많은 서민과 상인들의 재산이 약탈을 당하였고, 당시에 양주에 체재하고 있던 페르시아 상인들도 그 와중에 휩쓸려 들어가 수천 명이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반란 사건에 연루되어 잡혀 들어간 사람 수만 해도 수천 명에 달했다고 하니, 그 규모가 엄청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1).

 

1) 장징 저(이용주 역), 2004,『사랑의 중국 문명사』, 이학사, p.146.

 

중앙아시아의 페르시아 무희들이 당나라에 들어왔으며 중앙아시아의 페르시아권 춤곡이 크게 유행하였다. 서역의 여성들은 대부분 페르시아 계통이었다고 알려져 있다2).

 

2) 장징 저(이용주 역), 2004,『사랑의 중국 문명사』, 이학사, p.151.

 

이태백 자신의 시에도 ‘호희’라 불리는 술파는 페르시아인 여성이 등장한다. 이태백은 페르시아의 무희와 어울려 술을 마시며 본향의 그리움을 풀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호희의 미에 대해 격찬을 퍼부었으며 하얀 손(다스테 새피드, 다스테 비저)의 은유를 사용하여 그녀들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지금도 중앙아시아를 포함하는 페르시아 시에서 이러한 표현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하얀 피부가 미인의 요건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고대 페르시아의 여인상은 둥근 얼굴과 크고 검은 눈, 눈썹의 숯이 많아 초승달과 같이 눈을 감싸는 여인을 미인이라고 했다. 페르시아 여성의 고혹함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현재 대부분의 이슬람 여성들은 정치권력의 속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감정 표출이 자유스러웠다. 이태백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호희’는 고국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상징한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대제국을 형성한 페르시아는 재상, 행정 제도를 비롯해 음식과 의복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에 걸쳐 아랍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랍의 침략으로 엄청난 史料와 작품들이 사라져 버렸다. 페르시아 역사에서 아랍과 몽고의 침략은 이란인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으며, 아랍은 이란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종족 중의 하나가 되어 버렸다. 페르시아 문학의 역사가 아랍의 침략 이후 9세기에 재등장하면서 낭만적 서사시는 대시인 고르거니와 네저비(1209년 사망)에 의해 다시 불렸다. 11세기 중반 고르거니의 낭만적인 장편 서사시가 애쉬커니(파르티아, B.C 247~A.D 224) 왕조의 전설에서 생겨났으며, 외래 종교인 이슬람교를 유입되기 이전의 연애시라고 말할 수 있다. 각운 형태를 띠고 있는 시형은 델리 출신의 유명한 페르시아어 시인, 아미르 코스루(1253~1324)에 의해 계승되었다.

 

페르시아 종교와 철학에서는 사랑론이 등장하는데, 아랍의 침략으로 인해 방대한 자료가 소실되어 사랑이란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된 시기를 알 수 없다. 이후 페르시아 최고의 소네트(Sonnet, 페르시아어로 가잘이라고 하며 사랑과 술을 주제로 한 7~14행의 시) 시인 허페즈(?~1390)로 연애시의 전통이 이어진다. 페르시아의 사랑론은 한국 문학이나 중국 문학에서 보이는 사랑론과는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이란계 중국 시인 이태백은 페르시아의 사랑 노래를 중국의 사랑 노래와 적절하게 혼합했다. 그는 중세 페르시아와 중국의 문학사에 가교 역할을 하는 국제적인 시인이었다.

