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한단인님 소개로 가입하게 된 thwmunba 입니다.
Daum 에서는 SHaw 라는 닉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대의 인구 문제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생각하던 것이 있으므로, 백제의 인구를 한번 계산
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제 견해가 변화해 온 과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작년 초까지만 하더라도 백제 인
구가 380만명 선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삼국사기와 신, 구당서에 기록되어 있는
숫자를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였지요. 또한 고구려와 비교해도 결코 뒤떨어지
지 않는 그 규모를 볼 때 고구려가 많은 남정에도 불구하고 백제를 척결하지 못한 이유가 여
기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호서와 호남이 아무리 곡창이라 해도 380만은 너무 많지요. 학자에 따라 다소 차이
는 있겠습니다만 고려시대의 인구는 3~400만명으로 보는 것이 대세인 것 같습니다. 물론 송
사(宋史)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200만명선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정부가 장악하지 못한 호구
도 고려해야 하겠지요. 물론 고려시대의 동원 역량을 보면 장악력이 아주 부족한 것도 아니
었다고 사료되니, 3~400만명이라고 보는 것은 제 생각에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아무튼 그렇
다면 백제의 인구는 고려 전체의 인구에 버금갔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아무래도 사실이라고
믿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저는 이 점에 대해서는 뚜렷한 생각이 없었고, 전란으로 죽은 사람
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백제 멸망시에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탈출한 것 아닌가 하고 막연하
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작년 가을쯤에 고구려와 발해 인구를 시대에 따라 계산 해보고, 멸망시 고구려 인
구는 "고구려인들만의 숫자" 라고 보기에는 너무 많고 그 안에 복속되어 있던 말갈 제부까
지 합쳐야만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백제의 인구 역시 1호당 5명이라는
전래의 공식으로 막연히 계산할 수는 없고, 신, 구당서에서 채록한 삼국사기의 기록이 비현
실적이라는 쪽으로 선회하게 되었습니다.
"비현실적" 이라고 하는 까닭은, 이 숫자는 자연적인 식량 생산량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
니기 때문입니다. 백제의 영지가 정확히 호서, 호남과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에 다소 조정은
필요하지만, 조선 세종대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경작지가 대략 50만결 정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종대의 토지는 160만결 이상이었는데, 1결당 평균 6천평이었음을 고려하면 전체 면적은
약 3만 2천 평방 킬로미터로, 이는 대한민국 전체 면적의 15% 에 해당합니다. 당시의 개간
상황을 생각하면 이 외에 어떤 대량의 면세 토지가 존재하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수치입니
다. 추가로 오늘날 남, 북한을 합친 경지 면적은 3만 9천 평방킬로미터입니다.
1 결에서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100말의 곡물이 나왔으며, 전근대시대에 1인당 평균 곡물 소
비가 연간 18말이었다는 통계를 적용하면(삼국시대 사람들이 중국인이나 조선인들보다 못 먹
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조선시대 사람들도 결코 배부르게 먹고 산건 아니니까요.), 세
종대에 부양할 수 있는 인구는 890만이었으며, 백제 지역의 경작지 면적으로는 280만 정도입
니다. 76만호X(곱하기)5 해서 나온 380만보다 무려 100만명이나 적습니다.
