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지난 글에서는 다소 뜬금 없이 판본 어떻고 한전의 해석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다소 딱딱한 이야기가 많았는데 그것에 따라 학설 자체가 갈리는 이유가 있었으므로 부득불 짚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역사를 논하는 글에서 이렇게 이야기하면 좀 어떨지 싶지만, 혹시 재미 없게 읽으신 회원분들이 계시다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신분고국(臣濆沽國)은 신분활국(臣濆活國) 혹은 신분첨국(臣濆沾國)으로도 전해지는 마한 북부의 나라입니다. 이 신분고국이라는 국명은『삼국지(三國志)』권30「위서(魏書) 30 /동이(東夷)/ 한(韓)전」에서 나오는 용어입니다.
여전히 논란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여기서는 일단 낙랑 및 대방과 격렬한 전쟁을 벌인 주체를 신분고국으로 설정하고 이야기를 진행해보려 합니다.
조위 왕조의 정시 연간 즉 240~248년 사이의 기간에 일어나는 특징은 유난하게 '중소 규모 전쟁' 내지는 '국제 전쟁'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물론 흉노-서한 전쟁, 적벽전, 오장원-합비전 같이 수십만이 움직이는 대규모 전쟁은 발생하지 않았다 해도 평화로운 세월은 별로 없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조위 왕조의 기록 중에 '2군이 마침내 한(韓)을 멸망시켰다'는 것으로 보아 표현에 과장이 있을 지언정 삼한, 특히 마한 북부에 나름대로 규모가 있는 나라를 멸망시키지 않고서는 이러한 기술은 할 수 없다고 봅니다. 만약 백제가 기리영 전투를 주도했다면 망하지는 않았더라도 꽤 타격을 받은 것으로 기술되었을 것이지만 제가 살펴본 바로는 그런 흔적은 없군요. 제 살핌이 부족해서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오히려『삼국사기』「백제본기」에 의하면 고이왕 13년인 서기 246년, 백제는 낙랑을 공격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같은 해에 치러진 것으로 알려진 기리영 전투는 낙랑태수와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만약 백제가 큰 타격을 입었다면 낙랑을 공격했다는 말이 과연 가능하기는 할까요?
그보다는 낙랑태수 유무의 부재를 틈타서 백제의 고이왕이 수군을 보내 낙랑을 급습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혹은 박대재 교수가 보는 대로 당시 낙랑의 수중으로 들어간 영서(태백산맥 서쪽) 맥을 습격했을 수도 있는데 어느 경우든 낙랑태수 유무를 자극하기에는 충분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앞 글에서 려휘님이 제기한 지적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태백산맥 서쪽, 광주 산맥(혹은 마식령 산맥) 남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영서 맥의 경우라면 충분히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수긍할 수 있겠지요. 이른바 말갈 세력으로 보아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고요. 고고학적으로도 고구려의 영향력이 미쳤음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을 듯합니다.
서울 송파구 석촌동 등지의 고고학 성과를 제시한 려휘님의 댓글을 보면 현재 고고학계에서 이를 말갈계 혹은 백제계로 이해하는데 려휘님은 일단 말갈계로 본다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석촌동 고분이 한강 이남, 즉 강남 지역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말갈계 설이 쉬이 납득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전면 부정하기에는 어려운 점도 적지 않다고 봅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강이나 산맥이 일종의 국경선 역할을 하는 것은 동서를 막론하고 고대사(혹은 중세사도 포함될 수 있겠지만)에서는 심심치 않은 현상입니다.
가령 중국의 경우 서기 2-3세기에 조씨 위나라와 동오의 국경선은 대개 장강 즉 양쯔강을 기준으로 했고, 촉한과의 경계선은 친링산맥 즉 진령산맥을 기준으로 한 사실을 들 수 있지요. 공화정 및 제정 로마의 경우도 게르만족과의 국경은 라인강과 도나우 강이 기준이었습니다. 프랑스의 경우 서남쪽으로는 피레네 산맥, 동남쪽으로는 알프스 산맥과 쥐라 산맥, 동북쪽으로는 아르덴 산맥으로 자연적인 국경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백제의 경우도 오늘날 강남(특히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터전을 잡았을 것이라 본다면(풍납토성 및 몽촌토성?) 한강은 일종의 국경 역할을 했을 확률이 높습니다.
그렇다고 백제가 조선 중-후기의 경우처럼 폐쇄적인 체제로 일관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을 확률이 높겠지요. 사정이 이렇게 되면 백제 안에서도 이른바 '말갈'의 요소가 늘어날 확률은 커지게 마련입니다. 일단 말갈의 정체나 주체세력 문제는 접어두더라도요. 국경지대는 국경 안팎을 불문하고 종족이나 민족이 섞이는 것이 보통입니다.
신분고국이 과연 백제의 '적대세력'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다만 신분고국이 백제 북쪽에 있었던 세력이었다는 데서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물론 백납본을 받아들일 경우의 이야기지만요.