 

이태백과 같은 이란계 중국 시인과 당시 중국에 거주했던 수많은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페르시아 종교와 철학의 가장 중요한 담론인 ‘사랑’이 중국의 중심부와 주변부를 휩쓸고 지나갔다. 이로 인해 페르시아는 중국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이런 흐름은 중국과 인도를 소통시켰다. 또한 페르시아를 통해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 이루어졌으며, 페르시아 문명은 인류 문명의 뿌리이자 교두보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이태백과 그의 시를 재조명해보면 좀 더 확실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한국의 중국 문학계에서도 그의 시에 대한 번역 작업이 이러한 관점에서 다시 다듬어질 필요가 있다. 이태백은 태백산으로 도사를 찾아가 비밀을 얻고자 했기에 자호를 태백이라 칭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중국의 도교와 페르시아 수피즘의 관계를 설명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수피즘(sufism, 진리를 찾는 구도승과 탁발승의 도)을 추종하는 수피(sufi, 도인)와 도사의 의미는 동일한 개념이다. 이태백의 삶의 행로는 페르시아 수피즘의 일반적인 전형이기도 했다. 이태백이 말한 호인은 오랑캐와 구별할 필요가 있으며, 오랑캐는 주로 흉노와 그 일파인 투르크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족은 돌궐족이라 알려져 있다. 페르시아어의 문헌에 따르면 투르크족은 아시아 아리안인과 몽골로이드의 혼종으로 언급되어 있다. 일부 우즈베키스탄과 타직키스탄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해 보면 이러한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몽골로이드의 얼굴 생김새에 오뚝한 코와 둥근 눈을 가지고 있어 아몬드 형의 눈을 가진 한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의 아시아인과는 뚜렷이 구별된다. 오뚝한 코를 가진 북방계 한국인은 투르크인과의 구별이 쉽지 않아 투르크인이 아니냐는 질문을 간혹 받곤 한다. 최초의 투르크계 국가로 알려진 페르시아 가즈나비(962~1186) 왕조는 노예 출신이 왕좌에 올랐던 경우로, 이 왕들은 우리와 전혀 무관한 종족이 아니어서 짜릿한 전율이 오기도 한다.

 

중국으로 건너온 이태백의 부친이 왜 굳이 이 씨 성을 택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부친이 당나라 황실의 성을 고려한 것이 아닌가 추측을 할 뿐이다. 이태백의 일가는 후대에 농서 이 씨로 본을 정하였으나, 그들의 생애를 통해 제대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다.

 

당나라 황실인 이 씨의 조상이 역사서의 기술대로 정말로 한족이었는지는 대단히 의심스럽다. 가령 이 씨 일족이 한족이었다 하더라도 초대 황제 이연은 반쪽만 한족, 2대 당 태종은 4분의 1만 한족이었으며 3대 당 고종 이치에 이르면 한족의 피는 8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순혈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지만 당대 24명의 황제 중에서 여황제 측천무후를 제외하고는 많든 적든 이민족의 피를 이어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할 수 있다3).

 

3) 장징 저(이용주 역), 2004,『사랑의 중국 문명사』, 이학사, pp.195~196.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이태백의 부친이 자신의 성씨를 이 씨로 정한 것은 이 씨의 혈통이 한족이 아닌 혼혈족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정되며, 이 씨는 안 씨처럼 당시 중국의 중심부와 주변부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했던 페르시아 계통의 혈통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송 대까지는 이민족이 황제가 되어도 대체로 자신들의 출신을 은폐하거나 당의 황실처럼 중원의 지배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들의 조상이 한족임을 주장해 왔다4).

 

4) 장징 저(이용주 역), 2004,『사랑의 중국 문명사』, 이학사, p.196.

 

이태백이 살았던 당시 중국 당나라 황실은 도교를 존중했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외래 종교인 불교가 들어갈 수 있는 토양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이태백이 이사한 촉은 도교 교단 형성의 기원이 된 후한 시대의 五斗米道가 발생한 곳이기도 했다. 이러한 지역 사정으로 인해 그는 도교 쪽으로 진출하게 되었으며, 애르펀에도 깊이 천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어릴 때부터 도교 공부를 시작한 것도 이와 관련이 깊다. 이태백이 도사(도교를 수행하는 사람)를 찾아다니며 그들과의 교분을 돈독히 했다는 사실은 그의 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밝은 달과 황금 술통

 

