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신화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이다.
한자로 380자이며 본문은 다음과 같다
魏書云 乃往二千載 有壇君王儉 立都阿斯達[經云無葉山 亦云白岳 在白州地 或云在開城東 今白岳宮是] 開國號朝鮮 與高[堯]同時
古記云 昔有桓因[謂帝釋也]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卽太伯今妙香山] 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遺靈艾一炷 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 而不得人身 熊女者 無與爲婚 故 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 號曰壇君王儉
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唐高卽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其未實] 都平壤城[今西京]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一作方] 忽山 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 周虎[武]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위서(魏書)에 적혀 있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었다.
아사달(阿斯達 )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불렀다.
이것은 요나라(高: *堯의 다른 이름임)와 같은 시대였다.
또 고기(古記)에 적혀 있기를,
“옛날에 환인의 서자 환웅(桓雄)이 늘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세상을 다스리고자 하였는데,
아버지가 자식의 뜻을 알고 세상을 내려다보니,
삼위태백(三危太白)이 가히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하므로(弘益人間),
이에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서 내려 보낸 후 하늘의 뜻을 펴도록 했다(理之: 理化世界).
환웅은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에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와
이곳을 신시(神市)라고 부르니 이 분을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고 한다.
그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먹고 사는 곡식(主穀)과 평생 살아가는 생명(主命),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질병(主病),
잘못에 따른 형벌(主刑), 인간의 선악(善惡) 등을 주관하고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들을 주관했으며,
세상에 있으면서 이치로 다스렸다(在世理化: 理化世界)
이때 곰 1마리와 범 1마리가 같은 굴에 살고 있으면서 그들은 항상 신웅(神熊: *환웅천왕)에게 사람이 되게 해 주기를 원하면서 기도를 하였다. 이때 신(神: *환웅천왕)께서 이들에게 신령스런 쑥 한 다발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곧 곰과 범은 이것을 받아서 먹고 21일간을 금기하여 곰은 여자의 몸을 얻게 되었으나, 범은 금기를 하지 못하여 사람의 몸을 얻지 못했다. 웅녀는 그와 혼인해 주는 이가 없으므로 항상 단수(壇樹: *후에는 檀樹라고 흔히 기록) 아래서 아이 잉태하기를 축원하였다. 환인은 이에 거짓 사람으로 변하여 이내 잉태하여 아이를 낳으니 이름이 단군왕검(壇君王儉: 檀君王儉)이라 하였다.
단군은 중국 당나라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당고가 즉위한 원년은 무신년이다. 그러니 50년이면 정사년이요 경인이 아니다. 사실인지 아닌지 의심스럽다)에 평양성(지금의 평양)에 도읍하여 비로소 조선이라 하였다. 또 주나라 호왕(虎王: 武王)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왕으로 봉함에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기었다가 후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서 산신이 되었는데, 그때 나이 1908세 이었다.
의문
1.≪삼국유사≫는 13세기에 쓰여진 사서이다. 고조선이 기원전 2세기에 멸망하였으니,
1천5백여 년이라는 시간적 차이가 있다.
2.단군신화의 기록에는 인도의 신화에서 나오는 제석천이라는 신이 나온다
이는 불교에서 나오는 신이다 그런데 불교가 반도에 들어온 것은 372년이다.
3.단군신화에 나오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 등은 도교용어이다. 도교가 반도에 들어온것이 6~7세기이다
4.위서에 나온다고 하나 위서에는 단군신화가 없다 실존된 위서에 있다고는 하나 확연치 않다
제왕운기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삼가 국사(國史)에 의거하고 한편으로는 각 본기(本紀)와 수이전(殊異傳)에 실린 바를 가려 뽑고, 요순(堯舜) 이래의 경전(經傳)과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사서(史書) 들을 참조하여 허튼 말을 버리고 이치에 맞는 것을 취하여, 그 사적을 펴고 이를 노래함으로써 흥망한 그 연대를 밝히니 모두 1천 4백 60언이다.
