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리영 전투 ⑴ -백제와 공손씨 연나라

작성자김준수|작성시간08.10.15|조회수695 목록 댓글 6

사실 말은 거창하게 했지만 솔직히 제 글의 논지 등에 미비한 점들이 적지 않아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모자란 부분이 있다면 보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면 글을 시작합니다.

 

 

백제가 건국 시조인 온조왕 이래 북쪽에 위치한 낙랑의 공세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는지는 미지수지만 백제의 낙랑에 대한 감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후 2세기 후반에 들어와 서토(중국) 내부의 정치적 혼란으로 군현의 통제력이 약화되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동한 초대 군주인 세조 유 수 정도를 제외하고는 동한이 이렇다하게 낙랑에 대한 지원도 하지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서기 184년 동한 내부에서 태평도 교도들이 봉기한 이후로는(이른바 ‘황건적의 난’입니다) 아예 손을 놓은 나머지 가뜩이나 약화되던 군현 자체가 현격하게 약세로 굳어졌다 함이 옳겠지요.

 

국제관계에서는 ‘넘의 불행이 곧 나의 행복’인 법입니다. 한반도에서 낙랑의 세력이 현격하게 약세가 드러나자 이는 곧바로 고구려의 세력 확대로 이어졌습니다. 물론 낙랑 자체의 몸부림과는 별도로 고구려가 지속적으로 세력을 확장하기는 했습니다만.   

 

한데 고구려는 물론 엉뚱하게 삼한 지역에서도 마한, 또 마한 지역에서도 백제에 문제가 생겨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시 요동 서부 지방에서 독자적 정권을 구축한 공손씨의 연나라가 낙랑군 남쪽에 대방군을 설치하였던 것입니다(204년).

 

이러한 동아시아의 변화 속에서 백제는 새로운 발전의 전환을 맞이하였습니다. 여타 마한의 국가들에 비한다면 중앙집권체제가 상대적으로 잘 갖추어진 백제지만 여전히 갈 길이 남은 상태였습니다.

 

한데 공손씨 연나라의 적당한(!) 압박은 오히려 백제를 도와준 셈이 되었지요. 후대의 조위 왕조처럼 여러 소국들을 초토화 시키는 것도 아니고, 동한처럼 방치 플레이로 일관한 것도 아닌 묘한 상황 말입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지만 위기 의식을 공유하는 것이 그 나라를 단결시키기 마련입니다. 낙랑 지역에 대해 사실상 방치 플레이로 일관한 동한과 달리 공손씨의 연나라 정권은 고구려 견제 차원에서라도 낙랑 지역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고 심지어는 낙랑의 남쪽을 분할하여 황해도 지역에 대방을 설치한 것이지요.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으나『삼국사기』「백제본기」를 살피면 제5대 초고왕과 제6대 구수왕이 수시로 말갈이라 불리는 세력 및 신라와 전쟁을 치르는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초고왕의 경우를 보면 특이한 상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서기 204년을 기점으로 해서 그 이전에는 신라(신라 중앙 정부 그 자체라기 보다는 신라와 줄을 댄 진한 소국들)와, 그 이후에는 (연나라의 회유 혹은 뒷받침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말갈과 수시로 싸웠다는 점입니다.

 

너무 지나치면 문제가 생기겠지만 대외전쟁은 느슨하게 통합되어가는 국가를 전시체제하에 둠으로서 완전하게 군주권을 통솔․장악할 수 있으며, 국가 구성원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좋은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백제와 신라에 줄을 대던 소국들은 각기 ‘마한인’과 ‘진한인’에서 차츰 그대로 ‘백제인’과 ‘신라인’으로 되어갔던 듯합니다. 그런 전쟁이니만큼 백제와 신라가 중앙 정부 차원에서 갈등을 빚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보는 것이지요.

 

그런 가운데 백제와 신라의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듭니다. 우선 신라는 서기 214년 백제와 다시 싸울 때까지 왜국의 침입과 가야 문제로 인해 백제와 싸울 겨를이 없었지요.

