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과 부여
삼국유사
1. 단군기에서는 "임금이 서하(西河) 하백의 딸과 가까이하여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라 하였다."라고 말한다. 이 기록을 근거해 보면, 해모수가 하백의 딸과 몰래 통한 다음 주몽을 낳았으니, 단군기에서.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로 하였다."라는 기록과 비교해보면, 부루가 주몽은 다른 형제이다.
2. 제1대 동명왕은 갑신년에 즉위해 18년 동안 다스렸다. 성은 고씨이고, 이름은 주몽이다. 추몽이라고 된 곳도 있다. 단군의 아들이다.(개인적으로 부여의 시조 동명왕과 고구려의 시조 추모성왕을 섞으 놓은 듯합니다.)
조선세기
환웅은 천신 환인의 서자인데, 태백의 산의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왔다. {태백산은 영변부 동쪽 백리 압록 원(?)그 북이며, 평양은 그 남쪽이다. 요양과 대막 사이에 장백부로 나누어지는데 산에는 仙과 佛의 옛 유적이 많고, 향나무가 많이 생산되므로 이름을 지었다. - 이 부분 해석이 조금 어렵습니다}
사람으로 모습을 바꾸어 아들을 낳으니, 박달나무 아래에서 낳은 것으로 인해서 아이를 단군이라고 했다. 단군의 이름은 검이며, 나면서부터 신령스럽고 총명하여 아홉 오랑캐의 임금이 되었다. 그 자식이 해부루인데, 우임금이 도산에서 제후들과 만날 때에 부루를 보내어 만나게 했다. {후에 북부여 왕의 봉했는데, 그 왕실 가운데 대소가 고구려에게 멸망한바 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
世宗 地理志 / 平安道/ 평양부(平壤府)
《檀君古記》 云: 上帝 桓因 有庶子, 名 雄 , 意欲下化人間, 受天三印, 降 太白山 神檀樹下, 是爲 檀雄 天王 。 令孫女飮藥成人身, 與檀樹神婚而生男, 名 檀君 , 立國號曰 朝鮮 。 朝鮮 、 尸羅 、 高禮 、南北 沃沮 、東北 扶餘 、 濊 與 貊 , 皆 檀君 之理。 檀君 聘娶 非西岬 河伯之女生子, 曰 夫婁 , 是謂 東扶餘 王。 檀君 與 唐堯 同日而立, 至 禹 會 塗山 , 遣太子 夫婁 朝焉。 享國一千三十八年, 至 殷武丁 八年乙未, 入 阿斯達 爲神, 今 文化縣 ^ 九月山 。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이르기를, “상제 환인(上帝桓因)이 서자(庶子)가 있으니, 이름이 웅(雄)인데, 세상에 내려가서 사람이 되고자 하여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아 가지고 태백산(太白山)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강림하였으니, 이가 곧 단웅천왕(檀雄天王)이 되었다. 손녀(孫女)로 하여금 약(藥)을 마시고 인신(人身)이 되게 하여, 단수(檀樹)의 신(神)과 더불어 혼인해서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단군(檀君)이다.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니, 조선(朝鮮),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옥저(南北沃沮), 동·북부여(東北扶餘), 예(濊)와 맥(貊)이 모두 단군의 다스림이 되었다. 단군이 비서갑 하백(非西岬河伯)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부루(夫婁)이다. 이를 곧 동부여 왕(東扶餘王)이라고 이른다. 단군이 당요(唐堯)와 더불어 같은 날에 임금이 되고, 우(禹)가 도산(塗山)의 모임을 당하여, 태자(太子) 부루(夫婁)를 보내어 조회하게 하였다. 나라를 누린 지 1천 38년 만인 은(殷)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에 아사달(阿斯達)에 들어가 신(神)이 되니, 지금의 문화현(文化縣) 구월산(九月山)이다."-
동사강목
부여국(扶餘國)은 현도(玄?) 북쪽 천리에 있었다. 그 선대는 알 수 없는데, 혹 “단군의 후손이 북쪽으로 옮겨 부여국이라 하고, 해(解)로 성(姓)을 삼았다.”고도 한다. 처음에 그 왕 해모수(解慕漱)가 스스로 천제(天帝)의 아들이라 일컬었고, 또 단군(檀君)이라 불렀으며, 아들 부루(夫婁)를 낳았다.
