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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근대 토론방

Re:연산군에 대한 궁금증..

작성자소호금천씨|작성시간08.11.19|조회수178 목록 댓글 6

박영규의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이라는 내용중 10대 연산군 일기의 내용에 있어서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연산군 대의 시정기는 자주 검열을 받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쉽게 직필을 하지 못했고,

사관이 경연이나 청정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또한 사관으로 임명된 인물들이 연산군의 측근이 많아 사료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게다가 연산군 폐출 이후 사관들의 활약이 지나치게 위축되어 <연산군일기> 편찬 작업의 기초가 되는

사초를 제출하지 않았다.
이는 무오사화에 대한 여파로 사초 제출 이후에 닥칠 후환을 염려했던 까닭이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연산군일기> 편찬 작업은 시행 3년 만인 1509년 9월에 완료되어

제반 의식을 간단히 치른 다음 실록이 아니라는 이유로 외사고에 봉안되었다.
 
<연산군일기>는 봉안, 관리에서는 실록과 큰 차이가 없었지만 내용과 체제는 실록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책은 대개 한 권에 1, 2개월분의 사실을 수록하고 있지만 부분적으로 6, 7개월분을 수록한 것도 있다.

특히 내용 면에서는 무오사화의 후유증으로 사초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만들어졌다.
때문에 부실하기 짝이 없다.

 

<연산군일기>는 정확한 사료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과,

연산군의 폭정에 대해 다소 과장된 서술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다.
또한 연산군의 폭정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다 보니 정작 기록해야 할 구체적인 사건들을 너무 소홀히 다룬 감도 없지 않다.

그리고 다른 실록 편찬 과정과는 달리 조정이 <연산군일기> 편찬에 너무 소극적이었다는 점도 지적될 수 있겠다.

갑자사화 후 연산군의 폭정은 더욱 노골화되고 있었다.

그 동안 자신의 행동에 제동을 걸던 세력이 모두 없어진 만큼 그가 못할 일은 없었다.

우선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신하는 모두 죽이거나 유배를 보냈으며, 언론의 주축이 되던 사간원을 없애버렸고,

정치 논쟁을 금하기 위해 경연을 폐지시켰다.
 
학문을 싫어하고 학자를 배격하던 그는 조선 학문의 전당이라고 할 수 있는

성균관을 폐지하여 자신의 유흥장으로 만들었으며,

조선 불교의 산실인 원각사를 없애고 그곳에 장악원을 개칭하여 만든 연방원을 두고 기생들의 모임 장소로 사용하였다....후략

 

가끔 인터넷등에 눈에 띄는 내용중
연산군이 반정에 의해 폐위된 왕이었기에 대부분 악행에 대한 것

그리고 단적으로 '패륜적 행위를 일삼은 폭군으로만 기록한 것으로  사실과는 많이 왜곡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연산군은 왕권 강화를 위한 나름의 자구책으로써 그의 인간적인 고통과 낭만적 성격을 부각시키는 동정론을 펴는

사람들도 많이 눈에 뜨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반정으로 폐위된 왕이라서 그가 하지 않았던 일을 그에게 덮어 씌운 모략적인 기록으로

전해져 내려온 것일까????


그것은 당대 사람으로써 무오사화때 화를 당한 김일손의 형인 동창공 김준손이 유배지에서 중종반정 직전에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반정을 일으키라는 “창의 격문서 내용이 당시 실정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물론 이분 역시 무오사화때 피해를 입고 유배중인지라 중립적인 입장의 내용은 아닐지라도 없는 내용으로

창의 격문을 만들어서 과연 어떠한 공감과 명분을 일으킬 수 있겠는지??
바로 당시 연산군 폭정은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고 격분을 일으킬만한 행위를 저질렀기에 그 행위를 지적하면서

격문서를 작성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 할 것입니다.
이 격문서는 서울에 도달하기 직전에 이미 반정이 일어나 실제 이 격문서의 영향은 없었지만....

그러나 당대인이 연산군의 폭정을 고발하는 고발장 같은 내용이라 연산군의 폭정은 사실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아래 동창공 김준손의 창의 격문서 내용을 소개합니다


東窓金公倡義檄文 首發廢燕山論反正 中廟朝
동창김공 창의격문 : 동창공(휘준손,1454~1507)이 쓴 연산군을 폐하고자 의인들을 규합하기 위해 알리는 글


"恭惟我 太祖握符受命?業艱難 世宗聖智天縱德敎休明

成宗一遵 成憲節用愛士民 安物阜濟世昇平不意嗣君荒淫滅德暴虐無道

父王後宮杖而殺之翁主王子流而?之是可忍也 執不可忍也
“삼가 공경하게 생각해 보면, 우리 태조는 천자의 지위로서 나라를 세우려는 운명을 받아 어려움을 헤쳐 나왔다. 

