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왕이 성군이든 아니든 해동증자이며 마지막 왕이었다는것 이상은 힘들군요.

작성자바다 ♡|작성시간07.12.12|조회수785 목록 댓글 13
의자왕에게 여자가 많았다는 것 때문에 굉장히 안좋은 시각을 가지시는 분이 계신 것 같은데,

의자왕은 명실상부한 무왕의 아들이고 신라 선화 공주의 아들입니다.

그런 의자왕에게 여자가 많았던 이유는 지방의 호족들때문이 아닐까요.

이런 예는 고려 태조 왕건에게도 있었고,

이스라엘의 솔로몬왕도 비슷합니다.

다만 다른점은 솔로몬 이후에는 나라가 분열이 되었고, 의자왕 이후에는 나라가 망한 것이죠.

41명의 아들에게 좌평의 관직을 준 것은 나름의 최선일수 있습니다.

태자를 세웠고, 다른 아들들의 관련된 사람들이 가만히 있었을까요.

사비와 웅진은 다릅니다.

웅진은 위례가 함락되고 완전한 수비를 위해 도성으로 삼은 곳입니다.

왕이 사비에서 잡히는것보다야 웅진에 있는 것이 나라를 위해 낫죠.

전쟁 때의 일은 모르는 것입니다.

왜 전쟁이 일어났는지를 생각해보면, 압박받던 신라에서 최후의 수단으로 당을 끌어들인것 아닙니까.

부흥이 실패한 것도 부여융과 부여풍, 두 명의 왕이 같이 존재하니 혼선이 빚어진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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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바다 ♡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7.12.14 그렇다면, 무왕은 재위기간동안 단한번도 하지 못한 한번에 40여성 뺏기를 의자왕은 즉위하자마자 했습니다. 무왕이 전쟁을 일부러 살살했다는 의미일수도 있고, 병력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으니까요. 의자왕이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백제의 멸망을 부추겼다기보다는 오히려 신라의 멸망을 부추긴 면이 더 크죠. 윗분 말씀대로 동아시아 전체가 변화가 생기고 있었죠.
  • 작성자바다 ♡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7.12.14 무전신현님 말씀처럼 의자왕이 성군으로 추대받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 옛날이나 지금이나 망국의 군주라는 이유로 온갖 비난과 불명예는 다 안고 있죠. 지금 일련의 작업들은 명예회복과 사실관계 회복을 위한 것이지 감정적인 이야기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 작성자바다 ♡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7.12.14 또, 의자왕이 북망산에 묻힌 것은 중국 당국으로로써는 최대한의 예의일수도 있습니다. 그곳 자체가 왕족들이 묻히는 곳이니까요. 의자왕은 살아있는것 자체로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마지막에 병이 들어 죽는 것 또한 암살이나 병을 만들었을 가능성도 배제할수는 없는 부분이죠. 백제는 위덕왕 다음에 무왕, 의자왕으로 이어지기까지 혼돈의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복잡한 상황을 극적으로 좋은쪽으로 끌여들였다가 오히려 다른쪽에서 낭패를 본것으로 이해할수도 있는거죠. 백제가 망하고 부흥이 실패한 주요 원인은 정말 간단합니다.
  • 작성자바다 ♡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7.12.14 중국의 말을 믿고 웅진도독으로써 부임한 부여융도 백제의 왕이고, 전쟁의 원흉인 중국과는 무조건 싸우겠다는 의지를 보인 일본의 힘을 가진 부여풍도 백제의 왕입니다.
  • 작성자이도형 | 작성시간 07.12.17 의자왕은 패망한 군주 옆에 묻혔습니다. 예의라기 보다는 조롱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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