<청장관전서> 제58권 앙엽기5
제1 상 임술년 마한 //《해동운옥(海東韻玉)》(권문해(權文海)가 지었다)에 인용된 글에, (인용한 서명(書名)은 기록되지 않았다) "아란불은 단군(檀君)의 아들 부루(夫婁)의 신하이다. 부루의 아들 금와(金蛙)가 가섭원(迦葉原)에 도읍하여 국호(國號)를 동부여(東夫餘)라 했다."
고조선과 삼국
제왕운기
시라(尸羅; 신라), 고례(高禮; 고구려), 남북옥저(南北沃沮), 동북부여(東北夫餘), 예(濊), 맥(貊), 응(膺: 백제)이 있는데, 이들 나라의 여러 임금이 누구의 후손인가를 묻는다면 세계(世系)는 역시 단군에서부터 이어져 왔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조선(朝鮮)의 유민(遺民)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뉘어 살며 6촌(六村)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이고, 둘째는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 진지촌(珍支村) (혹은 간진촌(干珍村)이라고도 하였다.) 넷째는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여섯째는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인데, 이것이 진한(辰韓) 6부(六部)가 되었다. 고허촌의 우두머리 소벌공(蘇伐公)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 옆의 숲 사이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앉아 울고 있었으므로 가서 보니 문득 말은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만 있었다. 그것을 쪼개니 어린아이가 나왔으므로 거두어서 길렀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1. 여름 6월에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 오므로 그 땅을 다물도(多勿都)로 삼고 송양을 봉하여 우두머리로 삼았다. 고구려 말에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을 다물이라 하였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2. 왕이 환도성이 난리를 치러 다시 도읍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종묘사직을 거기로 옮겼다. 평양은 본시 선인 왕검의 택지였다. 혹은 왕험이라 하였다.
3. 보장왕을 요동주도독을 삼고 조선왕에 봉하여 요동에 돌려보내서 남은 무리를 안집케 하였으며,(후략)
*보장태왕의 후손들도 조선왕에 봉해집니다.
부여와 삼국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1.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은 성이 고씨(高氏)이고 이름이 주몽(朱蒙) <추모(鄒牟) 또는 중해(衆解)라고도 하였다.>이다. 앞서 부여(扶餘)의 왕 해부루(解夫婁)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제사를 드려 대를 이을 자식을 구하였는데 그가 탄 말이 곤연(鯤淵)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 서로 마주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은 이상히 여겨 사람을 시켜서 그 돌을 옮기니 어린 아이가 있었는데 금색의 개구리[蛙] <개구리는 또는 달팽이[蝸]라고도 한다.> 모양이었다. 왕은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하늘이 나에게 자식을 준 것이다.” 하고는 거두어 길렀는데, 이름을 금와(金蛙)라 하였다. 그가 장성하자 태자로 삼았다. 후에 재상 아란불(阿蘭弗)이 말하였다.
“일전에 하느님이 내게 내려와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니 너희는 피하거라. 동쪽 바닷가에 가섭원(迦葉原)이라는 땅이 있는데, 토양이 비옥하여 오곡(五穀)이 잘 자라니 도읍할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아란불이 마침내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나라 이름을 동부여(東扶餘)라고 하였다. 옛 도읍지에는 어디로부터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와서 도읍하였다. 해부루가 죽자 금와는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 때에 태백산(太白山) 남쪽 우발수(優渤水)에서 한 여자를 발견하고 물으니 [그 여자가] 대답하였다.
