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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1년 토번제국(吐蕃帝國) 지도

작성자여소제| 작성시간09.09.22| 조회수1179| 댓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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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여소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09.09.22 참고로 토번제국의 전성기는 저거보다 더 컷습니다. 전성기때 토번은 동으로는 당나라 수도 "장안성"을 점령했고(몇일 가지 못했지만) 북으로는 위구르 수도인 "카라빌가순" 인근까지 진격했습니다. 서쪽으로는 페르가나까지 점령했지요. 남쪽으로는 북인도 일대를 점령했습니다. 뭐 전성기 영토로 치자면 저거보다 더 크지요. 사실상 791년때까지 토번제국은 당시 가장 강력했던 제국이라 봐도 틀리지 않습니다. 792년 몽사조,당,압바스,팔라,위구르에 연합 공격에 토번 전성기는 끝나고 793년 북정을 위구르에게 빼앗기는것을 시작으로 위구르와의 경쟁에 들어갑니다.
  • 작성자 麗輝 작성시간09.09.22 음...여소제님 지도가 안 나와요...왜 이러죠?? -.-;;
  • 답댓글 작성자 여소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09.09.22 네이버에서 복사해서 그런 모양이네요. 지도 다시 올렸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麗輝 작성시간09.09.22 음...멋진 지도네요. ^^ 잘 봤습니다.
  • 작성자 聖君 仁宗大王 작성시간09.09.22 이렇게 보니까 발해,신라가 많이 왜소해보이네요..-_-
  • 답댓글 작성자 여소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09.09.22 그래도 신라가 문화적 강국임에는 틀림이 없지요. 영토에 비해 인구수도 꽤나 되는 편이고... 토번같은 경우 강족,백복돌궐,한족등을 합쳐서 총합 인구 600~900만은 나온다고 하더군요.(웃긴건 현재 인구가 500만 고대나 현재나 별 차이가 없는 안습의 티베트;;)
  • 작성자 신농 작성시간09.09.22 발해 영토는 좀 더 넓게 볼 소지도 있긴 하지만... 암튼 발해가 당시 돌궐이나 위구르와 연합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토번과 위구르 양대 제국의 출현도 고구려 멸망에 지나치게 힘을 쏟아부은 당의 후유증 덕분에 가능했다는 점도 왠지 씁쓸하지요. 아주 약간의 시대 차를 두고 이렇게 갈렸다는 것이...
  • 답댓글 작성자 여소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09.09.22 뭐 사실 후유증으로 보기는 힘들듯합니다. 당나라로서 고당전쟁으로 입은 피해는 예상외로 적습니다.(1차 고당전쟁은 꽤 됬지만...) 당나라가 이후 토번제국에 투여한 병력에 수나 훈련을 보아도 상당한 애들이었고(금아군의 경우 돈황 고문서에 의하면 무측천으로부터 친히 훈장까지 받을 정도였던 애들이죠.) 토번 불패명장 가르친링이 이를 연이어 격파했다는것이 가장 크지요. 뭐 그 이전 토번 성장이 고당전쟁 덕분인건 사실이긴합니다. 하지만 또 한가지는 토번 역시 당나라와 그때 대대적인 대전을 벌 일 수 있었지만 먼저 굽히고 힘을 기른 다음 싸웠다는것도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이에 대해서는 점차 연재할 생각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 여소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09.09.22 또한 고당전쟁에서 토번이 이득을 봤듯이 토당전쟁에서 신라가 이득을 봤고 그 토당전쟁 덕분에 제2 돌궐제국 부흥이 가능했었고 이러한 돌궐 2제국 부흥으로 발해가 건국될 수 있었으니(뭐 유민들에 복국 노력도 있지만 역시나 해외 사정 영향이 크죠.) 결과적으로 손해볼 장사(? 표현이 이상하지만)는 아니었던듯 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 여소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09.09.22 위구르제국의 경우 사실상 고구려전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제국이였고;; 위구르 제국에 발흥은 돌궐 2제국 붕괴와 관계가 크며 무엇보다 위구르는 토번과 달리 친당 세력이었다는것을 봐야합니다. 당나라는 위구르를 성장시켜 토번을 막을 이이제이책을 세웠지요. 뭐 이건 앞서 위구르 토번제국 전쟁에서 연재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신농 작성시간09.09.23 물론 역사는 어떠한 사건이 이후의 역사 전개에 연쇄적인 파장을 불러오기 때문에, 여소제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손해보는 장사를 운운할 수는 없지요. 단지 안타까움에서 해본 말이었습니다. // 당나라가 고-당 전쟁으로 입은 피해는 물질적 피해라기보다는, 국제정치 상의 문제가 더 컸다고 보아야 할 겁니다. 한쪽에의 지나친 몰두가 결국은 토번, 돌궐 등의 부흥 내지 재기의 기회를 주었으니까요. // 연개소문 정권의 고구려가 당에 굽히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는 김선생님의 [새로쓰는 연개소문전]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듯이, 그럴 수가 없었던 환경이었습니다. 이제 막 제국으로 성장하려던 토번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고 봐야겠지요.
