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리영 전투 ⑵ - 통행본? 백납본? 뭐 이렇게 복잡해?

작성자김준수|작성시간08.10.20|조회수525 목록 댓글 4

안녕하십니까? 지난 글에 이어서 기리영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지요.

 

글을 쓰다보니 막상 기리영 전투 그 자체보다는 배경이나 낙랑 및 대방에 대해 더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사실 기리영 전투 그 자체는 제가 아는 한 어이 없을 정도로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결론인 즉슨 '(낙랑과 대방) 2군이 마침내 한(韓)을 멸하였다.' 한데 전쟁사를 세부적으로 아시는 분들에게는 전혀 다른 이야기일지 모르겠습니다.

 

여하간 지난 글에 이어 계속 진행합니다.

 

흔히 통설에서 제기되는 이야기가『삼국지』「(마)한전」의 각국 국명은 대방을 중심으로 마한전이 말하는 순서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간다는 견해, 다시 말해 임진강 방면에서 전라남도 해안 방향의 순서로 열거되었으므로 백제 이전에 언급된 나라들은 모두 경기도 일원에 있었다는 주장입니다.


참고로『삼국지』「위지 동이전」에 나오는 마한 북부의 나라들 이름은 순서대로 다음과 같습니다.


원양국(爰襄國), 모수국(牟水國), 상외국(桑外國), 소석삭(색)국(小石索國), 대석삭(색)국(大石索國), 우휴모탁국(優休牟涿國), 신분고국(臣濆沽國), 백제국(伯濟國) [이하 국가들은 생략] 

 

물론 이러한 견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원양국부터 신분고국이 모두 경기도 일대에만 걸쳐서 존재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다고 하니 말입니다. 혹은 황해남도 남부와 예성강 북쪽에 이 나라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해보지만 그 나라들을 과연 어느 지역에 구체적으로 비정할 수 있을 지는 명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당장 원양국(爰襄國)만해도, 경기도 화성시(華城市) 설과 파주시(坡州市) 설로 엇갈리고 있습니다. 최근 경향은 파주시의 경우 육계토성이 신분고국으로 추정된다고 하여 일단 원양국은 경기도 화성시 설로 굳어지고 있다합니다.

 

그럼에도 과연 원양국이 통설에서 말하는 순서대로 최북단에 있었던 것인지도 의심스럽고, 설령 원양국을 마한의 최북단으로 상정한다 해도 그 원양국이 과연 경기도 화성시라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습니다.

 

대방을 중심으로 마한전이 말하는 순서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간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통설은 나름대로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다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원양국의 경우 근거지는 오히려 황해남도쪽에 있었을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마한전의 해석을 꼭 이런 방식(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으로만 하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문제도 있으므로 섣부르게 말할 수는 없으니 다소 막막하군요.

 

마찬가지로 모수국이 수원이라는 설이나, 상외국이 경기도 화성면에 있다는 설은 그렇다해도 소석삭국이 뜬금없이 강화 교동에, 대석삭국이 강화에 있다는 설 등등 혼란스러운 문제가 한둘이 아닙니다. 참고로 우휴모탁국은 부천에 비정되어 있다지만 확실한지는 다소 의문입니다.

 

그나마 말할 수 있는 부분은 통설을 따라도 무리가 없는 부분입니다. 즉 대방에 있는 군사기지 기리영이 황해북도 평산군 인산면 기린리 일대에 있었다는 추정과 최근 발굴된 풍납토성이나 그 언저리가 백제의 도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면 그 사이에 어떤 형태로든 마한 북부의 소국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지만 기리영 전투의 주체가 과연 어느 나라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는 것 같습니다. 문안식 조선대 객원 교수는 백제 주도설을 내세우는 반면 박대재 고려대 교수의 경우는 신분고국 주도설을 주장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왕의 연구에서는 '마한 거수설', '백제 신지설(백제국 고이왕 설)', '목지국 신지(진왕)설', '신책첨한설(신분활국설)' 등이 주장되었지요. 

 

여기서 복잡하다면 복잡한 판본 문제가 나옵니다. 흔히 '백제 신지설'을 지지하는 분들은 '통행본'을 '신책첨한'설을 지지하는 분들은 '백납본'을 근거로 각자의 학설들을 주장하고 있지요.

 

통행본(通行本)은 사전적인 의미로는 ‘일반에게 널리 통하는 책’이라고 합니다당시에 상대적으로 구하기 쉬운 책이 통행본이라고 하더군요. 이 통행본으로서 유명한 판본은 명대의「모씨(毛氏) 급고각본(汲古閣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혹시나해서 제가 검색한 급고각본에 대해 알립니다.

 

 

급고각(汲古閣)     
중국 명말(明末)에 장쑤성[江蘇省] 창서우현[常熟縣]의 모 진(毛晋)이 지은 장서관(藏書館).

재력이 풍부했던 모진은 서적 수집에 주력하여 급고각의 장서 수는 8만 4000권에 이르렀다고 한다. 수집 장서의 내용은 경서(經書) ·사서(史書) ·제자(諸子) ·문집(文集) 등의 전반에 걸쳐 있으며, 특히 송판본(宋版本)의 수장(收藏)은 당대 최고라 하였다.