여기서 밝혀둘 점은, 물론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호수와 구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이는 세
공을 위한 호적에 등재된 사람의 수일 뿐이고, 실제 인구는 7~800만명에 이르렀으리라는 사
실입니다. 부양가능한 사람 수가 꼭 인구와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상업적으로 분배가 잘 되
지 않는 사회에서는, 최대 부양가능한 숫자에 비해 실제 인구는 적은것이 상례였습니다. "조
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에서는 세종대의 인구를 670만명 선으로 추정하였는데,
이는 인구증가율과 생산량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수치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가 계산한 부
양가능 수치보다는 25% 가량 낮습니다. 세종대는 조선의 인구가 증가 일로에 있었음을 고려
하지 않으면 안되겠지만, 참고할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전근대시대의 인구를 결정하는
데 있어 근본적인 제약 조건은 생산력이지 호구 기록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한단인님은 이 부분에서 조금 오해가 있으셨던것 같습니다. 저는 세종실록지리지의 호구수
를 가지고 얘기한 것은 아닙니다. )
그런데 이렇다고 해서 백제의 인구를 280만명, 혹은 그 75%인 210만명으로 볼 수 있느냐 하
면, 그것도 아닌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삼국시대의 농법은 1년 1작이 기본이었고, 비료가 발
달하지 않아 필요불가결하게도 휴경지가 광대하게 존재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삼국 투쟁
이 격화된 이후에는 인구가 정체되면 정체되었지 더 늘어났을 것 같지도 않고 말입니다. 고
려시대에는 윤작법이 보급되어 생산량이 늘어났고, 조선 초기에는 일부 지역에서 이앙법도
보급되었습니다.
(부가: 이앙법이 생산량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는 지적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쌀만
따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어느 학자의 지적보다, 제 부모님 세대의 경
험담이 우선됩니다. ㅡㅡ;;)
따라서 여기에서 말씀드리고 싶은 바는, 1결당 100말이 나온다는 생산력은 이미 고려시대를
거치며 향상 발전된 결과라는 것입니다. 삼국시대의 생산력이 어느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방
도는 없으나, 임시로 고려시대의 3분의 2정도라고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부양 가능한 인구수
는 다시 140~180만명 선으로 줄어듭니다.
제 지적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첫째, 세종대에 기록된 경지 면적은 오늘날과 그다지 차이가 없고, 국토의 15%에 해당하여
그 배후에 숨겨진 대량의 토지가 더 있었으리라 보기도 힘들다.
둘째, 삼국시대의 생산력은 고려-조선초기에 비해 낮았으며, 이를 고려하여 백제지역의 경작
지가 부양 가능한 인구를 계산하면 200만명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상에서 백제의 호구가 76만호라는 것은 당측이 너무나 과장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삼국시
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라는 책에서는 백제의 인구를 100만명 정도로 보았는데, 어떻
게 계산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삼국유사의 15만 2300호라는 기사를 보고 추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 신라가 백제를 접수하여 철저하게 지배하였음을 고려하
면 삼국유사의 숫자들이 아무리 흐리멍텅하게 기재된 것이 많더라도 아주 근거없이 나오지
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口수를 가지고 비판받을것을 알면서도 평백제비를 들먹인 것은 거기에 기재된 구수는
믿을 수 없더라도 최소한 戶수에는 신빙성이 있지 않나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부가1: 태종대의 경작지는 세종대보다 적어서 40만결 정도인데, 이것이 개간의 미비함 때문
인지, 조사가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타협주의적인 시각으
로(...) 정확히 원인은 반반이라고 생각하여 세종대 이전에는 45만결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부가2: 지금은 더이상 "해외 탈출설" 을 믿지는 않습니다. 이상과 실상이 맞지 않는다고 해
서 확인할 수 없는 스토리를 지어내어 공백을 메꾸려 하면 안되겠지요.
그 외 몇 가지 추가적인 논의...
1. 삼국사기의 고구려의 호구수에도 5를 곱하고 백제의 호구수에도 5를 곱하는 것은 무리라
고 생각됩니다. 이미 그보다 600년이나 앞선 한 군현 시대에도 낙랑 지역의 호당 구수는 6인
에 이르렀으며, 이는 요동이나 현도로 가면 4명 수준으로 떨어졌으니 고구려의 경우에는 영
역별로 다른 호당구수를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한편 백제의 경우에는 낙랑지역의 호수로 미루어 보아, 호당 6명의 남부지역 자연가정을 최
소한의 기준으로 잡아야 하며 함부로 호당 5명의 평균을 적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때
백에의 인구는 무려 450만명이 육박하므로 역시 76만호 기록은 과대평가로 돌리는 것이 순리
가 아닐지요.