(謹據國史하고 旁採各本紀與夫殊異傳所載하며, 參諸堯舜而來經傳子史하여 去浮辭 取正理하고 張其事而詠之하여 以明興亡年代하니 凡一千四百六十言이라)
요동에 하나의 별천지가 있으니 지역은 중국과 구별되어 나뉘었네.
큰 파도 넓은 바다 삼면을 둘러쌌고 북쪽에 있는 대륙과 끈처럼 이어져 있네(連陸) *1)
가운데 사방천리 여기가 조선이니, 강산의 뛰어난 모습은 천하에 이름이 높네.
농사지어 먹고살고 우물 파서 물마시며, 예의바른 국가이어서
중국인들도 소중화(小中華)라고 이름 지어 불렀다네.
(遼東別有一乾坤하니 斗與中朝區以分이라 洪濤萬頃圍三面하고 於北有陸連如線이라 中方千里是朝鮮이니 江山形勝名敷天이라 耕田鑿井禮義家라 華人題作小中華라)
처음에 어느 누가 나라를 열었던고 석제(釋帝)의 손자로 이름은 단군(檀君)일세.
요임금과 같은 때 무진년에 나라를 세워 순임금 지나 하(夏)나라까지 왕위에 계셨도다.
은나라 무정 8년 을미년에 아사달산에 들어가서 신선이 되었으니 *2)
나라를 누린 것이 1천 28년인데 그 조화는 상제(上帝)이신 환인(桓因)이 전한일 아니던가?
(初誰開國啓風雲고 釋帝之孫名檀君이라 並與帝高興戊辰하여 經虞歷夏居中宸이라 於殷虎丁八乙未에 入阿斯達山爲神이라 享國一千二十八이 無奈變化傳桓因가)
*1) 본기(本紀)에 기록되어 있기를 상제환인(上帝桓因)에게 서자(庶子)가 있었으니 웅(雄)이라고 하였더라. 기록에 적혀있기를 삼위태백(三危太白)으로 내려가서 홍익인간을 하도록 해라(弘益人間歟)하니 이에 따라서 웅(雄)이 천부인 3개를 받고 천인 3천명을 데리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오니 이를 단웅천왕(檀雄天王)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손녀(孫女: *천손 중의 한 여자로 해석함이 올바를 것임)로 하여금 약을 먹게 하여(飮藥: *환인천제가 약을 먹게 시킨 것으로 보임) 사람의 몸을 이루게 한 후 단수신(檀樹神: 檀雄天王)과 혼인을 하게 함으로서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단군이다.
조선지역에 머물면서 임금이 되시니 이와같은 연고로 시라(尸羅: 新羅), 고례(高禮: 高句麗), 남북옥저(南北沃沮), 동북부여(東北夫餘), 예(穢)와 맥(貊)이 모두 단군의 뒤를 이어온 나라들이라(皆檀君之壽也). 다스리기를 일천 이십 팔년이다가 아사달산으로 들어가서 신(神: 山神)이 되시니 돌아가시지 않는 연고이니라.
*2) 지금의 구월산이다. 다른 이름으로 궁홀(弓忽)이며 또 다른 이름은 삼위(三危)이니 사당이 아직까지 있다. 나라를 누린 것이 1천28년이었다.
그외 기록은 조선시대에 편집된것으로서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서 베낀것으로 추측된다
의문
첫째, 단군의 계보에 관한 인식이 다르다
삼국유사에서는 부모가 환웅과 웅녀라고 하여 부계가 천신과 연결된다
제왕운기에서는 단수신과 단웅의 손녀로 되어 있어 모계로 천신과 연결된다
그런데, 제왕운기의 다른 곳에서는 '석제釋帝의 손자 이름은 단군'이라 한다
둘째, 단군의 개국 연대가 다르다
삼국유사에 인용한 고기는 "경인년"으로 되어있으나,
일연은 주석을 달고 이를 반박하여, 정사년이라고 주장했고.