장서 가운데 《십삼경주소(十三經注疏)》 《십칠사(十七史)》 《진체비서(津逮秘書)》 《문선(文選)》 《한위육조일백삼가집(漢魏六朝一百三家集)》 및 《송명가사(宋名家詞)》 등을 비롯한 여러 서적이 복각(覆刻)되어 급고각본(汲古閣本)으로 크게 출판되었다. 급고각본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널리 유포되어 있으며, 후세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

 

 

한편 백납본(百衲本)이란 한 종류의 서적을 만드는데 사용된 판본이 여러 종류일 때를 말한다고 합니다. 

 

과거에 책을 간행할 때는 한 번에 여러 부를 간행하였습니다. 간행 방법은 목판 인쇄, 필사 등 여러가지가 있었지요. 그런데 이런 책들이 전해지다가 화재 등으로 인하여 책의 일부가 소실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이 경우 각각의 책에서 보존 상태가 좋은 부분을 선별하여 모아 다시 하나의 책, 한 질로 복원하는 경우가 있습지요.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이렇게 복원된 책을 백납본이라고 합니다.

 

이 책은 남송 시기에 나온 책이라고 하지요.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지난 2008년 8월 13일 상해도서전이 개막되었을 때 도서전 현장에서는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비싼 책으로 "백납본 24사(百衲本二十四史)"가 등장했으며 가격이 무려 38만원(인민폐)에 달했다고 하네요. "백납본 24사"는 분류되어 나무궤에 보존되어 있는데 사기(史記), 송사(宋史), 수서(隋書) 등 24격으로 나뉜다고 하더군요.

 

이런 백납본이라고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백납본은 여러 판본을 조합하여 복원하다 보니, 맨 처음에 쓰여진 원전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는군요. 
 

저도 어느 쪽이 더 타당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워낙 양쪽 설이 팽팽하니 말입니다. 최근 경향만 보자면 기존의 '백제 신지설'보다는 '신책첨한설'이 통설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여기서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삼국지』와『삼국사기』를 결부시켜볼 때 할 수 있는 말은 백제가 서기 3세기에 말갈에 쫓겨내려와 남쪽으로 천도했다는 방식의 주장에 대해서는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정도로 우선 말해볼 수 있을 듯합니다.『삼국사기』초기기록 문제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이야기가 있을 수 있고, 저도 어디까지 믿어야 할 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초기 기록을 서기 3세기에 일괄 소급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공손씨 연나라 때보다 조위 왕조가 낙랑과 대방 문제에 개입한 점이 백제로서는 더욱 큰 외부 압박으로 다가왔을 것이며, 이에 대처하려는 노력의 산물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때가 고이왕 시대라는 사실입니다. 연나라가 그럭저럭 남쪽의 삼한(특히 마한) 사회와 공존을 선택했다면 조위 왕조의 경우 수 틀리면 '밟아버린다'는 자세도 불사하는 형태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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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그리운길 | 작성시간 08.10.21 글 잘 읽었습니다...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온조왕부터 근초고왕 21년 까지는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알고 있는데요.특히 영토나 전쟁기사부분은....ㅜ.ㅜ
  • 작성자소하 | 작성시간 08.10.25 백납본은 남송시대에 나온것이 아닙니다. 청나라 시절에 무영전이 나온 이후로 무영전본이 유행되었고, 민간에서는 모씨급고각이 유통되었습니다. 백납본은 장원제 선생이 24사의 가장 오래된 판본들을 모아서 편찬한 것입니다. 대부분 송원시대의 판본이죠. 이후에 일부분은 더 오래된 판본들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백납본이 의거한 판본에 대해서는 이글을 참조하세요. http://tinis74.egloos.com/362121 현재 유통되는 중화서국 <삼국지>의 서문에는 무슨 판본에 의거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단지 4가지 판본에서 좋은 것을 따랐다고만 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중심으로 삼은 판본은 무영전본 같기는 합니다.
  • 작성자김준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8.10.25 그렇군요. 소하님의 정보에 감사드립니다. 최초 제작 시기는 12세기 말인 남송 소희(紹熙) 연간(1190~1194)이라 알고 있었는데 이런 부분들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군요. 현존하는 백납본이 중국 근대사상 손꼽는 지식인에 속하는(무술변법에도 참여했더군요) 장원제(張元濟, 1867-1959)라는 양반에 의해 만들어졌다니. 역시 회원분들께서 아시는 바가 넓고도 깊다는 생각이 새삼 듭니다. 다시 한 번 부족한 부분을 짚어주신 소하님께 감사말씀드립니다.
  • 작성자百濟 牟大王 | 작성시간 08.11.02 기리영전투... 신분고국... 귀에걸면 귀걸이 코에골면 코걸이. 백제초기는 늪입니다. 빠져나올 수 없는 늪;; 저는 ㅈㅈ 때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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