2. 고대의 인구수를 평가하는 작업은 기록에 실재를 맞추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생산
량으로부터 기록의 신빙성을 검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사료됩니다. 백제의 인구를 76만 가
정선으로 평가하려면 연간 8000만 말에 상당하는 곡물이 백제땅의 어디에선가 수확되었다고
볼 수 밖에 없는데, 이런 일은 절대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기록되지 않은 일을 이것 저것 만
들어 넣어서 합리화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Daum 에서는 SHaw 라는 닉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대의 인구 문제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생각하던 것이 있으므로, 백제의 인구를 한번 계산
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제 견해가 변화해 온 과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작년 초까지만 하더라도 백제 인
구가 380만명 선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삼국사기와 신, 구당서에 기록되어 있는
숫자를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였지요. 또한 고구려와 비교해도 결코 뒤떨어지
지 않는 그 규모를 볼 때 고구려가 많은 남정에도 불구하고 백제를 척결하지 못한 이유가 여
기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호서와 호남이 아무리 곡창이라 해도 380만은 너무 많지요. 학자에 따라 다소 차이
는 있겠습니다만 고려시대의 인구는 3~400만명으로 보는 것이 대세인 것 같습니다. 물론 송
사(宋史)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200만명선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정부가 장악하지 못한 호구
도 고려해야 하겠지요. 물론 고려시대의 동원 역량을 보면 장악력이 아주 부족한 것도 아니
었다고 사료되니, 3~400만명이라고 보는 것은 제 생각에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아무튼 그렇
다면 백제의 인구는 고려 전체의 인구에 버금갔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아무래도 사실이라고
믿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저는 이 점에 대해서는 뚜렷한 생각이 없었고, 전란으로 죽은 사람
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백제 멸망시에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탈출한 것 아닌가 하고 막연하
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작년 가을쯤에 고구려와 발해 인구를 시대에 따라 계산 해보고, 멸망시 고구려 인
구는 "고구려인들만의 숫자" 라고 보기에는 너무 많고 그 안에 복속되어 있던 말갈 제부까
지 합쳐야만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백제의 인구 역시 1호당 5명이라는
전래의 공식으로 막연히 계산할 수는 없고, 신, 구당서에서 채록한 삼국사기의 기록이 비현
실적이라는 쪽으로 선회하게 되었습니다.
"비현실적" 이라고 하는 까닭은, 이 숫자는 자연적인 식량 생산량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
니기 때문입니다. 백제의 영지가 정확히 호서, 호남과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에 다소 조정은
필요하지만, 조선 세종대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경작지가 대략 50만결 정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종대의 토지는 160만결 이상이었는데, 1결당 평균 6천평이었음을 고려하면 전체 면적은
약 3만 2천 평방 킬로미터로, 이는 대한민국 전체 면적의 15% 에 해당합니다. 당시의 개간
상황을 생각하면 이 외에 어떤 대량의 면세 토지가 존재하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수치입니
다. 추가로 오늘날 남, 북한을 합친 경지 면적은 3만 9천 평방킬로미터입니다.
1 결에서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100말의 곡물이 나왔으며, 전근대시대에 1인당 평균 곡물 소
비가 연간 18말이었다는 통계를 적용하면(삼국시대 사람들이 중국인이나 조선인들보다 못 먹
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조선시대 사람들도 결코 배부르게 먹고 산건 아니니까요.), 세
종대에 부양할 수 있는 인구는 890만이었으며, 백제 지역의 경작지 면적으로는 280만 정도입
니다. 76만호X(곱하기)5 해서 나온 380만보다 무려 100만명이나 적습니다.
