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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야토론방

김춘추는 아들 김법민에게 암살당했다.

작성자백제사랑|작성시간09.12.11|조회수1,984 목록 댓글 40

661년 6월에 대관사(大官寺)의 우물 물이 피가 되었고, 금마군(金馬郡) 땅에 피가
흘러 그 넓이가 다섯 보(步)가 되었다. 왕이 죽었다. 시호를
무열(武烈)이라 하고, 영경사(永敬寺)의 북쪽에 장사지냈으며
묘호(廟號)를 올려 태종(太宗)이라 하였다. 

 

다음은 김춘추의 죽음에 대한 기록입니다. 통상 죽음 앞에 용의 출현이나 피와 호랑이 같은 내용이 나오는 사례는 매우 많습니다.

무언가 은유적인 표현으로 어떠한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일종의 힌트만을 남겨놓아 추리할 여지를 남겨둔것 같이요. 저는 삼국사기에 김춘추의 죽음은 정상적인 죽음이 아니라 대관사에서 백제 멸망에 전사한 신라장수들의 넋을 위로하던중 일어난 암살이며, 그 배후세력은 고구려나 백제가 아닌 아들 김법민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증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다음은 김법민이 왕에 즉위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입니다.

원년(661) 6월에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하던 인문(仁問)과 유돈(儒敦)
등이 돌아와 왕에게 고하였다.
황제께서 이미 소정방을 보내 수군과 육군 35도(道)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고, 마침내 왕께 명하여 군사를 일으켜 서로 응원하라고 하였습니다.
[왕께서] 비록 상복을 입고 있는 중이지만 무거운 황제의 칙명을 어기기는
어렵습니다.

 

사실상, 김법민의 일생일대에 왕의 자리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인물은 동생 김인문입니다.

 실제로 당나라에서는 김법민 보다는 당나라에서 오래 생활해온 김인문을 매우 총애하고

훗날 나당전쟁때는 김인문을 신라왕위에 앉혀서 신라전쟁에 활용하기도 하였을 정도입니다.

 

아마, 김춘추가 죽기직전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멸망직후 부터 태자자리에 있던 김법민의

정통성 확보보다는 오히려 김인문을 신라 왕위에 올려 내분을 노릴 계획을 해왔을 것입니다.

그게 가장 효과적인 내부분열을 노리는 방법이기도 하였고요. 손쉽게 신라를 차지할수 있었던

카드를 보유한 것입니다.

 

중요한것은 김춘추가 죽고 나서 그 시점에 김인문이 당나라에서 복귀하였다는 것입니다.

김인문의 세력들이 힘을 키워 자신의 왕위즉위에 걸림돌이 되기 전에 김법민은 아버지 김춘추를

죽여놓아야 했던게 아닐까요???

 

또한, 고구려나 백제가 김춘추를 암살했을것이라는 주장도 간혹 나오는대요. 그 점에 대해선

백제 분서왕의 경우처럼 낙랑 자객에게 암살당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이를 통해 볼때

제 아무리 신라라고 하고, 역사가 승자의 편이라고 하더라도, 신라 외부의 적이 김춘추를

암살했다면 필시 그 기록을 남겼을 것이며, 그에 대한 책임도 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내용이 없었으며 고구려는 그당시 북한산성 공략에 심혈을 기울였을 시기라

오히려 백제쪽이 그당시 접경지역이었던 익산 주위에서 암살시도를 했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이나, 만약 백제가 김춘추 암살을 시도했다 한다면, 오히려 그 혼란을 틈타

총공세를 해야 하나 반대입니다. 오히려 김춘추가 죽고 나서 백제는 신라군의 총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패배하고 말죠.

 

또한, 김법민이어야만 충분히 아버지를 암살하고도 그 기록을 은폐할수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가 정말 아버지를 암살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긴다면 그당시 병권을 쥐고 있었던

김유신이나 김춘추와 동고동락한 수많은 사람들의 반란에 휩싸였겠죠. 그래서 김법민은

다른 사람 몰래 아주 은밀히 김춘추를 제거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더더욱 수상한 점은 김법민의 즉위 이후 행보입니다. 보통 즉위직후, 왕이 타국을 침범하는 것은 내부의 결속력을 강화하기위해서이죠. 아무래도 이시기 김법민은 김춘추의 죽음이 뭔가 꺼림직한 내부의 분위기를

외부로 돌리고자 이러한 정벌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것도 아무리 당나라의 요구가 있다 하더라도

왕이 죽은지 겨우 한달밖에 안된 시점에서말이죠.

 

또한, 김춘추 즉위 때와는 다르게 김법민 즉위시기엔 반란이 잦습니다.