페르시아인들은 포도주뿐만 아니라 서역에서 수입되는 과일로 술을 제조했다. 구도자들에게 술은 신적 근원을 체험하기 위해 끊임없이 빠져들기를 갈망하는 대상이다. 이태백은 술과 사랑을 노래한 대표적인 시인이다. 술과 사랑, 즉 주색은 페르시아 문학의 중요한 요소이며, 흔히 술은 신의 이슬에 비유된다. 술은 애르펀이나 수피즘과 불가분의 관계로 페르시아 문학과 철학의 영원한 알레고리이자 메타포이다. 이태백이 주색을 노래한 시인으로 평가되는 것은 그의 문학이 페르시아 문학의 근본적인 담론과 일치함을 증명하는 요소이다. 중세 페르시아에서는 주선의 경지에 이른 대시인들이 적지 않았다.

 

이태백은 술과 달을 벗 삼은 낭만주의 시인이었다. “우정과 의리, 애국심이 있었으며, 악에 물들지 않은 벗들하고만 痛飮高歌했다. 현실 참여의 정열은 국가 대의를 바로잡겠다는 순수한 것.”5)이었으나, 일부 문헌에서는 출신의 한계 때문에 권력에 다가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5) 이태백(장기근 역), 2002,『이태백』, 명문당, p.164.

 

악부시「고랑월행」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어려서 나는 달을 몰라서 흰 구슬 쟁반이라 불렀다.

구슬을 박은 경대가 푸른 구름 높이 걸려 있는 줄 알았다.

 

이 작품 속에는 달 외에도 계수나무와 흰 토끼, 두꺼비, 상아 등의 소재가 등장하는데 이태백에게 달은 어둠을 밝히는 이상의 빛이자, 낭만적인 미신이기도 했다6).

 

6) 이태백(장기근 역), 2002,『이태백』, 명문당, p.190. 

 

달과 토끼에 관한 이야기는 불교와 관련이 깊은데, 페르시아가 불교 국가였다는 사실과 이태백이 이란계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와 페르시아 불교와의 연관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에게 달은 유희의 존재이면서 무욕의 존재이기도 했다. 그는 달을 신선이 갖고 다니는 거울에 비유하곤 한다. ‘거울’이란 메타포는 페르시아 문학에서는 물론 심지어 잡지나 가게의 간판으로도 흔하게 사용되고 있다. 明鏡止水, 이란인들의 새해 식탁에는 거울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중앙아시아, 메소포타미아의 일부 지역에서 새해를 뜻하는 ‘노루즈(noruz, 조로아스터교에서 창조주 아푸라마즈다에 의해 천지만물이 창조된 날)’는 참으로 철학적인 의미를 띠고 있다.

 

페르시아 문학에서는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매일 변하는 모습 속에 깃든 현상세계의 실제적인 모습과 매달 고정적인 모습 속에 깃든 불변하는 본질이 둘 다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동양과 서양 문화의 모태가 된 페르시아 문화는 ‘변화’의 동양적 개념과 ‘불변(초월)’의 서양적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수피즘에서는 매일 차오르며 변화되는 달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구도자가 새로이 깨우침을 얻었다고 한다.

 

 

신규섭, 2004,『페르시아 문화』, 살림, p.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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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재밌는 내용이 담긴 책을 읽었다(책 제목은 위에 적어놓았으니 관심이 있으신 분은 한번 읽어보시길 권한다. 몇 페이지 안 나와서 1시간? 정도면 금방 다 읽을 것 같다). 이태백이 이란계라는 내용인데 주인장이 전혀 몰랐던 부분인지라 눈에 확 들어왔다. 위의 내용은 그 책의 9쪽에 달하는 내용을 전부 옮겨 적은 것으로서 아마 이 사실을 몰랐던 분들이 읽는다면 상당히 흥미롭고, 또 놀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태백은 일반적으로 긴 옷을 나풀거리면서 멋드러진 수염을 쓸어내리며 고고하게 시를 읊는 모습으로 많이 연상하고들 한다. 주인장 또한 그를 단순히 중국인으로만 생각하고 있었지, 그의 출신이 이란계, 더 정확하게 말하면 페르시아계라고는 전혀 의심조차 하지 못 했다.