제왕운기는 무진년이라고 주장한다.
셋째, 단군과 기자의 계승 관계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
삼국유사에서는 기자의 동래로 말미암아 단군이 장당경으로 옮긴 것으로 되어 있다
제왕운기에서는 기자가 단군이 아사달 산신이 된 146년 뒤에 온 것으로 되어 있다
넷째, 왕검조선과 위만조선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보인다
삼국유사에서는 기자조선을 부기하여 왕검조선에서 위만조선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제왕운기에서는 왕검조선을 전조선, 기자조선을 후조선이라 하는 한편
위만조선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다섯째, 삼국유사에서는 단군의 단을 壇이라 하고 있는데,
제왕운기에 와서는 檀이라 표기하고 있고
이러한 표기는 에서도 나타나고 있고
조선후기 여러 사서까지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의문이라면 건국설화들도 오래되었기에 굳이 기록했다고 스스로 고백하는 김부식도
삼국의 건국신화을 넣으면서 단군신화는 담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단군신화는 언제 나왔을까?
분석해 본다면
1.환웅은 천신 환인의 서자(庶子)이다
그러면 이 신화의 산생년대는 적어도 적(嫡)과 서(庶)에 분간이 가능한 시대이다
고구려 초기의 혼인풍습은 데릴사위 옥저는 민며느리풍습이다 이는 부부를 중심으로 결혼하는 일부일처(一夫一妻) 일부다처(一夫多妻)와는 아직 거리가 있는 혼인풍습이다
그러면 단군신화의 산생은 고구려의 건국보다 늦어야 되지 않나 싶다
2.단군왕검은 천신의 서자(庶子) 환웅의 아들이다 다시 말해서 천손(天孫)이다
천제라는 개념이 언제부터 생겨났는지는 모르나 통치자를 천손으로 여기는 개념은 일찍하지 않다 오직 고구려와 발해에서만 볼수 있다 그렇다면 단군신화의 산생은 고구려건국보다 늦어야 되지 않을까? 천왕(天王)과 부인(符印)이라는 도교용어가 나오고 제석이라는 불교용어는 다시한번 불교와 도교가 들어온 시간을 상기하게 한다
3.동사고기(東事古記)에는 단군신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中國唐堯時 有檀君者 立國與今平壤 號曰朝鮮
言東方之地 受朝日光鮮也
子解夫婁 與于塗山之會 傳國致商武丁時乃絶
여기서 해부루는 단군의 아들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해부루는 해모수의 아들이다 이건 단군신화가 주몽신화보다 더 늦게 나왔다는 말이 아닐까? 주몽전설이 최후로 만들어진것이 제일 늦어서 4세기라면 단군신화는 4세기후에 만들어진걸것이다
4.시조 단군이 지었다는 천부경 ……
一始 始一 析三極 盡本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一積十鉅 匱化三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 大三合六 生七八九 運三四 成環五七 一妙衍 萬往萬來 用變不動本 本心本太陽昻明 人中天地一 一終 終一
천부경은 처음에 녹도문자(鹿圖文)로 기록되었고, 후에 신라의 최치원 전자(篆字)로써 옛 비석에 적힌 것을 찾아내어, 한자로 옮겨 세상에 전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최치원은 9-10세기에 있었으니 … 그때로부터 알려지기 시작했으니 … … 산생된 년대가 언제인지를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천부경내용으로 보아 … 상당히 성숙된 문자가 아니고서는 그 의미를 나타낼수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자를 제외한 기원전에 나온 성숙된 문자를 발견한적이 없다 이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나는 잘 모르나 천부경의 내용이 … …. 로자의 도교사상의 영향을 느낄수 있다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 줄이기로 하고
5.삼국유사에 인용한 고기는 "경인년"으로 되어있으나 일연은 주석을 달고 이를 반박하여, 정사년이라고 주장했고 정사년으로 계산하면 기원전 2333년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제왕운기는 또 무진년이라고 주장하니 기원전2333년이란 결론도 확실해 보이지 않는다
6.1993년 10월 13-15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단군과 고조선학술회의》에서
15편의 론문으로 단군릉에 있는 인물이 바로 단군임을 밝혔다
