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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삼국(삼한) 통일의 오해와 이해

작성자소호금천씨|작성시간07.03.26|조회수548 목록 댓글 15

신라 삼국(삼한) 통일의 오해와 이해

 

요즈음 삼국통일이라는 용어를 오해하는 것 같아서 사료를 올립니다.

당시 신라인들 그리고 고려시대, 조선중엽 아니 1960~70년 이전만 하더라도 삼국통일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신라인들의 삼국(삼한)통일의 자부심과 함께 고려시대 까지 이어져 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에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올려진 것이라 봅니다.

일제때 조선편수사에 의해 삼국통일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다는 말들도 사실은 틀린 주장 입니다

따라서 삼국(삼한)통일이란 말은 이미 제시된 사료와 같이 우리 역사서에 엄연히 기록된 용어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이 발해등의 역사를 고증하고 보다 부각시키는 의미에서 삼국통일이라는 용어 대신에

남북국시대로 사용하자는 의미는 보다 진보된 역사해석으로 저 또한 동감합지만 그래도 이러한 기록이 엄연히 남아 있는한

그 시대 상황에 따라 여러 각도로 해석될 것으로 보여집니다.

다만 저의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당시 신라인이나 조선왕조 중기 이전의 선조들이 자연 스럽게 사용되고

인식된 용어 라고 판단됩니다..

 

삼국유사  기이편

태종춘추공

 

[원문]: 王與<庾信>神謀戮力, 一統<三韓>, 有大功於社稷, 故廟號<太宗>.

[해석]: 왕은 유신과 함께 신비스러운 꾀와 육력(戮力)으로 삼한통일을 하여 나라에 큰 공을 이룩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직에 묘호를 태종이라 하였다.

 

[원문]: <新羅王>上表曰: <新羅>雖小國, 得聖臣<金庾信>, 一統三國, 故封爲<太宗>.

帝見表乃思儲貳時, 有天唱空云三十三天之一人, 降於<新羅>爲<庾信>, 紀在於書,

出撿視之, 驚懼不已, 更遣使許無改<太宗>之號.

[해석]: "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성신 김유신을 얻어 삼국통일을 하였기 때문에 태종이라고 한 것입니다."

 

삼국사기 본기 권 제8  신문왕 편

三國史記卷第八.

新羅本紀第八. <神文王>

 

[원문]: ○十二年春, 竹祐枯 . <唐><中宗>遣使口 曰: "我<太宗文皇帝>, 神功聖德, 超出千古, 故上僊之日,

廟號<大宗太宗> . 汝國先王<金春秋>, 與之同號, 尤爲僭越, 須急改稱." 王與群臣同議, 對曰: "小國先王<春秋>諡號, 偶與聖祖廟號相犯,  

令改之, 臣敢不惟命是從. 然念先王<春秋>, 頗有賢德,  生前得良臣<金庾信>, 同心爲政, 一統三韓, 其爲功業, 不爲不多.

捐館之際, 一國臣民不勝哀慕, 追尊之號, 不覺與聖祖相犯. 今聞敎 , 不勝恐懼, 伏望: 使臣復命闕庭, 以此上聞." 後更無別 .

秋七月, 王薨. 諡曰<神文>, 葬<狼山>東.

 

[해석]: 12년 봄, 대나무가 말랐다.

당 나라 중종이 사신을 보내 구두로 다음과 같은 칙명을 전했다.

"우리 태종 문황제는 신성한 공덕이 천고에 뛰어났으니, 붕어하던 날 묘호를 태종이라 하였다.

그런데 너희 나라 선왕 김 춘추에게도 동일한 묘호를 쓴 것은 매우 참람된 일이니, 조속히 칭호를 고쳐야 한다."