 

어쨌든, 이 책을 읽으면서 '아~충분히 가능성이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관련 논문을 한번 찾아봤다. 이에 대해 이병주는 그를 두고 '甘肅省 成紀縣 태생에 소년기는 외진 隴西에서 보냈으며, 그 불패의 豪俠性은 巴蜀의 亭毒을 받은 탓'이라고 적고 있다(1963: 98). 한편『연산군일기』권31「4년 8월 17일(기묘)」를 보면 남효온이 지은 시 가운데 隴西公이라는 글자가 있었는데, 유자광이 남효온을 역적이라고 고발하면서 이 시를 인용하고, "농서공은 이윤종을 가리킨다."고 말했다. 연산군이 "농서공이 무슨 뜻이냐?"고 묻자, "옛날 이릉과 이백이 농서에 살았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이씨를 통칭해서 농서라 부른다."고 유자광이 설명했다. 시를 지은 남효온이나 시를 읽은 유자광이나 모두 농서를 이씨라는 뜻으로 쓸 정도로 이백의 고향 농서가 널리 알려졌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중앙아시아에서 태어난 이태백은 그가 어렸을 때 농서 지방으로 이주한 것이 아닌가 싶다. 암튼 둘 중의 어느 누구의 말이 더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이태백이 중원이라고 불리던 곳이 아닌 당의 주변부에서 태어나 자라났음을 추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태백의 선조가 왜 이 씨를 성씨로 삼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책의 저자는 당 황실이 혼혈이라는 점을 들어 그와 같은 성씨를 채택했다고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싶기는 하다. 솔직히 외국의 성씨를 필요로 할때 그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그 성씨를 채택하는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독일계 한국인인 이한우씨의 본명은 베른하르트 크반트(Bernhard Quandt)이며, 대한민국으로 귀화하면서 이한우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훗날 이참으로 개명하였다. 그는 본관을 독일로 둔 '독일 이 씨'의 시조인데, 이때 성씨와 본관이 한국의 역사 및 문화와는 큰 상관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미국에서 온 로버트 할리 역시 부산 영도에 처음 발을 들여놨다 하여 '영도 하 씨'의 시조가 되어 하일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 즉, 이태백의 선조가 당나라에 도착했을때 그들이 당 황실의 성씨가 혼혈이라는 이유 때문에 자신들도 이 씨라는 성씨를 사용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 싶다. 솔직히 당 황실의 이 씨가 투르크계 혼혈인데 반해 이태백은 투르크계와는 크게 상관이 없는 페르시아계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 황실의 성이 이 씨이므로 그 성씨를 쉽게 채택했을 지도 모르지만 그 이면에 당 황실의 혼혈성이 이유로 들어갔는지는 의문이다.

 