 

한편 백제는 더욱 절박한 상태였습니다. 나라 안에 흉조라고 일컬어지는 혜성이 나타나는가 하면 메뚜기 떼가 창궐하여 곡식이 잘 생기지 않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러니 나라 안에 불만을 가진 농민들이 이른바 ‘도적’이 되게 마련이고 초고왕은 이들을 어루만지는데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이 '도적'이 백제에 붙었던 마한 세력들일 가능성도 생각해봅니다.).

 

그러다가 서기 210년 음력 10월이 되자 올 것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말갈이 백제의 사도성을 공격한 것이지요. 여기서 제가 생각할 때 문제점은 이러한 말갈의 공격과 연나라 공손씨 정권의 행보가 절대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 있다는 부분입니다.

 

서기 204년 사망한 아버지인 공손 도로부터 군주직을 이어 받은 공손 강은 낙랑 남쪽에 대방을 설치합니다. 동한과 달리 공손씨의 연나라는 고구려 및 삼한 지역의 행보를 예의주시한다는 의사표시를 분명히 한 것입니다.

 

서기 207년 자신의 나라로 도망해 온 원 희, 원 상 형제를 참수하여 그 수급을 조 조에게로 보내 서쪽을 안정시킨 공손 강은 차츰 남쪽에 대한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서기 210년까지의 3년 세월은 고구려 및 삼한 지역에 대해 공세를 취할 수 있는 준비를 하거나 혹은 대방과 마찰을 빚는 적대 세력과 맞설만한 세력(들)을 부추기거나 양성하기에 충분한 세월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도 공손 강은 영동 예와 삼한 특히 마한 지역에 대한 공세를 감행했습니다. 다음 기록을 보시지요.

 

'건안(196년~220년 3월)'중에 '공손강'이 '둔유현'의 남쪽 거친땅을 나누어 '대방군'으로 삼고, '공손 모', '장 창'등을 보내어 (한(漢)의) 유민을 모아, 병사를 일으켜 '한(韓)과 예'를 쳤다. 옛 백성들이 점점 돌아오니, 이후로 '왜'와 '한'이 드디어 '대방'에 속하게 되었다.

『삼국지(三國志)』卷三十「위서(魏書) 한韓(馬韓 마한) 전」

 

그래서일까요? 건국 초와 달리 한동안 얌전히 지내던 말갈이 서기 210년 음력 10월에 백제를 공격하고 맙니다. 이는 단독행동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비빌 언덕’이 있어 전쟁을 단행했을 확률이 크지요. 물론 여기서 나오는 한 즉 마한 국가들 중 백제가 유독 공손씨 연나라의 공격을 받았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런데 구수왕의 행동이 상당히 묘합니다. 서기 204년 이전 신라(그보다는 그에 영향을 받거나 부속된 진한 열국들)와 싸울 때는 서기 188년, 189년, 190년 등 내리 3년을 싸운 적도 있던 그가 말갈과 싸울 때는 만 4년을 기다려서야 공세를 취합니다.

 

말갈에 대해서는 이리저리 논란이 많지만 대체로 백제를 크게 괴롭힌 세력이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한데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지만 당시 유난하게 세력이 막강하지는 않았을 말갈에 대해 무려 4년의 세월을 기다렸다가 비로소 공세를 취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입니다(만약 그 말갈의 정체가 마한에서는 비교적 강국인 신분고국이라면 다소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한데 이 문제는 말갈의 배후에 있는, 즉 그들을 지원해주는 세력이 있다고 한다면 나름대로 납득할 수 있는 경우입니다. 더욱이 직접적인 원군 지원보다는 물자 등의 보급만이라면 일이 더욱 쉬워지겠지요(공손씨 정권이 직접 무력 개입을 했을 지도 모르나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게 잡고 있습니다.).