세종은 성스러운 지혜와 하늘이 준 덕을 갖추어 백성들을 이끌고 밝게 하였다.

성종은 만들어진 법도를 지켜서 받들고 아껴 쓰면서 선비와 백성을 사랑하였고,

모든 것을 편안하게 하고 크게 세상을 구제하여 나라가 평안해졌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나라를 물러 받은 임금이 음탕하고 덕을 멸시하며 포학하고 도를 무시하여,

부왕의 후궁들을 매질하여 죽이고 공주와 왕자들을 유배 보내거나 죽이니 이를 어찌 참을 수 있단 말인가.

결코 참을 수 없다.
 
大諫之正言者 竄之誅之史官 之直筆者?之滅之戮辱大臣賊害

忠良父子兄弟收司緣坐甚於秦法

師友門徒羅織網打劇於漢禁發人之塚禍及枯骸籍人之産殃流黃口寸斬之律碎骨之? 此何等刑也
바른말로 간하는 사람을 귀양보내거나 죽이고,

바른 글을 쓰는 사관(史官)들을 찢어죽이거나 부관참시(剖棺斬屍)하여 제거하고,

대신들을 죽이거나 욕보이고, 충신과 양민들을 죽이거나 해치고,

부자형제를 관청에 가두거나 무고하게 연좌하여 처벌하는 것이 진()나라의 법보다 더 심하였고,

같이 배우는 스승과 친구들도 남김없이 잡아들이는 것이 한()나라의 법보다도 극심하였다.

사람의 무덤을 파헤쳐 그 화가 마른 유골에도 미치게 하고,

사람의 출산도 기록하여 재앙이 어린 아이들에게도 내려가게 하였다.

친척은 촌수대로 토막내는 법과, 뼈를 부수어 버리는 법은 이것이 어떤 형벌이던가.

 

奪人妻女恣行淫慾破人廬舍以廣苑? 先王陵寢盡爲孤兎之場

前聖祠宇變作熊虎之圈採 靑之士遍於閭里聚紅之院尊於臺閣百役繁興

八域疲弊委差旁午郵傳一空徵?無藝民不聊生不特此也
남의 부인과 딸을 빼앗아 음욕을 자행하고, 남의 집을 부수어 정원으로 넓히고,

선왕의 능침을 없애어 여우와 토끼의 마당으로 되었고,

이전의 성인들을 모시는 사당을 곰과 호랑이를 가두는 우리로 만들어 버렸다.

젊은 선비들을 뽑아서 백성들의 마을에 두루 배치하고, 늙은 대신들을 모아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존경해야,

백가지 일들이 번성하고 흥할 것이나,

8도가 피폐해지고 잘못되어 어그러지고(違差) 모든 것이 틀어져, 하나의 헛된 것만 전해져서 바랄 것이 없으니,

백성은 의지하여 살 수가 없는 것이 이 이유만이 아니다.
 
宗室婦女誘行私汚兄弟妻妾逼令相奸 三年通喪忍短其制父母忌祭亦皆罷之?倫己?人道滅矣
종실의 부녀를 유혹하여 추잡한 짓을 행하고, 형제의 처첩을 협박하여 서로 간통하고,

3년상을 잔인하게 그 제도를 짧게 하고 부모의 기제사도 또한 모두 없애니

인륜이 이미 사람이 지켜야할 도리에서 없어졌다.
 
其他土木之役聲色之好池臺游?之娛 禽獸花竹之玩 凡係亂政難以爾+見=?縷熏天之惡過於政廣盈貫之罪浮於桀紂

生民一時之苦姑不足言萬一大奸窺?神器一朝遽起則易姓之禍亦足可虞
기타 토목공사의 부역을 일으키고, 노래와 여색을 좋아하고, 연못과 누대에서 놀기만 하고, 사냥을 오락처럼 즐기고,

새와 짐승과 꽃과 대나무를 가지고 노니, 이런 모든 것들이 정치를 어지럽게 하고 곡절을 숨기고 하늘을 검게하여,

그 해악이 지나쳐서 정치에 넓게 미치고 찼으며 죄악은 걸주[1]보다도 심했다.

