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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법맨 작성시간09.01.04 아무래도 삼한계(?) 라 불리는 반도세력에게 위협으로 인식되었을 것입니다. 단순히 통일전쟁의 결승전인 일리천 전투에 고려의 10만대군 중 흑수말갈계를 포함한 4만 이상의 병력이 발해계열로 알고 있습니다. 후백제에 비해 인구면에서 열세에 처했던 통일이전 고려에게 발해유민들은 한 마디로 하늘에서 떨어진 엄청난 선물이었을 것입니다. 반면 구 신라계든 구 후백제계든간에 일단 삼한내에 있던 세력의 입장에서 언제든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보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이를 제거하려고 들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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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법맨 작성시간09.01.04 그리고 거란제국과의 3차전에 걸친 20여년간에 벌어진 전쟁에서 발해계 세력이 대거 전투에 동원되었을 겁니다. 안융진성의 성주이던 중랑장 대도수를 비롯한 발해계가 이 전쟁에서 선두에 섰을 것은 당연합니다. 일단 거란제국은 발해제국을 멸망시킨 원수니 이를 갚으려 들 테고요. 그리고 2차전에서 적어도 20만 이상의 포로가 발생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중 상당수가 발해계였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발해계 세력 자체가 기초부터 박살이 나 버렸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대를 해도 워낙 수적으로 열세다 보니 점차 소수파로 전락하다가 하층계급으로 전락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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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大欽茂 작성시간09.01.05 고려사의 초기 기사들이 거란침입 당시 소실되어 남아 있는 사료가 부실하다는 사실은 모두 아는 상식입니다. 그러므로 고려사에 남아 있는 발해유민의 고려내투 수보다 훨씬 많았을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대략 30만정도로 추산한 것은 합리적인 추산으로 여겨집니다. 고려시대 동번과 서번으로 인식되는 여진족 내에는 분명히 발해유민 집단들이 여전히 번인이라 불리며 여진족과 공존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쩌면 30만을 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조선 세종때 사군육진 개척을 통해 함경도를 완전히 접수하면서 흡수된 여진족까지 합산하면 50만~80만 정도로 추산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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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大欽茂 작성시간09.01.05 고려에서 발해계가 세력권을 형성하지 못한 이유는 발해 멸망 이후 유민들이 시기를 달리하여 산발적으로 고려에 내투함으로써 고려내 거주지가 달랐을 것이며 그 결과 연대성이 희박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고려조정 내 신라백제계의 견제가 작용하지 않았나 싶거든요. 그리고 고려내 신라백제계의 배타적인 발상들이 발해유민들의 기반을 약화시켰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한편으로는 사료에 드러난 것 보다는 발해계의 입김이 강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김창현씨에 의하면 광종정권을 뒷받침하고 칭제건원케 한 세력이 발해계와 후백제계였고 성종 숙종 예종으로 이어지는 북진책을 뒷받침한 한 세력도 발해계가 아니였나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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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미주가효 작성시간09.01.05 '근거지를 잃고 쫓겨온 사람들' 이라는 한계도 무시할 수 없다고 봅니다. 고려 초기의 권력구조는 호족을 중심으로 하였는데, 신라와 (후)백제계 호족들은 그 근거지를 갖고 상당한 힘을 발휘하였으나, 발해계는 자신의 영토를 잃고 고려로 넘어온 케이스에 해당하므로 근거지가 있을 리 없지요. 고려왕의 토지하사나 토지구매 등으로 일정한 땅을 얻더라도 해당 지역의 기존 호족들이 발해계가 힘을 키우는 것을 쉽게 용납하진 않았을 테니 정치세력으로 성장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과거 위만이 내투했을 때, 그를 '변방을 지키는 장수' 로 삼은 것처럼 귀순한 귀족을 변방을 지키는 장수로 삼아 그 세력을 일종의 방패막이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