왕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의논한 후에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 선왕 춘추의 시호가 우연히 성조의 묘호와 서로 같게 되었는데, 칙령으로 이를 고치라 하니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컨대, 선왕 춘추도 자못 어진 덕이 있었으며 더구나 생전에 어진 신하 김유신을 얻어 한마음으로

정치를 하여 삼한통일을 하였으니, 그의 공업이 크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가 별세하던 때에 온 나라의 신민들이

그를 추모하는 심정이 극진하여 추존한 묘호가 성조의 묘호에 저촉됨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교칙을 들으니 송구스러움을 다할 수 없습니다. 사신이 황제에게 복명하되, 이대로 보고해 주기를 삼가 바랍니다."

그 후에 다시는 이에 관한 다른 칙명이 없었다.

가을 7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신문이라 하고 낭산 동쪽에 장사지냈다.

 

 

화랑세기 발췌본  풍월주 8세 문노편에서

 

[원문]: 庾信 統合三韓 以公爲士氣之宗主

[해석]: 유신이 삼한통합을 하고 나서, 공(문노)을 사기의 으뜸(宗主)으로 삼았다.

 

둘째로 삼한과 삼국의 용어인데 원래 삼한은 마한 진한 변한으로 성립 되었지만 당시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를 삼한이라고도 사용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삼국 또는 삼한으로 혼합하여 사용 하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만일에 구태어 삼한은 마한, 진한, 변한이라고 고정되게 생각해 볼때,

아래 청색으로 된 삼한 대신에 마한, 진한, 변한 으로 바꾸어 대입해 보면. 사료 내용이 이상해 집니다.

그러나 고구려, 백제, 신라로 대입해 보면 자연스럽게 되는데.

아예 일본서기에서는 삼한을 고구려, 백제, 신라 라고 정의해 버렸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삼한(삼국)통일 이나 삼한을 우리가 옳다 그르다 하는 것는 현대의 관점에서

다분히 정치적 또는 어떠한 이해관계에서 해석 논란되는 것이지 엄연히 기록되어 있는

역사적인 사료의 근본을 지워버리거나 없애지 않는 한 이에한 논란은 계속 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삼국사기 권 제 28 백제본기 의자왕편

百濟本紀第六.<義慈王>.

 

[원문]: ○十一年, 遣使入<唐>朝貢. 使還, <高宗>降璽書, 諭王曰: "海東三國, 開基日久,  

列疆界,

地實犬牙.

近代已來, 遂構嫌隙, 戰爭交起, 略無寧歲. 遂令<三韓>之氓,

命懸刀 俎 , 築戈肆憤, 朝夕相仍.

朕代天理物, 載深矜憫. 去歲, <高句麗>·<新羅>等使, 來入朝, 朕命釋玆 怨, 更敦款睦.

<新羅>使<金法敏>奏言: '<高句麗>·<百濟>, 脣齒相依,

竟擧干戈, 侵逼交至, 大城重鎭,  爲<百濟>所倂, 疆宇日蹙, 威力 謝, 乞詔<百濟>,

令歸所侵之城.

 

[해석]: 11년,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사신이 돌아올 때 고종이 조서를 보내 왕에게 타일러 말했다.

"해동의 세 나라는 개국의 역사가 오래되고 국토가 나란히 붙어 있으니, 국경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태이다.

근대 이래로 마침내 사이가 벌어져 전쟁이 계속 일어나니 거의 편안한 해가 없었다.

이에 따라 삼한 백성들은 목숨을 도마 위에 올려놓은 상황이 되었으며,

무기를 쌓아 놓고 분노하는 일이 아침 저녁으로 이어졌다.

나는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입장이니 이를 매우 가엾게 여기는 바이다.

지난해에 고구려와 신라의 사신들이 함께 와서 입조하였을 때,

나는 이와 같은 원한을 풀고 다시 화목하게 지내기를 명하였었다.

신라 사신 김 법민이 말하기를 '고구려와 백제는 긴밀히 의지하면서 군사를 일으켜 번갈아 우리를 침략하니,

우리의 큰 성과 중요한 진은 모두 백제에게 빼앗겨서, 국토는 날로 줄어들고 나라의 위엄조차 사라져 갑니다.

