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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이 성군이든 아니든 해동증자이며 마지막 왕이었다는것 이상은 힘들군요.

작성자바다 ♡| 작성시간07.12.12| 조회수734| 댓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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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 소호금천씨 작성시간07.12.13 감정적으로 글을 쓰면 그 내용이 정확하게 전달될 수가 없습니다..의자왕이 성군이다. 아니다는 어디 까지나 개인적 주장이지 그것이 역사성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다만 의자왕은 효성이 깊으며 해동증자라는 칭호를 얻을 만큼 자질이 뛰어났으며 초기 신라의 40여성을 빼앗을 정도로 대담성과 통솔력 또한 뛰어난 군주였지만 결국에는 망국의 비운을 맞는 중심에 있었다는 것입니다..만일 의자왕대에 있어서 멸망 당하지 않고 후대에 멸망했거나 오히려 역으로 신라를 정복했다면 똑 같은 그의 행적에 대한 평가가 판이하게 달라 지겠지요..망국에 대한 책임은 역시 의자왕의 몫일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좌우지간 왕 이니까요
  • 작성자 百濟 牟大王 작성시간07.12.14 우선 기본적인 사실 관계에서 한가지 정정하겠습니다. '여자가 많았다'는 것은 3천궁녀 전설을 가리키시는 듯 한데. 그건 그냥 전설일 뿐 역사 기록이 아닙니다. 적어도 의자왕 이야기를 할 때 이젠 3천궁녀같은 구라는 좀 치워놓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리고 '서자41명'이 모두 의자왕의 친아들이라고 보는 비상식적인 해석이 아닌 이상 의자왕이 특별히 많은 후궁을 거느렸다고 볼 수 있는 근거도 없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소호금천씨 작성시간07.12.14 백제의 3천궁녀는 물론 전설적인 요소가 있으며 또한 당시 3천 궁녀의 존재가 가능했는지도 물론 의심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하지만 전설이나 신화 또한 그곳의 유적이 있으며 상징성을 가진 것으로 완전히 역사성의 가치를 배제 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다만 그러한 내용을 보다 긍정적이며 발전적인 해석이 필요한 것이 중요하지요..가령 3천 궁녀의 전설은 비록 궁녀일지라도 그들의 절개와 백제멸망 이전의 장엄하고 화려했던 문화적 소산으로 보는 것이 올바른 시각이라 봅니다.
  • 답댓글 작성자 소호금천씨 작성시간07.12.14 오히려 그 부분을 사치와 향락으로 보는 일부 비판적인 시각때문에 그 사실을 부정적으로 말살해 버린다면 천년 이상을 내려오면서 전설의 미담으로 인식되어온 낙화암의 전설과 유적지를 송두리채 부정해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짓일 뿐입니다...백제 왕궁에 3천 궁녀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부정적이거나 백제 멸망과는 하등의 연관성이 없다고 보입니다..그래서 "계백장군의 비틀기"라는 제목으로 본문을 쓴 본래의 의미가 이러한 비틀기가 궤변일뿐 더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 입니다.
  • 작성자 百濟 牟大王 작성시간07.12.14 그리고 덧붙이자면, 의자왕이 '실정'을 했다고 하지만 정작 실제 기록에서 '실정'으로 단정할 수 있는 부분은 없습니다. 19년 20년의 이상한 정체불명의 괴변기사들이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을 뿐입니다. 또한 사치와 낭비 방탕 음황 뭐 이런 이미지들이 많은데 의자왕에 대한 기록에서 그런 이미지와 연결되는 것은 다분히 작위적인 냄새가 나는 16년의 기록 하나뿐입니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이른바 요녀 군대부인에 대한 이야기도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나라가 망한 뒤에 나오는 책임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흥운동에서의 내분은 의자왕과는 관계가 없는 이야기인데 왜 나왔는지 모르겠네요.
  • 작성자 百濟 牟大王 작성시간07.12.14 백제멸망의 과정을 살펴보면 이상한 게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무전신현님께서 '한심해서 기도 안막힌다'고 표현하신 것 그대로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의자왕 개인의 부패무능이나 국가체제의 이완같은 단순한 문제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습니다. 여기서는 다 이야기할 수 없지만 조만간 백제멸망의 미스테리에 대한 개인적 견해를 밝힐 생각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 소호금천씨 작성시간07.12.14 님의 주장대로 백제의 멸망에 관한 부분은 무조건 의자왕의 실정이라고 단정짓는 것도 무리라는 것에는 동의 합니다... 이미 고,신, 백 그리고 당나라까지 격동기에 동아시아 전체의 변화에 따른 총체적인 역사적인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그 당시 나당연합군 결성이 안되었거나 신라가 김춘추, 김유신의 신흥세력이 당시 발호하지 못했다면 비록 의자왕이 실정을 했다 하더라도 결코 백제가 멸망 당하지도 않았겟지요..또한 그런 상황에서 의자왕의 평가가 지금의 인식처럼 과소평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구요.
  • 작성자 바다 ♡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07.12.14 그렇다면, 무왕은 재위기간동안 단한번도 하지 못한 한번에 40여성 뺏기를 의자왕은 즉위하자마자 했습니다. 무왕이 전쟁을 일부러 살살했다는 의미일수도 있고, 병력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으니까요. 의자왕이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백제의 멸망을 부추겼다기보다는 오히려 신라의 멸망을 부추긴 면이 더 크죠. 윗분 말씀대로 동아시아 전체가 변화가 생기고 있었죠.
  • 작성자 바다 ♡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07.12.14 무전신현님 말씀처럼 의자왕이 성군으로 추대받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 옛날이나 지금이나 망국의 군주라는 이유로 온갖 비난과 불명예는 다 안고 있죠. 지금 일련의 작업들은 명예회복과 사실관계 회복을 위한 것이지 감정적인 이야기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 작성자 바다 ♡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07.12.14 또, 의자왕이 북망산에 묻힌 것은 중국 당국으로로써는 최대한의 예의일수도 있습니다. 그곳 자체가 왕족들이 묻히는 곳이니까요. 의자왕은 살아있는것 자체로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마지막에 병이 들어 죽는 것 또한 암살이나 병을 만들었을 가능성도 배제할수는 없는 부분이죠. 백제는 위덕왕 다음에 무왕, 의자왕으로 이어지기까지 혼돈의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복잡한 상황을 극적으로 좋은쪽으로 끌여들였다가 오히려 다른쪽에서 낭패를 본것으로 이해할수도 있는거죠. 백제가 망하고 부흥이 실패한 주요 원인은 정말 간단합니다.
  • 작성자 바다 ♡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07.12.14 중국의 말을 믿고 웅진도독으로써 부임한 부여융도 백제의 왕이고, 전쟁의 원흉인 중국과는 무조건 싸우겠다는 의지를 보인 일본의 힘을 가진 부여풍도 백제의 왕입니다.
  • 작성자 이도형 작성시간07.12.17 의자왕은 패망한 군주 옆에 묻혔습니다. 예의라기 보다는 조롱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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