박도유의 반란이나, 수세의 반란, 대토의 반란등 매우 잦았습니다. 물론 이러한 인물들은 모두

백제나 당나라의 개입으로 인한 반란이었지만, 그만큼 김법민에게 불만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특히나 김법민은 김진주,진흠이 백제부흥운동 진압에 병을 핑계로 출진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일족이 죽임을 당합니다. 물론 전쟁시에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죽게되는것은 당연하지만

반란을 일으킨 대토같은 인물도 가족들은 천인신분으로 강등시켰다고 한 점에서 볼때

반란만큼 큰잘못도 아니며, 설령 죽임을 당하더라도 일족을 전부 제거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김법민에게 있어 김인문 일파의 제거 구실로써 이들과 일족을 전부 제거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김법민의 이러한 행보는 점점 김인문을 압박하였을 것이고 결국 그는 당나라라는 타국의 땅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죠. 여러모로 김인문에게 있어 신라내부에 정치적 입지가 약화된 것에는

김법민의 이러한 행동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나라가

김인문을 신라왕위에 책봉하고 전쟁을 일으켰음에도 당나라의 예상보다 반란이나 내분이

효과적으로 먹히지도 않았던 것이고요.

 

사료의 부족으로 김춘추의 죽음의 이유는 어디까지나 추론일 뿐, 진실은 알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느 왕의 죽음 앞에 용이나, 피 같은 불경한 내용이 개입된 경우처럼 은유적으로나마

왕의 죽음뒤엔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고 알리기 위한 왕을 죽인자들의 최소한의 양심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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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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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카오스 | 작성시간 09.12.14 3. 5)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당과 신라의 전쟁과 당나라의 양보(무려 70여년간 피말리는 전쟁을 한 뒤 결국 양자간의 합의가 이루어진 점--->만일 김춘추가 암살되었다면 {비록 결과는 조금 다르게 나타났지만,} 김춘추의 죽음이 당나라에게 최대의 이익이 되었을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임]...6) 김유신의 입장과 당나라의 시각[김유신은 어디까지나 왕이 아니고 신하이며, 가야의 후손으로서 충분한 지위를 얻었으므로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었고 당나라에서도 이 점을 간파하고 있었음. 즉, 당나라 입장에서 김유신을 자신들의 전략상 최대걸림돌로 보지 않았음(정태수의 머슴론?)--> 이는 흑치상지의 예에서 볼 수 있음]...이상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소호금천씨 | 작성시간 09.12.14 김춘추와 이세민의 밀약이라 그게 가능할까요?..청병하러 사신단을 꾸려 갔었는데 어떤식으로든 가부간의 답변은 받아 왔다고 보고 진덕여왕에게 보고를 햇었겠지요 특히 김유신에게는 더욱 논의될 문제이구요..이런 맥락에서는 이세민과 김춘추의 둘만의 밀약은 희박할 수 밖에 없다고 보입니다. 또한 김춘추의 외부세력에 대한 암살이라면 특히 당나라라고 추정이 되면 나당전쟁시에 이와 같은 좋은 명분을 신라가 절대로 활용하지 않았을리가 없겠지요..아마도 친당파의 대거 숙청시 이문제도 거론 되어 무슨 낌새라도 사료이든 구전이든 전해져 내려오겠지요
  • 답댓글 작성자소호금천씨 | 작성시간 09.12.14 그리고 당나라가 김유신을 무시하지 못했다는 근거는 제휴국 왕에 해당하는 1급 직급의 평양군 개국공이라는 작위와 식읍 그리고 이전에는 백제땅을 식읍으로 제의하는 등 또한 소정방과 당나라군대가 평양에서 김유신에게 진 빚이 만만치 않을뿐더러 김유신이 당과의 결전조차 피하지 않았을 정도로 이미 인식이 된 위험 인물인데 그를 당 조정에서 무시했다는 가정은 사료 곳곳의 정황을 보아서도 현실성이 없어 보입니다..전략상 가장 큰 걸림돌은 상대등이자 군권을 쥐다시피한 바로 김유신인데 사료의 내용을 너무 간과한 가설로 보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카오스 | 작성시간 09.12.14 당나라가 김유신을 무시했다는 것이 아니라...'김유신은 어디까지나 신하'라는 것을 당나라가 인식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즉, '정태수의 머슴론(?)'과 같은 맥락인 것이지요...그리고 '김춘추와 이세민의 밀약(당연히 '의아한 내용'일 것입니다만,)'은 훗날 역사서가 기록될 싯점에서는 모두 공개되어 밀약도 아닌 것으로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분명히 '밀약으로 취급'되었다고 보입니다...그 '밀약'의 낌새를 추측할 수 있는 것이 1) 김춘추가 당나라 국학에 수업하고..2)이세민이 지어 준 晉史와 어제시 등등일 것입니다만, 이 문제는 일단 이정도로 하겠습니다..밀약이든 공개약속이든 나당연합을 이루는 결정적인 협상은 있었던 것입니다
  • 작성자지수신 | 작성시간 09.12.25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누지 않습니다. ㅎㅎ '설마 아들이 아버지를 어찌 하겠어'라는 고정관념을 접어놓고 보면, 김법민의 왕위계승과정이 대단히 수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지요. 당시의 어수선한 정황에서는 법민이 굳이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얼마든지 '손을 빌려 줄' 자들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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