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가야 김씨에 대한 투후 김일제 시조설에 대해서는 전부터 논쟁이 되어 왔기에 진부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학부 수업으로 중국 고대사 강의를 들으면서 생각했던 것에 대해 간단하게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신라 김씨의 조상이 누구나는 문제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많은 분들이 투후 김일제 하면 흉노계라는 점을 먼저 떠올리십니다. 김일제가 흉노 5대 이치사 선우의 휘하에 있던 휴도왕의 아들이기 때문이겠지요.
잠깐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그 시기가 한 무제 때였는데 외척 곽거병 등이 흉노와의 전쟁에서 한창 성과를 내고 있었습니다. 즉 그가 휴도왕을 죽이고 포로들을 잡은 것이죠. 이때 김일제와 김윤 형제도 같이 잡혀 왔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여파로 휴도왕과 함께 있던 혼사왕이 선우의 책망을 받을 것이 두려워서 자기의 영지를 모두 한나라에 바쳤으니, 이것이 바로 하서주랑 4군(무위, 장액, 주천, 돈황)의 시작입니다.
일단 김일제가 포로로 잡혀 온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가 '북방 문화를 전수한' 신라 김씨의 선조일 가능성이 낮다는 이야기를 예전에 했었습니다.
한데 여기에 하나의 문제를 더해봅니다. 김일제, 김윤 형제가 포로로 이끌려온 뒤, 이들은 무제의 총애를 받아 투후라는 높은 관직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김일제 가문은 대대로 투후를 역임했다고 하는데, 잘 알려진 바처럼 이들은 왕망 집안과 외척 관계라 신나라의 건국에도 참여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라 시조 김일제설(가야 시조까지 겸해서 부르는 경우도 있음)을 주장하시는 분들에 따르면, 신 제국이 멸망하면서 김일제 가문도 망명을 하여 한반도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신 제국에 참여한 사람들인 만큼, 신 제국이 중요한 문제가 되겠지요.
제가 중국 고대사 시간에 신 제국에 대한 강의를 들었을 때, 과연 신라 시조 김일제설을 주장하시는 분들이 신 제국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실지 궁금해지더군요. 신나라의 건국에 대해 아시는 분들도 있겠습니다만, 왕망은 유학자 출신입니다. 왕씨 집안이 한 황실의 외척이었기에 그가 권력을 잡는데 기반이 되기는 했지만, 사실 왕망은 어려서 불우하게 자랐기에 그가 집안에서 신임을 받았던 것도 '유학자라는 점'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전한 후기는 왕망 뿐만이 아니라 많은 유학자들이 정계에 진출하여 점차 유교가 사회의 지배적 이념으로 자리잡아가던 상황입니다. 그 속에서 '선양'이라는 형식을 겉으로 고수하면서 즉위한 왕망은 사회 전반에 대해 유교에 입각한 개혁을 실시합니다. 그 가운데 예제 개혁 같은 경우는 유교적 세계관에 근거한 것으로 굉장히 복잡합니다. 신나라가 멸망한 가장 큰 이유도 유교에 입각한 국제질서(당연히 중화사상에 입각한 명분론적 질서)를 세우려다 흉노를 비롯한 주변국들과 심각한 마찰을 빚은데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당연히 아시다시피 이 때 고구려도 신나라와 마찰이 있었지요.
개혁 하나 하나를 유교 경전에 근거하여 실시한 왕망 정권에서 김일제 후손들이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저것이 사회 지배적 현상임을 고려하면 그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과연 이들이 신라, 가야 김씨의 조상이 될 수 있을까요?
속된 말로 유교에 '찌든' 사람들이 신라 김씨의 조상, 그것도 북방 문화를 전수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신라 중대의 인물들 중에 김일제 시조 인식을 가진 경우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생각이자 관념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해야지, 그것이 정말 사실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작 김일제를 시조로 주장하면서, 그들의 행적에 대해서 자세히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일까요?
많은 분들이 투후 김일제 하면 흉노계라는 점을 먼저 떠올리십니다. 김일제가 흉노 5대 이치사 선우의 휘하에 있던 휴도왕의 아들이기 때문이겠지요.
잠깐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그 시기가 한 무제 때였는데 외척 곽거병 등이 흉노와의 전쟁에서 한창 성과를 내고 있었습니다. 즉 그가 휴도왕을 죽이고 포로들을 잡은 것이죠. 이때 김일제와 김윤 형제도 같이 잡혀 왔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여파로 휴도왕과 함께 있던 혼사왕이 선우의 책망을 받을 것이 두려워서 자기의 영지를 모두 한나라에 바쳤으니, 이것이 바로 하서주랑 4군(무위, 장액, 주천, 돈황)의 시작입니다.
일단 김일제가 포로로 잡혀 온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가 '북방 문화를 전수한' 신라 김씨의 선조일 가능성이 낮다는 이야기를 예전에 했었습니다.