“나는 하백(河伯)의 딸이며 이름이 유화(柳花)입니다. 여러 동생과 나가 노는데 그 때에 한 남자가 스스로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고 나를 웅심산(熊心山) 아래 압록수(鴨淥水) 가의 집으로 꾀어서 사통하고 곧바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는 내가 중매없이 남을 좇았다고 책망하여 마침내 우발수에서 귀양살이 하게 하였습니다.”
금와는 이상하게 여겨서 방 안에 가두어 두었는데, 햇빛에 비취어 [유화는] 몸을 당겨 피하였으나 햇빛이 또 좇아와 비쳤다. 그래서 임신을 하여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 되쯤 되었다. 왕[금와]은 알을 버려 개,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다. 또 길 가운데에 버렸으나 소나 말이 피하였다. 후에 들판에 버렸더니 새가 날개로 덮어 주었다. 왕은 [알을] 쪼개려고 하였으나 깨뜨리지 못하고 마침내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었다. 그 어머니가 물건으로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사내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골격과 외모가 빼어나고 기이하였다. 나이가 겨우 일곱 살이었을 때에 남달리 뛰어나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면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속어에 활 잘 쏘는 것을 주몽(朱蒙)이라고 하였으므로 이것으로 이름을 삼았다.
2. 2월에 부여왕과 처자가 나라를 들어 항복하여 왔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1. 백제(百濟)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은 그 아버지는 추모(鄒牟)인데 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하였다. [주몽은] 북부여(北扶餘)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부여 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셋이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중략)
시조 비류왕(沸流王)은 그 아버지는 우태(優台)로 북부여 왕(北夫餘王)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이었고, 어머니는 소서노(召西奴)로 졸본(卒本) 사람 연타발(延陀勃)의 딸이었다. [소서노는]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맏은 비류라 하였고 둘째는 온조라 하였다.
2. 신은 고구려와 더불어 근원이 부여(夫餘)에서 나왔습니다.
3.16년(538) 봄에 서울[都]을 사비(泗沘)<다른 이름은 소부리(所夫里)였다.>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하였다.
태백일사/고구려본기
사로(신라의 옛 이름)의 시조(박혁거세거서간)는 선도산의 성모의 아들이다. 옛날 부여제실의 딸 파소가 있었는데, 남편없이 아이를 뱄으므로 사람들의 의심을 받아 눈수로부터 도망쳐 동옥저에 이르렀다. 또 배를 타고 남하하여 진한의 나을촌에 와 닿았다. 때에 소벌도리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가서 집에 데려다 거두어길렀다. 나이 13세에 이르자 지혜는 빼어나고 숙성하며 성덕이 있는 지라, 진한 6부의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여 거서간이 되니 도읍을 서라벌에 세우고 나라를 진한으로 하고 또한 사로라고도 하였다.
성호사설
《삼국사(三國史)》에 《북사(北史)》의 말을 인용했는데, “고구려에는 신사(神祠)가 둘이 있었다. 첫째는 부여신(扶餘神)인데 이는 나무를 깎아 부인상(婦人像)으로 만들었고, 둘째는 고등신(高登神)인데 이는 시조 부여신의 아들로서 대개 하백(河伯)의 딸과 주몽(朱蒙)이다.” 하였다. 또 “정화(政和) 무렵에 송(宋) 나라로 들어가 우신관(佑神館)에 나아가서 한 여선상(女仙像)을 보았다. 관반학사(館伴學士) 왕보(王黼)가 이르기를, ‘이는 귀국(貴國)의 신인데 알겠습니까? 옛날 제실(帝室)의 딸이 있었는데 남편이 없이 아기를 배자 남에게 의심을 받고 바다로 떠서 도망을 쳐서 얼마 후 진한(辰韓)에 이르러 아들을 낳았는데, 이가 해동(海東)의 시주(始主)가 되었답니다. 제(帝)의 딸은 지선(地仙)이 되어 선도산(仙桃山)에 있었는데 이것이 그의 초상(肖像)이랍니다.’ 했다.” 하였다.