  • 답댓글 작성자 신농 작성시간09.09.23 참, 토번과 위구르 양대 제국이라고 한 것은 제가 잘못 쓴 것입니다. 위구르가 아니고 돌궐이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여소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09.09.23 뭐 개인적으로 당나라가 처음 토번을 봤을때 당나라는 토번을 아주 무시했던것으로 보여지는데 그들은 속국인 토욕혼,강족을 빼앗길때까지도 군을 출동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송주일대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러서야 군을 출동시키죠. 이후로도 당이 문성공주를 보내거나 토번에 군사요청을 하거나 하는것을 보면 비유해보자면 토번을 고양이로 알았고 서쪽의 쥐들(안서사진부터 북인도까지)을 이이제이식으로 장악하려다가 이 고양이 새낀줄 알았는 토번이 호랑이 새끼였던셈이죠... 뭐 당태종에 가장 큰 실수라 보여집니다.
  • 작성자 밀리 작성시간09.09.22 티벳과 위구르....생각보다 크네요...^^ 저렇게 대단한줄은 몰랐습니다.... 휴~~~ 특히 위구르는 유목 제국중 좀 끝발??이 안서보였는데...생각외네요..
  • 답댓글 작성자 신농 작성시간09.09.23 위구르는 친당적인 외교를 통해서 이득을 많이 보았고, 이 외교가 오히려 당나라에게도 심히 부담이 될 정도였을만큼 위구르는 강한 나라였습니다. 돌궐이 반당 정책으로써 직접적인 위협이었다면, 위구르는 은근한 위협 세력이었달까요. 10세기 무렵 북방의 키르기스에게 멸망당하긴 합니다만...
  • 답댓글 작성자 여소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09.09.23 8~9c는 그야말로 티벳 위구르 소수민족에 전성기라고 할 수 있으며 bc237년에 건국된(왕조 틀을 갖춘건 32대 남리루첸 33대 송첸캄포때였지만) 토번왕조에 전성기 시대였죠... 토번의 경우 당시 군사력을 보면 상상을 초월합니다.(당나라 장안을 공격할때 동원된 군만 20만이었고 복고희은을 돕기위해 이동된 군사는 5만 북정성 전투에 출동된 군사수도 10만 가량으로 엄청난 군사력을 보유했죠. 양과 질 모두 겸했으니... 특히 토번의 전투 방법은 중국으로서 경험해보지 못한 전투였기에 상당히 곤혹스러웠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여소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09.09.23 위구르 제국의 경우 동쪽으로 거란 서쪽으로 페르가나에 이럴정도로 막강한 제국이었으며 당시 토번의 유아독존시기를 종식시켰다. 라고 보아도 될 제국이죠.(실상 위구르 제국 등장 이전가지 안사의 난 이후로 토번은 가히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제국으로 군림합니다.(당나라에게 조공까지 요구하고 조공을 받지요.) 위구르 제국의 멸망의 경우 전염병이 가장 큰 원인데 이는 중국사서에 자세히 나옵니다. 자연재해가 연이어 온것에 이어 위구르는 성을 쌓고 사는 정착생활을 했기에 그런 전염병을 피하지 못했죠.(정재훈씨나 다른 학자들 예상으로는 그 전염병은 탄저병으로 보더군요.)
  • 작성자 東明聖帝 작성시간09.11.15 토번은 예전에는 강성한 국가였으나 지금은......
  • 작성자 라이센스 작성시간09.12.13 굉장히 신선한 자료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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