 

아마도 초고왕은 단순히 ‘말갈’이라는 세력만을 두고 싸웠다기보다는 말갈의 배후에 있는 공손씨의 ‘연나라 정권’을 염두에 두고 공세를 취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서기 210년 음력 10월이래, 거의 만 4년을 기다렸다가 음력 9월에 공세를 단행하고 한 달 후인 서기 214년 10월 말갈의 정예 기병을 맞이하는 때 그가 죽음을 맞이하는(개인적으로는 노환과 과로사가 겹친 증세 아닌가 싶습니다만) 상황이 벌어질 리 만무하지요.

 

이 시기에 백제 북쪽에 있었던 신분고국이 대방 및 말갈과는 어떤 관계에 있으며 공손씨 연나라 및 백제와는 어느 정도의 깊이로 협력과 대립을 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대체로 통설은 신분고국이 말갈로 표현되는 세력 중 하나라고 하는 듯합니다.

 

여하간 말갈의 공세는 계속되었던 모양입니다. 초고왕의 장남인 구수왕의 재위 3년 즉 서기 216년 음력 8월에 말갈은 백제의 적현성을 포위하는 등 공세를 취했습니다. 하지만 만2년여에 걸쳐 힘을 비축한 백제를 이기기 어려웠던지 말갈군은 물러갑니다.

 

공손 강의 공작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나 설령 있었다고 해도, 이 시기를 기점으로 공손 강의 배후 공작은 약화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좋은 증거가 구수왕 5년인 서기 218년 신라(물론 신라 중앙 정부 그 자체라고 보기는 미심쩍은 데도 있습니다)에 대해 공세를 취한 사건입니다. 최전선인 말갈과의 상태가 호전되거나 혹은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공세를 취할 수 없으니까요.

 

서기 220년 10월 백제의 왕성 서문에 불이 났습니다. 그 기회를 틈타 말갈이 공격해 들어왔는데 이때는 공손씨와는 무관하게 단독으로 침공한 듯합니다. 왜냐하면 우선 말갈이 이번에도 별 성과를 얻지 못하고 패퇴한데다가 공손씨의 연나라에서도 사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왕조 내부에서 별도로 존속했던) 서토의 위 왕국에서 위왕인 조 조가 정월에 별세하는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지요. 위왕 조 조는 2월 21일 고릉(高陵)에 묻혔으니 최소한 그 기간 동안은 긴장을 늦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삼국지』「위서 문제기」에 의하면 3월 3일에는 예맥과 부여의 선우, 언기와 우전의 왕이 모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쳤다고 합니다. 여기서 조공이라는 표현은 동한 왕조나 위 왕국의 표현이니 그렇다하고 언기와 우전의 왕이 사신을 파견한 것도 그렇다고 접어둘 수 있습니다.

 

문제는 예맥과 부여의 선우라는 표현인데 부여야 공손씨 연나라의 동맹국이니 신경은 쓸지언정 염려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연나라 입장에서 정말 골칫거리는 '예맥'이라고 표현된 나라의 정체겠지요. 학자 분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는 이 예맥의 선우가 당시 고구려의 제왕이었던 산상왕 고연우 아닌가 싶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당시 고구려의 제1적국이었던 연나라 입장에서는 꽤나 신경이 쏠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조 비는 본격적으로 왕조 교체를 추진하던 시기인만큼 위 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연나라의 입장에서는 딴전을 피울 때가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이 시기에는 공손 강의 건강 상태도 그리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서기 221년에는 공손씨 연나라 정권의 군주가 공손 강의 동생인 공손 공으로 바뀌었으니까요.

 

백제의 왕성에 불이 났던 서기 220년 10월은 서토에서 큰 변화가 있었던 시기입니다. 즉 400여년을 지속했던 한 왕조가 완전히 문을 닫고 위 왕조가 출범했기 때문이지요.

 

이후 공손씨 연나라의 배후공작이나 말갈 지원은(어느 정도인지는 의문이지만 설령 있었다고 해도) 줄은 듯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 공손 강의 뒤를 이은 군주 공손 공이 그다지 강력한 지도자가 아니어서 그런가 싶습니다. 현실적으로도 고구려 견제가 우선이었겠지요. 