그러나 조선의 학자들도 인정하는것은 단군릉에 관한 제일 일찍한 기록은 1530년에 제작된 《新增東國輿地勝覽》이다 “有大墓 其一在縣西三裏 周長四百一十尺 民間傳爲(為)檀君墓” 그외 다른 기록은 《新增東國輿地勝覽》1786년 8월 9일 徐炯修가 한말 “臣任江東員時 于邑西約3裏處 見到有周長401尺之墓 互相傳説 且載于劉馨之《輿地記》” 여기서 16-18세기까지의 단군릉에 대한 기록은 민간의 전설에서 왔음을 알수있다 단군릉의 형태로 본다면 고구려말기의 고분으로 보이고 단군의 신분을 밝혀줄수 있는 유물도 없다 조선에서 공포한데 의히면 人骨검증은 지금으로 부터 5011년이라고 하나 사용한 연대측정법은 전자 자성 공명 연대측정법으로 지질시대에나 적용하는 단위가 만년에서 십만년 차이가 난다 이걸로 백년 단위의 역사를 재는 건 센티미터만 표시된 자 가지고 밀리미터 재는 거랑 비슷한 일이다. 일반적으로C14 탄소연대측정법을 사용하는 것이 통례인데 1만 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는 유물에 전자상자성공명법을 사용한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기술로 일 그람만 있어도 연대 측정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조선에서는 시료가 몇 킬로그램 이상 필요하며 그렇게 되면 유골이 거의 없어질 거라는 이유때문에 거절하고 있다 화석화현상 때문에 뼈의 구성성분이 변하면서 절대연도 측정의 정확성을 떨어진다는 주장도 있긴 하지만 그러면 그냥 동위원소 측정을 하면 될 일을 굳이 안 하고 버티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7.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역사연구소에서 쓴 《조선통사》(1973년판 178페지)에서는 단군신화를 삼국시기 산생물로 보기 있다 .
8.마늘은 기원전 1~2세기경 중국 진(晉)나라의 장화(長華)가 쓴 박물지(博物誌)와 한나라 장건의 호지(胡地 : 西域)에서 큰 마늘(蒜)을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근거들을 종합하여 본다면 … … 단군신화의 산생은 생각처럼 오래된것 같지는 않다
한자로 380자이며 본문은 다음과 같다
魏書云 乃往二千載 有壇君王儉 立都阿斯達[經云無葉山 亦云白岳 在白州地 或云在開城東 今白岳宮是] 開國號朝鮮 與高[堯]同時
古記云 昔有桓因[謂帝釋也]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卽太伯今妙香山] 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遺靈艾一炷 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 而不得人身 熊女者 無與爲婚 故 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假化而婚之 孕生子 號曰壇君王儉
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唐高卽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其未實] 都平壤城[今西京]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一作方] 忽山 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 周虎[武]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於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위서(魏書)에 적혀 있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었다.
아사달(阿斯達 )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불렀다.
이것은 요나라(高: *堯의 다른 이름임)와 같은 시대였다.
또 고기(古記)에 적혀 있기를,
“옛날에 환인의 서자 환웅(桓雄)이 늘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세상을 다스리고자 하였는데,
아버지가 자식의 뜻을 알고 세상을 내려다보니,
삼위태백(三危太白)이 가히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하므로(弘益人間),
이에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서 내려 보낸 후 하늘의 뜻을 펴도록 했다(理之: 理化世界).
환웅은 무리 3천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에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와
이곳을 신시(神市)라고 부르니 이 분을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고 한다.