백성의 한 때의 고통은 말로써 표현할 수 없으니 만일 아주 간사한 자가 신기(옥쇄=왕위)를 엿보아(窺?)

하루아침에 갑자기 일어나는 역성혁명의 화도 우려할 만하다.
[1]桀紂;  고대 중국의 폭군
 
惟我 成廟臨御二十六年禮接京師培養忠義者正爲今日也 晋城大君

成宗大王之嫡子賢而有德中外屬望謳歌所歸天命攸在玆

以某等以某月某日擧義兵移書諸道約日聚京師在朝公卿百執事宜速推戴以扶 宗社之危"
생각해보면 우리 성종조에 있어서 26년 동안 위대한 스승을 예로서 대하고 충절과 의로운 사람들은 배양한 것이

바로 오늘을 위한 것이다. 보성대군은 성종대왕의 적자로서 어질고 덕이 있으며,

나라안과 바깥(중국)에서 촉망받고 칭송하여 노래하니(謳歌) 하늘의 소명을 따라 돌아가고자 하는 바,

이에 누구누구는 모월 모일에 의병을 일으키고 글을 전하여 여러 지방에서 약속된 날에 서울에 모여,

조정의 공경대부와 백관과 집사들은 마땅히 빨리 <보성대군을> 추대하여 종묘사직의 위급함을 도우라.”  (終)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의 저자인 박영규씨 역시 연산군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적인 평가를 내립니다

 

그의 광적인 폭정까지 인간적인 동정론으로 감싸는 것은 위험한 시각이다.

조선 중기 당시의 사고 체계와 삶의 방식을 감안한다면 연산군의 행동은 엄청난 범죄 행위였다.

또 혹자는 연산군의 행동을 왕권 강화책으로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왕권이 강화된다는 것은 단순히 백성과 신하들 위에 군림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왕이 백성과 신하를 하나로 묶어주는 구심체 역할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연산군의 폭정은 왕권의 강화라기보다는 왕권을 볼모로 한 독재의 강권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연산군에 대한 동정론을 펴는 사람들은 흔히 조선왕조사에 또 한 명의 폭군으로 기록된 광해군과 비교하려 들지만

이 또한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광해군은 정치 역학의 희생자인데 반해, 연산군은 인륜과 민심을 배반한 독재자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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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聖君 仁宗大王 | 작성시간 08.11.19 유자광의 경우는 연산군이 자신을 제대로 대접해주지 않는다고 등을 돌린 경우죠..유자광이란 인물 자체가 기회주의자..
  • 답댓글 작성자소호금천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8.11.19 물론 聖君 仁宗大王 님의 견해도 일리 있습니다..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기 보다는 한마디로 기회주의자이지요..그런데 그런 위인에게도 반정에 동참할 정도로 명분을 주었으니 연산군의 폭정은 당시 자타가 공인할 정도가 아니었나? 생각이 드는군요..^^
  • 작성자天孫 | 작성시간 08.11.20 마지막 기록에 저도 동감하는 바입니다. 광해군은 기록밖에는 증거가 없지만, 연산군은 금표라는 증거가 있죠. 그렇기에 인륜은 모르겠지만 민심에 반하는 행동을한 암군이라고 생각 됩니다. 재평가가 내려진다 하더라도 전혀 다른 재평가는 힘들거라 생각 됩니다. 재평가를 하는 부분 역시 축소되겠죠.
  • 작성자율리우스카이사르 | 작성시간 08.11.24 제 생각에는 당시 연산군이 가지고 있었던, 정치적 이념은 보지 않고 연산군의 행동만 판단하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당시 연산군의 정치적 입장은 태종과 거의 가깝다고 보면 됩니다. 즉 왕권중심체제를 지향하지, 신권중심체제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권에 강력한 역할을 부여하는 사간원은 폐청될수도 있는것입니다. 그리고 성균관이 왜 문을 닫았는지 정확한 사료를 제시하여 주시고(저런식으로 인용된거 말고, 실제 사료에 나온것 말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유흥청으로 쓰였는지에 대한 자료도 제시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소호금천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8.11.25 조선왕조실록 중종 1권, 1년(1506 병인 / 명 정덕(正德) 1년) 9월 2일(무인) 2번째기사 "연산의 죄상에 대한 사신의 논찬" 부분을 읽어보시면 그냥 답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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