여기서 밝혀둘 점은, 물론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호수와 구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이는 세
공을 위한 호적에 등재된 사람의 수일 뿐이고, 실제 인구는 7~800만명에 이르렀으리라는 사
실입니다. 부양가능한 사람 수가 꼭 인구와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상업적으로 분배가 잘 되
지 않는 사회에서는, 최대 부양가능한 숫자에 비해 실제 인구는 적은것이 상례였습니다. "조
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에서는 세종대의 인구를 670만명 선으로 추정하였는데,
이는 인구증가율과 생산량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수치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가 계산한 부
양가능 수치보다는 25% 가량 낮습니다. 세종대는 조선의 인구가 증가 일로에 있었음을 고려
하지 않으면 안되겠지만, 참고할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전근대시대의 인구를 결정하는
데 있어 근본적인 제약 조건은 생산력이지 호구 기록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한단인님은 이 부분에서 조금 오해가 있으셨던것 같습니다. 저는 세종실록지리지의 호구수
를 가지고 얘기한 것은 아닙니다. )
그런데 이렇다고 해서 백제의 인구를 280만명, 혹은 그 75%인 210만명으로 볼 수 있느냐 하
면, 그것도 아닌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삼국시대의 농법은 1년 1작이 기본이었고, 비료가 발
달하지 않아 필요불가결하게도 휴경지가 광대하게 존재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삼국 투쟁
이 격화된 이후에는 인구가 정체되면 정체되었지 더 늘어났을 것 같지도 않고 말입니다. 고
려시대에는 윤작법이 보급되어 생산량이 늘어났고, 조선 초기에는 일부 지역에서 이앙법도
보급되었습니다.
(부가: 이앙법이 생산량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는 지적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쌀만
따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어느 학자의 지적보다, 제 부모님 세대의 경
험담이 우선됩니다. ㅡㅡ;;)
따라서 여기에서 말씀드리고 싶은 바는, 1결당 100말이 나온다는 생산력은 이미 고려시대를
거치며 향상 발전된 결과라는 것입니다. 삼국시대의 생산력이 어느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방
도는 없으나, 임시로 고려시대의 3분의 2정도라고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부양 가능한 인구수
는 다시 140~180만명 선으로 줄어듭니다.
제 지적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첫째, 세종대에 기록된 경지 면적은 오늘날과 그다지 차이가 없고, 국토의 15%에 해당하여
그 배후에 숨겨진 대량의 토지가 더 있었으리라 보기도 힘들다.
둘째, 삼국시대의 생산력은 고려-조선초기에 비해 낮았으며, 이를 고려하여 백제지역의 경작
지가 부양 가능한 인구를 계산하면 200만명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상에서 백제의 호구가 76만호라는 것은 당측이 너무나 과장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삼국시
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라는 책에서는 백제의 인구를 100만명 정도로 보았는데, 어떻
게 계산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삼국유사의 15만 2300호라는 기사를 보고 추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데, 신라가 백제를 접수하여 철저하게 지배하였음을 고려하
면 삼국유사의 숫자들이 아무리 흐리멍텅하게 기재된 것이 많더라도 아주 근거없이 나오지
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口수를 가지고 비판받을것을 알면서도 평백제비를 들먹인 것은 거기에 기재된 구수는
믿을 수 없더라도 최소한 戶수에는 신빙성이 있지 않나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부가1: 태종대의 경작지는 세종대보다 적어서 40만결 정도인데, 이것이 개간의 미비함 때문
인지, 조사가 철저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타협주의적인 시각으
로(...) 정확히 원인은 반반이라고 생각하여 세종대 이전에는 45만결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부가2: 지금은 더이상 "해외 탈출설" 을 믿지는 않습니다. 이상과 실상이 맞지 않는다고 해
서 확인할 수 없는 스토리를 지어내어 공백을 메꾸려 하면 안되겠지요.
그 외 몇 가지 추가적인 논의...