원컨대 백제에 조칙을 내려 빼앗아 간 성을 돌려 주게 하소서.

 

일본서기 권 25   天萬豊日天皇 孝德天皇

日本書紀 卷二五

 

[원문]: 大化四年(六四八)二月壬子朔◆二月壬子朔。於 三韓〈三韓、謂高麗,百濟,新羅〉遣學問僧。

[해석]: 大化 4년(648) 2월 壬子 초하루  三韓[삼한은 고(구)려·백제·신라 를 이른다]에 學問僧을 보냈다.  

이 해  新羅가 사신을 보내 調를 바쳤다.

 

금석비문중 (통일 신라시대)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   

  

[원문]:          

  皇龍寺 刹柱 本紀」※

侍讀 右軍大監兼省公 臣 朴居勿 奉敎撰」

詳夫 皇龍寺九層塔者」

善德大王代之所建也 昔有善宗郞眞」

骨貴人也 少好殺生放鷹摯雉雉出淚」

而泣感此發心請出家入道法號慈藏」

大王卽位七年 大唐貞觀十二年我國」

仁平五年 戊戌歲隨我使神通入於西」

國王之十二年 癸卯歲欲歸本」

國頂辭南山圓香禪師禪師謂曰吾以」

觀心觀公之國皇龍寺建九層窣堵波」

海東諸國渾降汝國 慈藏持語而還以」

聞 乃命 監君 伊干龍樹大匠 [百]濟阿」

[非]等率小匠二百人造斯塔焉」

(鐫字僧聰惠)」

其十四年歲次乙巳始構建四月▨▨」

立刹柱明年乃畢功 鐵盤已上 高[七][步]」

已下高卅步三尺 果合三韓以爲▨▨」

君臣安樂至今賴之」

 

[해석]:

황룡사 구층탑은 선덕대왕 때에 세운 것이다. 전에 선종랑(善宗郞)이라는 진골 귀인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 살생을 좋아하여 매를 놓아 꿩을 잡았는데, 그 꿩이 눈물을 흘리며 울자 이에 감동하여 마음을 일으켜 출가하여

도에 들어갈 것을 청하고 법호를 자장(慈藏)이라 하였다.

선덕대왕이 즉위한 지 7년째 되는 당나라 정관(貞觀) 12년 우리나라 인평(仁平) 5년 무술년(638)

우리나라 사신 신통(神通)을 따라 당나라에 들어갔다.

선덕왕 12년 계묘년(643)에 신라에 돌아오고자 하여 종남산(終南山)의 원향선사(圓香禪師)에게 머리 조아려 사직하니

선사가 “내가 관심(觀心)으로 그대의 나라를 보매, 황룡사에 9층의 탑을 세우면 해동(海東)의 여러 나라가 모두 그대의 나라에 항복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자장이 이 말을 듣고 (신라에) 돌아와 나라에 알렸다.

이에 (왕은) 이간(伊干) 용수(龍樹)를 감군(監君)으로 하여 대장(大匠)인 백제의 아비(阿非) 등과 소장(小匠) 이백여인을 데리고

이 탑을 만들도록 하였다. 선덕왕 14년 을사년(645)에 처음 건립하기 시작하여 4월……에 찰주(刹柱)를 세우고 이듬해에 모두 마치었다.

(탑의) 철반(鐵盤) 이상은 높이가 7보이고 그 이하는 높이가 30 3자이다. 과연 삼한(三韓)을 통합하여 (하나로 만들고) 군신이 안락한 것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에 힘입은 것이다.