 

그런 까닭인지 구수왕(이라기보다는 그 산하의 마한 소국들로 보임)은 신라(의 중앙정부라기 보다는 그에 예속된 세력이겠지만)에 대한 공세를 더욱 강화합니다. 구수왕 9년인 서기 222년 음력 10월에 그는 신라에게 공세를 취했고 서기 218년 내해 이사금에게 패배했던 것과는 반대로 이번에는 대승을 거둡니다.

 

이렇게 되자 신라는 서기 224년 7월에 백제에 대해 반격을 가했고, 백제는 크게 패하고 맙니다. 이후 신라와는 전쟁을 하지 않게 되는데 이는 초고왕 이래로 소모가 컸던 국력을 추스르기 위함인 것으로 보입니다. 다행히도 공손씨 '연나라'의  배후 지원을 받는 것으로 보이는 '말갈'도 만 5년간은 백제를 침공하지 않았지요.

 

그런 중 서기 228년 연나라에서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숙부인 공손 공을 몰아내고 공손 강의 둘째 아들인 공손 연이 군주직을 차지하는 사건이 발생했지요.

 

공손 연은 그의 숙부와 달리 그의 할아버지나 아버지를 닮은 듯 호전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훗날의 일이지만 위 왕조에게 도전장을 내밀 정도로 간이 큰 인물이라 할 수 있지요.

 

구수왕 16년인 서기 229년 11월에 백제 전 지역에서 전염병이 돌자, 말갈이 공격을 가해왔습니다. 여기서 백제는 말갈에게 패하고 맙니다. 

 

그럼에도 이 시점에서는 아무래도 말갈의 단독 행동이었을 개연성이 큽니다. 공손 강처럼 공손 연이 대방 지역에 대해 적극 행동을 했을 가능성은 그다지 없어보입니다.

 

참고로 윤선태 같은 학자는『삼국지』의 '신분고국'이『삼국사기』에 나오는 '말갈'이며 백제를 남쪽으로 밀어낸 세력이라고 주장합니다. 신분고국이 백제를 남쪽으로 밀어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지 않지만 두 나라가 사소한 국경분쟁이든, 마한 북부의 주도권을 두고 다투었든 간에 서로 신경이 거슬리는 상대였을 가능성은 적지 않은 듯합니다.   

 

여하간 서기 229년인 이때는 동오의 손 권이 칭제하고 완전하게 삼국 정립으로 접어든 시기입니다. 공손 연으로서는 삼국의 시선이 모두 손 권에게 쏠리는 만큼 긴장감도 높아졌을 것입니다. 한 눈 팔 여유 따위는 없지요.

 

서기 234년, 백제는 무려 제왕이 3명이 있었던 해였습니다. 구수왕이 이 해에 죽고, 그 뒤를 사반왕이 이었지만, 고이왕이 사반왕을 몰아내고 즉위했기 때문입니다.

 

공손 연은 서기 229년부터 서서히 서토의 상황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장 동오 및 조위 그리고 제1적국인 고구려와의 관계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나름 어려운 처지였던 백제에 대해 그다지 신경썼다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이후 서기 238년 공손씨의 연나라 정권이 망하기까지 백제를 비롯한 마한 열국은 비교적 태평한 세월을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연나라의 뒤를 이어 낙랑과 대방에 들어선 세력은 비교적 평화적이었던 연나라와는 달리 삼한 열국들, 특히 마한 열국에 압박을 가하게 됩니다.

 

대체 그 정체가 무엇일까요?