한데 여기에 하나의 문제를 더해봅니다. 김일제, 김윤 형제가 포로로 이끌려온 뒤, 이들은 무제의 총애를 받아 투후라는 높은 관직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김일제 가문은 대대로 투후를 역임했다고 하는데, 잘 알려진 바처럼 이들은 왕망 집안과 외척 관계라 신나라의 건국에도 참여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라 시조 김일제설(가야 시조까지 겸해서 부르는 경우도 있음)을 주장하시는 분들에 따르면, 신 제국이 멸망하면서 김일제 가문도 망명을 하여 한반도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신 제국에 참여한 사람들인 만큼, 신 제국이 중요한 문제가 되겠지요.
제가 중국 고대사 시간에 신 제국에 대한 강의를 들었을 때, 과연 신라 시조 김일제설을 주장하시는 분들이 신 제국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실지 궁금해지더군요. 신나라의 건국에 대해 아시는 분들도 있겠습니다만, 왕망은 유학자 출신입니다. 왕씨 집안이 한 황실의 외척이었기에 그가 권력을 잡는데 기반이 되기는 했지만, 사실 왕망은 어려서 불우하게 자랐기에 그가 집안에서 신임을 받았던 것도 '유학자라는 점'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전한 후기는 왕망 뿐만이 아니라 많은 유학자들이 정계에 진출하여 점차 유교가 사회의 지배적 이념으로 자리잡아가던 상황입니다. 그 속에서 '선양'이라는 형식을 겉으로 고수하면서 즉위한 왕망은 사회 전반에 대해 유교에 입각한 개혁을 실시합니다. 그 가운데 예제 개혁 같은 경우는 유교적 세계관에 근거한 것으로 굉장히 복잡합니다. 신나라가 멸망한 가장 큰 이유도 유교에 입각한 국제질서(당연히 중화사상에 입각한 명분론적 질서)를 세우려다 흉노를 비롯한 주변국들과 심각한 마찰을 빚은데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당연히 아시다시피 이 때 고구려도 신나라와 마찰이 있었지요.
개혁 하나 하나를 유교 경전에 근거하여 실시한 왕망 정권에서 김일제 후손들이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저것이 사회 지배적 현상임을 고려하면 그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과연 이들이 신라, 가야 김씨의 조상이 될 수 있을까요?
속된 말로 유교에 '찌든' 사람들이 신라 김씨의 조상, 그것도 북방 문화를 전수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신라 중대의 인물들 중에 김일제 시조 인식을 가진 경우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생각이자 관념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해야지, 그것이 정말 사실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작 김일제를 시조로 주장하면서, 그들의 행적에 대해서 자세히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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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구산(九山) 작성시간 09.06.27 기다리고 있는데 아직까지도 본론은 싹이 보이지를 않네요. 좀더 구체적으로 옮기셔야 되겠습니다. 우선 파경진(派鯨津)이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를 밝혀내는 문제를 올려서 밝혀보는것입니다. 이 문제를 다 풀고나면 베일에 가렸던 한국의 고대사가 많이 밝아질것입니다. 우선 한문제씩 올려서 심도있게 다뤄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까지 알려진 파경진(派鯨津)은 잘못된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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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sorgai 작성시간 09.06.27 구산님의 지적처럼 '파경진'의 의미를 아직은 충분히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경진의 의미가 보다 확실해지면 이 땅의 신라건국이 명확해지겠죠. 하지만 지금까지의 파경진이 잘못해석되었다고 단정짓는 것은 성급한 면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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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정성일 작성시간 09.06.29 문무왕릉 비문의 다른 내용은 접어두고, 가장 주목되는 7단계의 출자 부분은 이렇다. ① 화관지후(火官之后) ② 진백(秦伯) ③ 파경진씨(派鯨津氏) ④ 투후(秺侯) ⑤ 가주몽(駕朱蒙) ⑥ 성한왕(星漢王) ⑦ 문무왕(文武王)인데 이 중에서 5번에 관하여 설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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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정성일 작성시간 09.06.29 문무왕릉비 전문및 해석 “3행 (중략) 接黃龍駕朱蒙 <3행>황룡을 맞아 주몽(朱蒙)을 태우고,”는 광개토대왕릉비문 제1면 3행-제1면 4행 焉不樂世位因遣黃龍來下迎王王於忽本東岡黃龍負昇天 추모왕은 인간세상의 왕위에 있는 것을 즐겨하지 않으므로 하늘에서 황룡을 내려 보내 왕을 맞이하였다. 그래서 왕은 홀본 동쪽 언덕에서 황룡에 업혀 하늘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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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sorgai 작성시간 09.06.29 황룡은 전한 선제의 연호일 수도 있고, 지명일 수도 있습니다. 또 '駕'는 태운다는 뜻도 있지만, '부린다/통제한다/다스린다'는 뜻도 있습니다. 결국 역사내용과 문맥을 고려해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