또 대송(大宋) 신사(信使) 왕양(王襄)이 동해성모(東海聖母)에게 드린 제문(祭文)을 보니, “어진 사람을 배어 나라를 처음 세웠다.” 하는 글귀가 있으므로 이 동신(東神)이 바로 선도산 신성(仙桃山神聖)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두 말이 서로 비슷하니 우리나라에 어찌 이런 두 여선(女仙)이 있어 시조로 되었던 것일까?
이는 반드시 전하는 말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이미 믿을 수 없는 허황한 말로 되었는데 저 상국(上國)까지 전해져서 그를 높여 제사까지 지내게 되었으니 웃을 만한 일이 이와 같다.
삼국유사/선도성모 수희불사
진평왕(眞平王) 때 지혜(智惠)라는 비구니(比丘尼)가 있어 어진 행실이 많았다. 안흥사(安興寺)에 살았는데 새로 불전(佛殿)을 수리하려 했지만 힘이 모자랐다. 어느날 꿈에 모양이 아름답고 구슬로 머리를 장식한 한 선녀가 와서 그를 위로해 말했다. "나는 바로 선도산(仙桃山) 신모(神母)인데 네게 불전을 수리하려 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여 금 10근을 주어 돕고자 한다. 내가 있는 자리 밑에서 금을 꺼내서 주존(主尊) 삼상(三像)을 장식하고 벽 위에는 오삼불(五三佛) 육류성중(六類聖衆) 및 모든 천신(天神)과 오악(五岳)의 신군(神君; 신라 때의 오악五岳은 東의 토함산吐含山, 南의 지리산智異山, 西의 계룡산鷄龍山, 北의 태백산太伯山, 중앙中央의 부악父岳, 또는 공산公山이다)을 그리고, 해마다 봄과 가을의 10일에 남녀 신도들을 많이 모아 널리 모든 함령(含靈)을 위해서 점찰법회(占擦法會)를 베푸는 것으로써 일정한 규정을 삼도록 하라(본조本朝 굴암지屈弗池의 용이 황제皇帝의 꿈에 나타나 영취산靈鷲山에 낙사도장樂師道場을 영구히 열어 바닷길이 편안할 것을 청한 일이 있는데 그 일도 역시 이와 같다).
지혜가 놀라 꿈에서 깨어 무리들을 데리고 신사(神祀) 자리 밑에 가서, 황금 160냥을 파내어 불전 수리하는 일을 완성했으니, 이는 모두 신모(神母)가 시키는 대로 따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 사적은 남아 있지만 법사(法事)는 폐지되었다. 신모는 본래 중국 제실(帝室)의 딸이며, 이름은 사소(娑蘇)였다. 일찍이 신선의 술법(術法)을 배워 해동(海東)에 와서 머물러 오랫동안 돌아 가지 않았다. 이에 부황(父皇)이 소리개 발에 매달아 그에게 보낸 편지에 말했다. "소리개가 머무는 곳에 집을 지으라." 사소는 편지를 보고 소리개를 놓아 보내니, 이 선도산(仙桃山)으로 날아와서 멈추므로 드디어 거기에 살아 지선(地仙)이 되었다. 때문에 산 이름은 서연산(西鳶山)이라고 했다. 신모는 오랫동안 이 산에서 살면서 나라를 진호(鎭護)하니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매우 많았다. 때문에 나라가 세워진 뒤로 항상 삼사(三祀)의 하나로 삼았고, 그 차례도 여러 망(望)의 위에 있었다.
제 54대 경명왕(景明王)이 매사냥을 좋아하여 일찍이 여기에 올라가서 매를 놓았다가 잃어버렸다. 이 일로 해서 신모에게 기도했다. "만일 매를 찾게 된다면 마땅히 성모(聖母)께 작(爵)을 봉해 드리겠습니다." 이윽고 매가 날아와서 책상 위에 앉으므로 성모를 대왕(大王)에 봉작(封爵)하였다. 그가 처음 신한(辰韓)에 와서 성자(聖子)를 낳아 동국(東國)의 처음 임금이 되었으니 필경 혁거세(赫居世)와 알영(閼英)의 두 성군(聖君)을 낳았을 것이다. 때문에 계룡(鷄龍)ㆍ계림(鷄林)ㆍ백마(白馬) 등으로 일컬으니 이는 닭이 서쪽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성모는 일찍이 제천(諸天)의 선녀에게 비단을 짜게 해서 붉은빛으로 물들여 조복(朝服)을 만들어 남편에게 주었으니, 나라 사람들은 이 때문에 비로소 신비스러운 영험을 알게 되었다.