그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먹고 사는 곡식(主穀)과 평생 살아가는 생명(主命), 인간에게 고통을 주는 질병(主病),
잘못에 따른 형벌(主刑), 인간의 선악(善惡) 등을 주관하고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들을 주관했으며,
세상에 있으면서 이치로 다스렸다(在世理化: 理化世界)
이때 곰 1마리와 범 1마리가 같은 굴에 살고 있으면서 그들은 항상 신웅(神熊: *환웅천왕)에게 사람이 되게 해 주기를 원하면서 기도를 하였다. 이때 신(神: *환웅천왕)께서 이들에게 신령스런 쑥 한 다발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곧 곰과 범은 이것을 받아서 먹고 21일간을 금기하여 곰은 여자의 몸을 얻게 되었으나, 범은 금기를 하지 못하여 사람의 몸을 얻지 못했다. 웅녀는 그와 혼인해 주는 이가 없으므로 항상 단수(壇樹: *후에는 檀樹라고 흔히 기록) 아래서 아이 잉태하기를 축원하였다. 환인은 이에 거짓 사람으로 변하여 이내 잉태하여 아이를 낳으니 이름이 단군왕검(壇君王儉: 檀君王儉)이라 하였다.
단군은 중국 당나라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당고가 즉위한 원년은 무신년이다. 그러니 50년이면 정사년이요 경인이 아니다. 사실인지 아닌지 의심스럽다)에 평양성(지금의 평양)에 도읍하여 비로소 조선이라 하였다. 또 주나라 호왕(虎王: 武王)이 즉위한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왕으로 봉함에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기었다가 후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서 산신이 되었는데, 그때 나이 1908세 이었다.
의문
1.≪삼국유사≫는 13세기에 쓰여진 사서이다. 고조선이 기원전 2세기에 멸망하였으니,
1천5백여 년이라는 시간적 차이가 있다.
2.단군신화의 기록에는 인도의 신화에서 나오는 제석천이라는 신이 나온다
이는 불교에서 나오는 신이다 그런데 불교가 반도에 들어온 것은 372년이다.
3.단군신화에 나오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 등은 도교용어이다. 도교가 반도에 들어온것이 6~7세기이다
4.위서에 나온다고 하나 위서에는 단군신화가 없다 실존된 위서에 있다고는 하나 확연치 않다
제왕운기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삼가 국사(國史)에 의거하고 한편으로는 각 본기(本紀)와 수이전(殊異傳)에 실린 바를 가려 뽑고, 요순(堯舜) 이래의 경전(經傳)과 제자백가(諸子百家)와 사서(史書) 들을 참조하여 허튼 말을 버리고 이치에 맞는 것을 취하여, 그 사적을 펴고 이를 노래함으로써 흥망한 그 연대를 밝히니 모두 1천 4백 60언이다.
(謹據國史하고 旁採各本紀與夫殊異傳所載하며, 參諸堯舜而來經傳子史하여 去浮辭 取正理하고 張其事而詠之하여 以明興亡年代하니 凡一千四百六十言이라)
요동에 하나의 별천지가 있으니 지역은 중국과 구별되어 나뉘었네.
큰 파도 넓은 바다 삼면을 둘러쌌고 북쪽에 있는 대륙과 끈처럼 이어져 있네(連陸) *1)
가운데 사방천리 여기가 조선이니, 강산의 뛰어난 모습은 천하에 이름이 높네.
농사지어 먹고살고 우물 파서 물마시며, 예의바른 국가이어서
중국인들도 소중화(小中華)라고 이름 지어 불렀다네.
(遼東別有一乾坤하니 斗與中朝區以分이라 洪濤萬頃圍三面하고 於北有陸連如線이라 中方千里是朝鮮이니 江山形勝名敷天이라 耕田鑿井禮義家라 華人題作小中華라)
처음에 어느 누가 나라를 열었던고 석제(釋帝)의 손자로 이름은 단군(檀君)일세.