1. 삼국사기의 고구려의 호구수에도 5를 곱하고 백제의 호구수에도 5를 곱하는 것은 무리라
고 생각됩니다. 이미 그보다 600년이나 앞선 한 군현 시대에도 낙랑 지역의 호당 구수는 6인
에 이르렀으며, 이는 요동이나 현도로 가면 4명 수준으로 떨어졌으니 고구려의 경우에는 영
역별로 다른 호당구수를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한편 백제의 경우에는 낙랑지역의 호수로 미루어 보아, 호당 6명의 남부지역 자연가정을 최
소한의 기준으로 잡아야 하며 함부로 호당 5명의 평균을 적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때
백에의 인구는 무려 450만명이 육박하므로 역시 76만호 기록은 과대평가로 돌리는 것이 순리
가 아닐지요.
2. 고대의 인구수를 평가하는 작업은 기록에 실재를 맞추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생산
량으로부터 기록의 신빙성을 검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사료됩니다. 백제의 인구를 76만 가
정선으로 평가하려면 연간 8000만 말에 상당하는 곡물이 백제땅의 어디에선가 수확되었다고
볼 수 밖에 없는데, 이런 일은 절대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기록되지 않은 일을 이것 저것 만
들어 넣어서 합리화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다음검색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돌부처 작성시간 07.03.03 백제생산력이 조선보다 높았다는 결론이 나올때 님의 주장을 철회할게 아니라 백제생산력이 한계가 있었음이 밝혀졌을 때에 76만호설이 철회되어야 논리적으로 맞습니다.
-
작성자SHaw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7.03.04 76만호 기록은 구당서에서 시작되어 다른 책에도 수록된 것으로 압니다, 다수결로 정할 문제까지는 아니겠지요. 개인적으로는 백제가 대량의 곡물 무역을 했을것 같지는 않지만, 이것 역시 믿을만한 연구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
작성자한단인 작성시간 07.03.04 백제가 유럽식 농노제나 노예제 사회라고 하진 않았습니다. '이 토론과 상관 없지만'이라는 단서를 앞에 붙였지요. 단지 백제의 토지 소유관게나 생산방식의 양상이 어떠했는지 아직까지 명확한 연구결과가 나오지 않았고 토지 소유관계에 따라 식량수급은 얼마든지 변동이 가능하다라는 얘기를 하기 위해 농노제와 노예제를 말했던 겁니다. 동양권에서는 농노제까지는 아니더라도 장원을 경영하는 대토지를 소유자가 가복을 통해 경작하거나(노예로 해석하거나 혹은 신분상 노예라고 보지 않는 해석이 난무하지만) 외부 빈농에게 소작을 주고 막대한 소작료를 받아먹는 식의 토지소유관계도 있었지요.
-
작성자한단인 작성시간 07.03.04 부족한 식량 수급을 남조에서만 동원한다고 한 적이 없을텐데요. 저는 경로는 다양할 수 있고 남조는 그 중 하나였다고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남조와 교역할 공우는 황해 횡단항로가 아니라 황해 사단항로입니다. (둘의 차이는 구분하실거라 생각하지만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오해없으시라는 의미에서 사족을 답니다.) 그리고 shaw님의 대체적인 사관은 역사는 시간이 지날수록 발전한다는 진보사관에 가깝다고 생각되는데 맞는지요? 하지만 기술, 의식의 발전은 시기가 지날 수록 발전하는게 아니라 경우에 따라 얼마든지 퇴보도 하고 단절 되는 예는 많습니다. 백제가 조선보다 항해술, 조선술이 떨어질 것이라는 것이라고 생각되진 않습니다.
-
작성자SHaw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7.03.04 음, 저는 "일본에 식량이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라고 전제했으니까요. 백제와 조선이 1천년이나 떨어져 있으니 그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일괄적으로 "발전" 이라는 한 마디로 뭉뚱그려 생각할 수야 없겠습니다만, 제 기본적인 입장은 말씀하신대로 일종의 "진보사관" 이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