 

 

월광사원랑선사대보선광탑비(月光寺圓朗禪師大寶禪光塔碑)

[원문]:

曉慈忍禪師致書云月光寺者神僧道證所刱也昔我太宗大王痛黔黎之塗▨▨▨海之▨▨止戈三韓之年垂衣一統之日被」

▨▨▨之▨永除▨▨之災別封此山表元也曾授錄於金剛又傳名於仙記淸冷泉澗靉靆煙霞廣孕珠靈備存

▨傳師其居焉師如響應聲振衣卽▨▨▨▨夕夢前神侍衛」

 

[해석]:

자인선사가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월광사(月光寺) 신승(神僧) 도증(道證)이 세운 곳으로

과거에 우리 태종대왕(太宗大王)(무열왕(武烈王)을 말함)께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진 것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해(四海)가 괴로워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셔서 ?) 삼한(三韓)에서 전쟁을 그치게 하고 통일을 달성하신 때에

▨▨▨ (부처?)의 ▨을 입어 ▨▨의 재앙을 영원히 없앴다고 하여 특별히 이 산을 표창하여 으뜸되는 공이 있음을 드러내었다. ....

출처:<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참고로 오늘날 삼국통일 이라는 용어가 북한에서는 남북국시대로 정책적으로 1960년대 이후로 사용되어

온것으로 알고 있으며 대한민국은 삼국통일과 남북국시대를 혼용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이해관계를 떠나 역사 학계가 보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하여 일반인들이 혼란스러워 하거나

또는 이러한 문제에 우리자체의 역사인식에 분열된 모습으로는 결코 바람직 하지 않기에 역사학계가 분명한 길잡이가 되어

삼국통일을 사용해도 무방하다든지? 아니면 절대로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든지?의 합리적인 내부 역사 인식통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되어 올려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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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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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미주가효 | 작성시간 07.03.29 ?? 마지막 토론이라 함은 무슨 의미신지요?
  • 작성자百濟 牟大王 | 작성시간 07.03.28 일제가 편찬한 조선사에서 삼국통일이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가장 먼저 사용되었고, 일제는 한민족의 역사를 한반도의 역사로 한정하기 위해 그 의미를 강조했으며 이것은 해방 후 남한 학계에서 그대로 답습되었습니다. 기본적인 사실 확인에 대한 문제이므로 긴 이야기는 않겠습니다. 경주에 있는 김유신동상을 누가 언제 왜 어떻게 세웠는지 김춘추와 김유신이 언제부터 누구에 의해서 '삼국통일의 영웅'으로 오바스럽게 떠받들어지기 시작했는지 한번 알아나 보시고 이야기를 하시는 게 도리에 합당하다고 생각됩니다.
  • 작성자소호금천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7.03.28 그냥 삼국사기, 삼국유사,화랑세기, 삼국사절요, 김유신장군 유허비문, 삼국사절요, 동국통감등 이런 정도의 자료를 다시 읽어보십시요. 죄다 일제 이전이며 박정희 정권 이전의 자료들이니 님에게 달리 설명할 필요도 없네요.
  • 작성자소호금천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7.03.29 아무리 보아도 현대정권문제가 대두됨으로써 본문에서 요구하는 토론이 아닌 길로 조금 깊숙히 빠져 들었군요..百濟 牟大王 님 그리고 조조님 서로 견해가 다른것을 먼저 이해 못한 제가 많이 실례를 했군요. 혹시라도 마음 상하셨다면 널리 이해해 주시고 저도 다음 부터는 이런 감정이 개입되는 문답은 최대한 억제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그럼 두분께 건필을 부탁드리며 다음 부터는 좋은 만남의 장이 되도록 합시다!
  • 작성자밀리바닐리 | 작성시간 07.04.07 소호금천씨님이 간과하고 있는 점이 있는데,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일본서기 같은 사료에 나와있는 "삼한통일"이라는 표현은 그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가 기록한 내용이나 그 내용을 기사적으로 전한 내용을 찾아서 기록한 것일 뿐입니다. 국내외에 흩어져 있던 기록들을 발췌하여 집대성한 책들이란 말입니다. 신라를 미화하려 애쓰는 분들 보면 유독 신라에 관해서 만큼은 합리적 사고를 꺼리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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