한편, 이태백의 출신 성분을 파악하기 위해 이런저런 논문을 뒤지다가 재밌는 논문을 찾았다. 이상수의 논문이 그것인데 그는 이태백이 지독한 인종주의자에 국수주의자라고 서슴없이 비난하고 있다(2007: 92-100). 그가 남긴 몇 편의 시에서 그는 흉노를 정벌한 위청, 곽거병과 같은 장군들을 찬양하고 흉노를 베는 행위를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이상수는 이태백의 좋은 면만 보여줄 것이 아니라 이런 면도 같이 널리 알려야 한다고 강변한다. 이 부분은 조금 놀랐다. 그도 중화인이 아닌 페르시아계 외국인인데 어떻게 이처럼 중화주의에 걸맞는 시를 썼을까? 페르시아와 흉노는 다르다고 생각한 것인가? 아니면 그가 중화중심주의에 물들어 있었기 때문인가? 그 자신이 중국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혹은 그 자신을 중국인으로 생각했기에 이런 시를 썼던 것일까? 궁금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가 몸 담기로 한 나라의 역사를 공부하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장군 혹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위인에 대해 그런 시를 남길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상수는 이를 두고 당시 시대적 분위기가 그러했다느니, 일제강점기 어용학자에 이태백을 빗대기도 했지만, 이태백의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일 경우도 고려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이태백에 관련된 기존 연구성과에서 많이 언급하는 것이 '그의 시에 자주 나타나는 술(酒)'이다. 위 책을 쓴 저자 역시 이태백을 두고 술과 달을 벗 삼은 낭만주의 시인이라고 지칭하고 있지 않은가. 먼저 이태백을 지독한 인종주의자에 국수주의자로 표현했던 이상수는 시성 이태백을 알코홀릭이라고 거침없이 표현하고 있다. 실제 이태백은「달 아래 홀로 술을 마시며(月下獨酌)」라는 제목의 연작시를 남겼는데, 내용을 보면 그가 혼자서 술 마시는데 얼마나 익숙했는지를 알 수 있다. 즉, 홀로 술을 마시며 달과 그림자를 초청해 셋이 함께한 술자리라고 우기는 것은 알코홀릭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발상이라는 것이다. 당대 지식인들은 은어로 청주를 '聖人'이라고 하고, 탁주를 '賢人'이라고 했다는데, 이태백의 이 시를 보면 전체 70수 중에서 '술을 사랑한다(愛酒)'라는 표현이 4번, 술 주(酒)자만 6번, 청주, 탁주, 성인, 현인이 6번 등장한다고 한다(2007: 86-90). 이걸 보면 그의 시는 술을 주제로 아름답게 꾸며진 한편의 각본없는 드라마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비단 이 시 뿐만 아니라 이태백의 시를 보면 '酒'자는 총 206번 등장하는데 이를 한 수로 친다면 이태백의 전체 시 중 1/5를 차지하는 셈이라 하니(尹錫禑 2004: 263) 그 엄청난 愛酒에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이태백은 두보처럼 전체 시의 구조와 윤곽을 머리 속에 미리 조립해 놓고 치밀하게 시어를 조합해 내지를 않는데, 시간적 추이에 따라 보이는대로, 술의 취기가 올랐다가 취기가 깨는 대로 써 내려갈 뿐인 셈이다.

 

이를 두고 신규섭은 중국 도교와 페르시아 수피즘 사이에 연관성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태백의 시에서 페르시아 수피즘을 엿볼 수 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아직 국내 연구 중에서 이태백의 시를 분석하면서 이런 페르시아-당 사이의 사상적 교류를 언급한 것은 없는 것 같다. 다만, 이태백이 갖고 있는 자유분방함을 중국 도교와 연결시키고는 있는 듯 하다. 지세화는 이태백의 절구시를 분석하면서 이것이 당시의 풍조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고 있지만 이태백이 부분적으로 이를 탈피하고자 노력했다고 해석하기도 했다(1991: 61-65). 하지만 주인장이 보기에는 이태백이 중국어에 정통하지 못한 외국인이기에 그가 최대한 자신이 알고 있는 중국어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다 보니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 것이 아닐까 싶었다. 마치 고려시대 문장가들의 문장을 두고 중국인들이 고졸하다고 표현한 것처럼, 오늘날 콩글리쉬를 써도 대화는 가능하지만 영미 문학에는 미숙한 것처럼 말이다. 주인장이 몇 안 되는 이태백 관련 연구성과를 주욱 훓어보면서 든 생각은 '이태백은 외국인으로서 자신이 익숙하고, 잘 알고 있는 사상(페르시아계 수피즘)에 맞춰 중국에서 자신의 생각을 외국어(중국어)로 표현한 것 뿐'인데 우리는 그것을 너무 포장하고 덧씌워서 어렵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아닐까~싶기도 했다. 거기다가 그는 정말로 술을 사랑하는 술 주정뱅이였는지도 모를 일 아닌가.