또 <국사(國史)>에 보면, 사신(史臣)이 말했다. "김부식(金富軾)이 정화(政和) 연간에 일찍이 사신으로 송나라에 들어가 우신관(佑神館)에 나갔더니 한 당(堂)에 여선(女仙)의 상(像)이 모셔져 있었다. 관반학사(館伴學士) 왕보(王보)가 말하기를, '이것은 귀국의 신인데 공은 알고 있습니까' 했다. 그리고 이어 말하기를, '옛날에 어떤 중국 제실(帝室)의 딸이 바다를 건너 진한(辰韓)으로 가서 아들을 낳았더니 그가 해동의 시조가 되었고, 또 그 여인은 지선(地仙)이 되어 길이 선도산(仙桃山)에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여인의 상입니다. 했다."
또 송나라 사신 왕양(王襄)이 우리 조정에 와서 동신성모(東神聖母)를 제사지낼 때에 그 제문에, "어진 사람을 낳아 비로소 나라를 세웠다."는 글귀가 있었다. 성모가 이제 황금을 주어 부처를 받들게 하고, 중생을 위해서 향화법회(香火法會)를 열어 진량(津梁)을 만들었으니 어찌 다만 오래 사는 술법(術法)만 배워서 저 아득한 속에만 사로잡힐 것이랴.
→ 환단고기에서는 선도산 성모를 부여 제실의 딸이라 하였고 환단고기를 제외한 여타 사서에서는 선도산 성모 사소(혹은 파소)부인을 중국 제실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속단할 수는 없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선도산 성모 사소부인은 환단고기에 기록된 것에 따라 부여제실의 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환단고기를 제외한 여타 사서에서 선도산 성모가 중국 제실로 기록되어 있는 까닭은 신라왕실에서 국제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 왕실세계를 고려왕실 처럼 중국(당)과 연계되있는 것으로 위조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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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늘 처음처럼 작성시간 08.08.10 잘 읽었습니다. 정리가 아주 잘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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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sorgai 작성시간 08.08.11 정리가 잘 되었습니다. 삼한 이전의 고대의 우리 역사가 중국대륙와 관련이 깊다는 건 출토유물로서도 입증할 수 있습니다. 문헌만 보아도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의 고대나라가 삼황오제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도 역시 이의 반증입니다. 중화사상이 아니라, 고대의 중화는 한국의 선조, 즉 고조선의 선조들의 이름이니까요. 참고로 순임금의 이름이 '중화'였습니다. 물론 문헌과 유물기록에서의 글자에는 차이가 있습니다만 의미는 동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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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sorgai 작성시간 08.08.14 먼저 단군의 성격부터 확정지어야 할 겁니다. 단군이 인칭인지, 혹은 왕의 다른 호칭인지부터 확실하지 않습니다. 만약 인칭이라면 단군은 고조선이 존재하던 시대에 있을 수 없는 글자나 인칭입니다. 또한 통치자의 다른 호칭이라면 문헌에 등장하는 기록들은 확인되었으나 고대 유물에서 단군이라는 기록은 전무하니 이 또한 믿을 수 없는 겁니다. 따라서 부여의 건국자는 단군의 아들이 아니라, 부여의 후손입니다. 부여 자체가 인칭이라는 고대기록이 다수 발견되었으니까요. 여기에 관해서는 이미 어느 리플에 출전을 알려드린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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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만주는우리땅 작성시간 10.03.21 좋은자료 잘 보았습니다. 저도 자료 가져갈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