요임금과 같은 때 무진년에 나라를 세워 순임금 지나 하(夏)나라까지 왕위에 계셨도다.
은나라 무정 8년 을미년에 아사달산에 들어가서 신선이 되었으니 *2)
나라를 누린 것이 1천 28년인데 그 조화는 상제(上帝)이신 환인(桓因)이 전한일 아니던가?
(初誰開國啓風雲고 釋帝之孫名檀君이라 並與帝高興戊辰하여 經虞歷夏居中宸이라 於殷虎丁八乙未에 入阿斯達山爲神이라 享國一千二十八이 無奈變化傳桓因가)
*1) 본기(本紀)에 기록되어 있기를 상제환인(上帝桓因)에게 서자(庶子)가 있었으니 웅(雄)이라고 하였더라. 기록에 적혀있기를 삼위태백(三危太白)으로 내려가서 홍익인간을 하도록 해라(弘益人間歟)하니 이에 따라서 웅(雄)이 천부인 3개를 받고 천인 3천명을 데리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오니 이를 단웅천왕(檀雄天王)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손녀(孫女: *천손 중의 한 여자로 해석함이 올바를 것임)로 하여금 약을 먹게 하여(飮藥: *환인천제가 약을 먹게 시킨 것으로 보임) 사람의 몸을 이루게 한 후 단수신(檀樹神: 檀雄天王)과 혼인을 하게 함으로서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단군이다.
조선지역에 머물면서 임금이 되시니 이와같은 연고로 시라(尸羅: 新羅), 고례(高禮: 高句麗), 남북옥저(南北沃沮), 동북부여(東北夫餘), 예(穢)와 맥(貊)이 모두 단군의 뒤를 이어온 나라들이라(皆檀君之壽也). 다스리기를 일천 이십 팔년이다가 아사달산으로 들어가서 신(神: 山神)이 되시니 돌아가시지 않는 연고이니라.
*2) 지금의 구월산이다. 다른 이름으로 궁홀(弓忽)이며 또 다른 이름은 삼위(三危)이니 사당이 아직까지 있다. 나라를 누린 것이 1천28년이었다.
그외 기록은 조선시대에 편집된것으로서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서 베낀것으로 추측된다
의문
첫째, 단군의 계보에 관한 인식이 다르다
삼국유사에서는 부모가 환웅과 웅녀라고 하여 부계가 천신과 연결된다
제왕운기에서는 단수신과 단웅의 손녀로 되어 있어 모계로 천신과 연결된다
그런데, 제왕운기의 다른 곳에서는 '석제釋帝의 손자 이름은 단군'이라 한다
둘째, 단군의 개국 연대가 다르다
삼국유사에 인용한 고기는 "경인년"으로 되어있으나,
일연은 주석을 달고 이를 반박하여, 정사년이라고 주장했고.
제왕운기는 무진년이라고 주장한다.
셋째, 단군과 기자의 계승 관계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
삼국유사에서는 기자의 동래로 말미암아 단군이 장당경으로 옮긴 것으로 되어 있다
제왕운기에서는 기자가 단군이 아사달 산신이 된 146년 뒤에 온 것으로 되어 있다
넷째, 왕검조선과 위만조선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보인다
삼국유사에서는 기자조선을 부기하여 왕검조선에서 위만조선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제왕운기에서는 왕검조선을 전조선, 기자조선을 후조선이라 하는 한편
위만조선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다섯째, 삼국유사에서는 단군의 단을 壇이라 하고 있는데,
제왕운기에 와서는 檀이라 표기하고 있고
이러한 표기는 에서도 나타나고 있고
조선후기 여러 사서까지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의문이라면 건국설화들도 오래되었기에 굳이 기록했다고 스스로 고백하는 김부식도
삼국의 건국신화을 넣으면서 단군신화는 담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단군신화는 언제 나왔을까?