 

다음 글에서 이야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그리운길 | 작성시간 08.10.16 글쎄요...님의 글에 태클 걸기 위해서 댓글을 남기는 거 아니라는 점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사로국이라고 검색해 보시면..신라라는 국호는 지증왕때 쓰는걸로 나와있습니다...또한 백제사 신라사 가야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얘기중엔 삼국사기의 백제와 신라의 싸움은 백제가 마한을 정복했던 그리고 신라가 진한의 대표가 되었던 후가 되었을 거라고 합니다..즉 삼국사기의 온조왕편에 대한 의구심과 삼국사기에서 백제와 신라의 초기 전투는 의구심이 든다는 점과 대방과 백제는 우호관계, 말갈의 배후지원세력은 고구려,,대방은 친중국적인 예맥족의 소국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다는 점도 염두에 두셨으면 합니다
  • 작성자麗輝 | 작성시간 08.10.20 형님 오랜만에 재밌는 글들을 연일 연재해주시니 매번 눈이 즐겁고 머리가 따꼼따꼼합니다. ^^ 음. 몇가지 의문 사항 및 지적할 부분이 있어 몇자 적겠습니다. 너그럽게 수용해주시길 바랍니다. 먼저 삼국지에 기록된 마한 50여개국의 기술 순서가 지형적으로 북-남으로 서술되었을까? 에 대한 의문입니다. 그게 학계 통설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렇다할 추정 근거도 너무 빈약한 상태에서 신분고국을 말갈과 동일시하는 것이 조금 의문입니다. 말갈의 경우, 통설대로 고구려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먼저 문헌을 보면 말갈 등장 이후 백제의 지배층이 바뀌는 것이 주목됩니다. 고이왕이 대표적인 인물이죠. 그리고 고고학적
  • 작성자麗輝 | 작성시간 08.10.20 으로 석촌동 등지에 거대한 적석총이 등장하죠. 현재 고고학계에서 이를 말갈계 혹은 백제계로 이해하는데 전 개인적으로 말갈계로 보는 것에 동의합니다. 적석총이 특정 집단의 묘제라는 점을 감안했을때 한강 유역에 출현한 적석총은 고구려(가능성은 거의 없기에) 혹은 고구려와 영향이 있는 집단이 남긴 것이라 봐야겠죠. 오늘날 말갈이 신분고국과 연결될만한 고고자료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연관성이 너무 적습니다. 일단 신분고국이 백제 북쪽에 있던 적대세력이라는 전제조건에 전 의문을 품는 바입니다. 기본적으로 저와 생각이 다르기에 몇자 적었습니다. ^^ 암튼 재밌는 글 계속 읽고 있으므로 고생하십쇼~
  • 작성자김준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11.21 신분고국이 백제와 적대관계인지 아닌지, 그리고 신분고국이 말갈이라 불리던 세력 중 하나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이 필요할 것입니다. 문제는 고구려가 '말갈'이라 불리는 세력에게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해보이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나 영향력이 있었는지, 그리고 황해남도 남쪽과 경기도 북부를 나름 장악하던 세력의 주체가 무엇인지가 의문이지요. 통설을 꼭 믿자는 것은 아니지만 신분고국이 만약 이 세력의 주체라면 고구려가 '마한'을 거느렸다는 말도 나름대로는 이해가 되는 측면인데 여하간 능력에 비해 너무 큰 일을 벌인 듯도 싶습니다. 그래도 고고학 성과를 제시하면서 수정할 부분을 알려주니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麗輝 | 작성시간 08.10.24 별 말씀을요.^^ 이 부분은 늘 저도 고민으로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현재 발해시대 말갈에 대해서는 고고학적인 연구가 어느정도 진행되어 있습니다. 형식은 고구려토기와 비슷하지만 훨씬 조잡한 방법으로 만들어진 말갈토기 등이 많이 있거덩요. 하지만 한반도 말갈에 대해서는 그런 게 없어서리. 흠. 적석총 말고 더 많은 고고자료가 축적되면 좋겠지만요. 암튼~이 부분은 저도 더 공부를 해야만 형님한테 뭔가 더 도움이 될만한 얘기를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신분고국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을 더 해봐야겠습니다. 가능성을 많이 열어두고 공부를 해야할 부분같네요~^^ ㅋ 그럼 수고하십쇼~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