 

암튼 이태백에 대해서 그간 별로 신경쓰지 않았었는데, 그가 이란계라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가 정말 이란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중원물을 덜 먹은 외지인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가 정말로 술 주정뱅이에 그냥 술에 취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대강 적었는지는 몰라도 그 정도의 한문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보면 굉장히 머리가 좋고, 언어학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가 페르시아 수피즘의 영향이든, 중국 도교의 영향이든 굉장히 자유분방하며 술과 달과 사랑을 예찬했으며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그가 정말 흉노를 정벌한 한대 장군을 찬양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중화주의에 물들었다거나 당대 시류에 휩쓸렸다고 보기는 힘들 듯 싶다. 그렇기에 이번 기회를 통해 이태백은 정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보고 느끼고 시로 읊었던 시선(詩仙) 혹은 주중선(酒中仙)이라고 불릴만 하지 않나 싶다.

 

 

참고문헌

 

『연산군일기』

신규섭, 2004,『페르시아 문화』, 살림.

尹錫禑, 2004,「李白詩에 나타난 飮酒와 자연의 관계-합일 혹은 초월의 매개로서의 술-」『中國語文學論集』28, 中國語文學硏究會.

李丙疇, 1963,「李白과 杜甫의 生涯」『어문학』10, 한국어문학회.

이상수, 2007,「중국 문학 속의 중화주의-리바이(李白)는 왜 "오랑캐 땅에 사람이 없다"란 시를 썼을까」『인물과 사상』114, 인물과 사상사.

지세화, 1991,「李白 絶句詩 格律分析」『中國學硏究』6, 中國學硏究會.

 

 

첨부파일 李白詩에 나타난 飮酒와 자연의 관계-윤석우.pdf

 

첨부파일 이백과 두보의 생애-이병주(1963,어문학10,한.pdf

 

첨부파일 중국 문학 속의 중화주의-이상수(2007,인물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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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광개토태왕 | 작성시간 09.05.13 이태백이라고 하면 뭐랄까... 흰 수염을 기른 도인적인 동양인을 떠올렸는데 이란계라니 신선함을 넘어서 충격적이네요ㅎㅎ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비슷한 얘기가 될지는 모르겠는데, 려휘님은 '안록산'을 'Alexander'의 음역으로 보는 것이 그럴 듯 하다고 보시나요? 관련은 그닥 없지만... 읽다보니 이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ㅋㅋ
  • 답댓글 작성자麗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05.13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안 씨가 당시 서역계 인물들이 동일하게 썼던 성씨라고 한다면, '록산'을 그의 원래 이름과 연관시켜서 이해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
  • 답댓글 작성자미주가효 | 작성시간 09.05.14 안록산의 이름의 의미에 관해 여러 이야기들이 있더군요. '안' 은 소그드인의 도시 '부하라' 를 말하던 '안국'安國 에서 온 것이고(참고로 '안국'(부하라)은 왕오천축국전에도 언급됨), '록산' 은 Rokhan 인데 소그드어로 '빛'이라는 의미이며 여자 이름으로 쓰일 땐 Roxana 가 된다는 이야기도 있더군요. 그 외에 '록산' 은 이란어로 '빛' 이라는 뜻의 Rowshan 의 음역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광개토태왕 | 작성시간 09.05.18 사실 저희 동양사 교수님께서 지나가는 말로 농담삼아 하신 말씀인데 저 포함해서 그 때 강의실에 있는 학생들 모두가 웃었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럴 듯 하더군요. 안록산의 본명이 알락산이라는 기록을 본 적도 있구요ㅎ
  • 작성자김준수 | 작성시간 09.05.14 실제 알렉산드로스 3세(혹은 알렉산더 대왕)의 페르시아인 아내는 록사나라는 이름을 가지기도 했지요. 좀 다른 예입니다만 제정 로마 시절 아우구스투스 시대 때 유명한 시인이었던 베르길리우스도 순수한 로마 사람은 아니라고 알려져 있으니까요. 여하간 려휘님의 의문제기에 십분 공감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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