분석해 본다면
1.환웅은 천신 환인의 서자(庶子)이다
그러면 이 신화의 산생년대는 적어도 적(嫡)과 서(庶)에 분간이 가능한 시대이다
고구려 초기의 혼인풍습은 데릴사위 옥저는 민며느리풍습이다 이는 부부를 중심으로 결혼하는 일부일처(一夫一妻) 일부다처(一夫多妻)와는 아직 거리가 있는 혼인풍습이다
그러면 단군신화의 산생은 고구려의 건국보다 늦어야 되지 않나 싶다
2.단군왕검은 천신의 서자(庶子) 환웅의 아들이다 다시 말해서 천손(天孫)이다
천제라는 개념이 언제부터 생겨났는지는 모르나 통치자를 천손으로 여기는 개념은 일찍하지 않다 오직 고구려와 발해에서만 볼수 있다 그렇다면 단군신화의 산생은 고구려건국보다 늦어야 되지 않을까? 천왕(天王)과 부인(符印)이라는 도교용어가 나오고 제석이라는 불교용어는 다시한번 불교와 도교가 들어온 시간을 상기하게 한다
3.동사고기(東事古記)에는 단군신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中國唐堯時 有檀君者 立國與今平壤 號曰朝鮮
言東方之地 受朝日光鮮也
子解夫婁 與于塗山之會 傳國致商武丁時乃絶
여기서 해부루는 단군의 아들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해부루는 해모수의 아들이다 이건 단군신화가 주몽신화보다 더 늦게 나왔다는 말이 아닐까? 주몽전설이 최후로 만들어진것이 제일 늦어서 4세기라면 단군신화는 4세기후에 만들어진걸것이다
4.시조 단군이 지었다는 천부경 ……
一始 始一 析三極 盡本 天一一 地一二 人一三 一積十鉅 匱化三 天二三 地二三 人二三 大三合六 生七八九 運三四 成環五七 一妙衍 萬往萬來 用變不動本 本心本太陽昻明 人中天地一 一終 終一
천부경은 처음에 녹도문자(鹿圖文)로 기록되었고, 후에 신라의 최치원 전자(篆字)로써 옛 비석에 적힌 것을 찾아내어, 한자로 옮겨 세상에 전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최치원은 9-10세기에 있었으니 … 그때로부터 알려지기 시작했으니 … … 산생된 년대가 언제인지를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천부경내용으로 보아 … 상당히 성숙된 문자가 아니고서는 그 의미를 나타낼수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자를 제외한 기원전에 나온 성숙된 문자를 발견한적이 없다 이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나는 잘 모르나 천부경의 내용이 … …. 로자의 도교사상의 영향을 느낄수 있다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 줄이기로 하고
5.삼국유사에 인용한 고기는 "경인년"으로 되어있으나 일연은 주석을 달고 이를 반박하여, 정사년이라고 주장했고 정사년으로 계산하면 기원전 2333년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제왕운기는 또 무진년이라고 주장하니 기원전2333년이란 결론도 확실해 보이지 않는다
6.1993년 10월 13-15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단군과 고조선학술회의》에서
15편의 론문으로 단군릉에 있는 인물이 바로 단군임을 밝혔다
그러나 조선의 학자들도 인정하는것은 단군릉에 관한 제일 일찍한 기록은 1530년에 제작된 《新增東國輿地勝覽》이다 “有大墓 其一在縣西三裏 周長四百一十尺 民間傳爲(為)檀君墓” 그외 다른 기록은 《新增東國輿地勝覽》1786년 8월 9일 徐炯修가 한말 “臣任江東員時 于邑西約3裏處 見到有周長401尺之墓 互相傳説 且載于劉馨之《輿地記》” 여기서 16-18세기까지의 단군릉에 대한 기록은 민간의 전설에서 왔음을 알수있다 단군릉의 형태로 본다면 고구려말기의 고분으로 보이고 단군의 신분을 밝혀줄수 있는 유물도 없다 조선에서 공포한데 의히면 人骨검증은 지금으로 부터 5011년이라고 하나 사용한 연대측정법은 전자 자성 공명 연대측정법으로 지질시대에나 적용하는 단위가 만년에서 십만년 차이가 난다 이걸로 백년 단위의 역사를 재는 건 센티미터만 표시된 자 가지고 밀리미터 재는 거랑 비슷한 일이다. 일반적으로C14 탄소연대측정법을 사용하는 것이 통례인데 1만 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는 유물에 전자상자성공명법을 사용한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기술로 일 그람만 있어도 연대 측정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조선에서는 시료가 몇 킬로그램 이상 필요하며 그렇게 되면 유골이 거의 없어질 거라는 이유때문에 거절하고 있다 화석화현상 때문에 뼈의 구성성분이 변하면서 절대연도 측정의 정확성을 떨어진다는 주장도 있긴 하지만 그러면 그냥 동위원소 측정을 하면 될 일을 굳이 안 하고 버티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7.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역사연구소에서 쓴 《조선통사》(1973년판 178페지)에서는 단군신화를 삼국시기 산생물로 보기 있다 .
