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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야토론방

신라의 왕호 마립간과 고구려

작성자귀거래사|작성시간10.12.31|조회수569 목록 댓글 2

신라의 왕호 마립간과 고구려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에서는 초대의 거서간(박혁거세), 2대의 차차웅(남해왕)을 제외하면 3대부터는 쭉 尼師今이라는 왕호를 사용해왔는데 19대 눌지왕 代에 이를 麻立干으로 바꾼 것으로 되어있다. 반면 삼국유사는 신라의 왕호가 마립간으로 바뀐 것은 17대 내물왕 代라고 했다. 어쨌든 ‘니사금’은 신라에서 15代 이상 긴 세월동안 왕의 호칭으로 사용된 대표적 우리말 왕호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임금’이라는 말도 이 니사금에서 나왔다고 한다. 신라가 ‘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22대 지증왕 代부터의 일이다.

 

하지만 신라왕을 가리키는 왕호가 또 하나 있다. 寐錦(매금)이 그것이다. 일본서기에는 신라의 5대 婆娑尼師今이 波沙寐錦으로 표기되어 있다. 또 가야의 왕이 末錦으로 되어있기도 하다(末錦은 未錦의 誤記로 봄). 매금은 또 광개토왕비문, 중원고구려비문, 지증대사비문, 봉평신라비문에도 나온다. 하지만 이 왕호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안 나온다. 그래서 사람들은 매금을 니사금과 같은 말이라고도 하고 마립간과 같은 말이라고도 한다. 나도 처음에는 音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매금=니사금으로 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매금=마립간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樓寒(루한)이라는 말에 의하여 내물왕이 마립간이라고 불렸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또 광개토왕비문에 내물왕이 매금이라고 표기되어있기 때문이다.

 

중국역사서『태평어람』에 의하면 382년에 신라왕 樓寒이 전진의 왕 부견에게 견사조공을 하고 미녀를 바쳤다고 한다. 382년의 신라왕은 내물왕이다. 당시 부견은 ‘신라가 예전 같지가 않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이 있느냐’ 라고 물었고 이에 대해 신라의 사신은 ‘중국도 시대가 변하면 이름도 변하지 않느냐’ 라고 대답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이병도박사는 樓寒의 樓를 마루, 寒을 왕을 나타내는 干이라고 보고 樓寒(내물왕)=마루간=마립간이라고 했다. 樓가 박사의 설명대로 ‘마루’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설사 ‘마루’가 아니더라도 루간과 마립간은 음이 비슷하다. 그래서 樓寒=마립간이라고 본다면 신라는 내물왕 代부터 마립간이라는 왕호를 사용한 것이 된다.

 

중원고구려비는 고구려왕을 大王이라고 한 반면 신라의 왕을 寐錦 이라고 표기했다. 그리고 둘 사이를 如兄如弟 라고 했다. 東夷寐錦이라는 표현도 있고 賜寐錦之衣服(매금의 옷을 하사한다)이라는 말도 나온다. 광개토왕비문도 신라의 내물왕을 寐錦이라고 표기했다. 그리고 391년의 광개토왕 즉위 이전부터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臣民(속국)이었다고 기술했다.

광개토왕비문에 의하면 400년 광개토왕은 步騎 5만의 대군을 신라에 보내, 왜군의 침공으로 누란의 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하고 임나가야에까지 쳐내려갔다. 이후 신라 영내에 고구려군이 주둔하는 등 신라는 고구려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고 내물왕이 죽은 후에는 실성마립간과 눌지마립간이 연이어 고구려의 승인 하에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일본학자 今西龍에 의하면 신라의 왕이 마립간이라고 불린 것은 내물왕 代에 왕위가 고구려의 입김에 좌우되면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더구나 433년 나제동맹이 성립된 이후에도 신라는 이 왕호를 계속 사용했다는 사실을 그는 지적했다. 신라는 503년 지증왕 代에 왕호를 왕으로 바꿨다. 末松保和에 의하면 마립간이란 원래 大首長을 의미하는 고구려어 ‘막리지’가 신라어로 변형된 것이라고 한다. 신지, 건길지, 한기 등에서 보듯이 ‘지’ 또는 ‘기’는 고대의 우리말에서 大首長에 대한 존칭 어미였던 것 같다.

 

매금이 본래 고구려어이고 大首長이라는 뜻이라면 고구려가 광개토왕비문과 중원고구려비에 신라왕을 일관되게 매금이라고 표기한 이유도 쉽게 이해된다. 고구려는 자국민에게 고구려가 신라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하여 비를 세운 것이다. 신라왕을 매금이라고 표기한 것은 매금이 막리지에서 유래된 고구려어이고 그렇기 때문에 매금이 大王은 물론 王보다도 낮은 ‘大首長’을 지칭하는 말이라는 것을 고구려 사람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고구려는 숙신이나 말갈의 대수장도 매금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중원고구려비의 東夷寐錦은 그런 의미라고 본다.

 

적어도 300년대 중반 이전의 고구려는 국력에 있어서 백제나 신라보다 월등하게 앞서 있었다. 그러므로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속국으로서 조공을 바쳤다고 하는 광개토왕비문의 글은 결코 과장이나 허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346년 근초고왕이 즉위한 이후 백제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으며 그 결과 고구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독립하려고 했다. 그것이 고국원왕과 광개토왕의 연이은 공격을 초래한 한 가지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같은 시기에 즉위한 신라의 내물왕은 왕호를 마립간으로 바꾸면서까지 고구려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려고 했다. 백제와 가야의 성장에 큰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신라가 500년에 즉위한 지증왕 代까지 마립간이라는 왕호를 계속 사용했다는 것은 신라가 나제동맹 성립 이후에도 고구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원고구려비는 481년에 세워졌다는 설이 유력한데 그렇다면 이 碑는 그에 대한 확실한 물증인 것이다. 이를 다른 측면에서 보면 백제는 힘겨운 상대 고구려와의 대립정책을 폈기 때문에 결국 수도 한성을 함락당하고 개로왕이 전사하는 파국을 맞이하지만(475년) 신라는 친고구려정책 덕분에 큰 戰禍를 피할 수 있었고 그동안 내실을 착실하게 다져 후일 삼국을 통일하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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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성일 | 작성시간 10.12.31 마립간이라는 왕호는 눌지때 처음 사용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옳으며, 내물도 마립간이라고 불렸다는 삼국유사의 기록도 틀리지 않는 이유는 눌지가 추증한 것입니다.
    그러한 연유로 실성을 마립간이라고 표현함 만은 잘못입니다.
    그렇다면 광개토대왕비에 나온 매금과 중원고구려비에 나오는 매금은 마립간으로 보는 견해와 관련하여
    광개토대왕비는 장수왕 때 건립된 것이 아니거나,
    매금은 마립간과 동일한 호칭이 아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미 남당유고를 사료로써 인정할 수 없다는 지적을 여러번 받았습니다만...
    이런 기록이 있다는 정도로 참고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귀거래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12.31 매금이 마립간이 아닐 가능성이야 있겠지만 또 눌지가 내물에게 마립간이란 칭호를 추증한 것일 가능성은 있겠지만 호태왕비의 건립연대까지 의심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남당유고를 전혀 모르지만 그것이 진서냐 위서냐 또는 사료로서 인정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남당유고건 화랑세기건 거기에 기록된 것이 타당한 것인지 다시 말하면 다른 문헌이나 유물 등 자료에 비추어 사실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인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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