8.마늘은 기원전 1~2세기경 중국 진(晉)나라의 장화(長華)가 쓴 박물지(博物誌)와 한나라 장건의 호지(胡地 : 西域)에서 큰 마늘(蒜)을 가져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근거들을 종합하여 본다면 … … 단군신화의 산생은 생각처럼 오래된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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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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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미주가효 작성시간 08.06.12 분석 3(단군,해모수와 모두 연결되는 해부루의 존재) 정확히 주장하는 바를 모르겠지만, 아마 글쓴이는 주몽설화에 나오는 '해부루' 의 존재를 단군신화의 일부 버전에서 차용하였으므로 단군신화는 주몽설화보다 시대적으로 뒤쳐질 것이다... 라는 주장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논리는 정확히 거꾸로 하여 주몽설화가 단군신화보다 더 뒤쳐진다는 이야기로도 연결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이 논의는 무의미합니다. (게다가 해모수-해부루의 관계에 대해서는 양자가 '별 관계 없다' 는 식의 주몽설화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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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미주가효 작성시간 08.06.12 분석 8(마늘은 전래식물임) 마늘이 서역에서 들어왔고, 그 이전에는 동아시아에 없었으리라는 지적에 동의합니다. 문제는 마늘 도입 이전에도 蒜 이라는 글자와 이 글자가 가리키는 식물이 있었다는 겁니다. 바로 '달래' 입니다. 예전에 딴지일보에서 어떤 분이 이 문제에 대해 글을 올린 바 있었는데, 그 내용 중에는 <본초강목> 에서는 '한인(장건)이 마늘을 들여오기 전에는 蒜 은 소산(달래)를 의미했는데, 마늘 도입 이후에 소산과 대산(마늘)을 구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실제 옥편을 찾아 보시면 蒜 을 '달래 산' 이라고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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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미주가효 작성시간 08.06.12 마늘과 달리 달래는 한반도~만주 지역의 산에서 충분히 많은 양이 야생으로 자라고 있습니다. 쑥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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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로완동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8.06.12 분석 2(천신의 자손 관념) 반론에 대하여 ..... 주몽전설에 관한 분석을 고구려토론방에 올리겠습니다 저의 관점이 추리와 추측에 의한 관점입니다만 .... 아니다라고 확실히 부정할수 있는 그런 사료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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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그리운길 작성시간 08.06.16 사료의 문제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신화와 전설은 학술적인 전달에 의미를 두기보다는 의미전달에 치중한 걸로 아는데요...의미전달을 용이하기 위하여 어휘와 단어를 차용하고 도용한것으로 압니다..신화와 전설을 학술적인 면으로 끌어오기 위해선 많은 무리수가 필요합니다...많은 무리수들을 해석하는건 자유지만...의미까지 희석하지 않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