그런데 12C, 정확하게는 남송 소흥 31년(서기 1161년)에 정 초라는 사람이 쓴『통지(通知)』「마한」조에는 신분고한(臣濆古韓)이라 기록되는 나라가 나타납니다. 이 때문인지 최근에는 이 신분고한이라는 나라를『삼국지』「마한」조의 마한 54개국 중 6번째 신분고국과 같다 보고 있다더군요. 백납본에서는 '신책첨한'이라 되어 있고요.
당시 조위 왕조가 낙랑과 대방에 어느 정도의 군사력을 투입했을 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전반적으로 보아서는 조위 왕조의 군사력에 여유가 있었다고 할 수 있는 정황들이 있습니다.
우선 234년 촉한의 승상이었던 제갈 량이 사망하자 그의 유언의 의해 후계자로 지명되어 대사마의 타이틀을 지녔던(승상직이나 다를 바 없는 권력입니다) 장완이 서기 245년 11월에 사망합니다. 장완은 제갈 량이 옹주, 진천 방면으로 수차례 북벌했다가 실패한 것을 거울삼아 한중에서 장강을 타고 내려가 상용을 점령하고, 이후 형주를 수복시키는 계책을 수립, 준비하였었지요. 하지만 그의 죽음으로 계획은 철회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같은 해 8월, 즉 장완이 죽기 약 3개월 전에는 촉한의 군주 유선의 의붓 어머니인 목황후 오씨가 별세했지요. 게다가 12월에는 환관 황호를 견제하던 '미스터 대쪽' 동윤이 사망합니다. 의붓 어머니도, 나라의 인재들도 줄줄이 사망하는 촉한의 국력이 어떠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가하면 동오는 서기 243년 유능한 승상인 고옹이 죽은데 이어 서기 245년에 제갈량, 사마의와 견줄만한 인물인 육 손이 63세에 울화병으로 사망하고 맙니다. 게다가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사마의와 달리 손권은 노망기를 보이고 있었지요. 심지어 가을 7월에는 동오의 장수 마무라는 사람이 손권과 대신들을 죽이고 조위 왕조에 호응하려다가 죽임을 당한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육손과 마무가 죽은데는 손권의 딸인 전공주 손노반과 태자인 손화의 불화도 한 몫을 단단히 했습니다. 물론 대개 전공주의 공세인 경우가 많았지만요. 어떻든 이렇게 되면 나라 안이 썩어들어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물론 한두 인물의 죽음으로 어찌 국력 자체가 쇠퇴할까만, 이들의 죽음은 양국의 국력 쇠퇴를 확연히 보여주는 한 징조라 할 수 있습니다.
하기야 조위라고 전혀 손해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서기 244년, 당시 사마 의와 함께 조위 왕조의 실권자였던 조상은 촉한을 공격했다가 낭패를 보았지요. 다만 이 경우는 승자인 사마씨가 후대에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조상의 실패를 부풀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만큼 조위 왕조의 국력이 유난하게 축나지는 않았다고 보는 편이 옳겠지요. 촉한과 동오 같은 손해를 위나라도 본 것 같기는 합니다만.
어떻든 전반적으로는 조위 쪽이 사마 의와 조상의 권력 투쟁 정도를 제외하면 국력에는 그런대로 지장이 적은 상태였습니다. 본토가 그런 상황이니만큼 공손씨 연나라와 달리 강경책으로 선회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게다가『삼국지』「위서 무구 검 열전」을 보면 서기 245년 유주자사인 무구 검(최근 연구에 의하면 '관구 검'이 아니라 '무구 검'이 맞다는 주장이 있군요. 일단 참고해서 반영해봅니다.)이 이때 한창 고구려에 원정 중이었으니 위군이 마한과의 싸움을 벌이는데 고구려가 개입할 여지는 별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이전 해인 서기 244년에는 낙랑 태수 유무와 대방 태수 궁준이 영동 즉 태백산맥 동쪽에 있었던 예(동예)가 구려(고구려)에 속하게 되자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였다고 합니다. 결과는 동예의 군주인 불내후 등이 읍을 들어 항복했다고 하지요. 이 때 무구 검이 고구려를 공격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다만 공격했을 확률은 제법 있다고 보아야 하겠지요.
그러더니 서기 246년 봄 2월에는 유주자사 무구 검이 고구려를 공격하고, 여름 5월에는 예맥을 공격하여 모두 쳐부수었다고 합니다. 서쪽(촉한)과 남쪽(동오) 전선의 힘을 던 만큼 동쪽에서 힘을 보탰을 개연성은 충분하지요. 여하간 그 결과 한나해 등 수십국이 각각 종락(종족)을 이끌고 항복했다고 합니다.
항복이라는 표현이 과장스러운대로 당시 위군의 세력은 상당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위군에 대해 동예가 낙랑태수 유무 및 대방태수 궁준에게 항복한 반면 신분고국은 오히려 궁준을 전사시키는 저력을 발휘하지요. 물론 멸망지경에 이르기는 했습니다만.
다음 글에서 뵙도록 하지요.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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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소호금천씨 작성시간 08.10.23 아~ 좋은 내용 잘 읽었습니다...별로 신경쓰지 않았던 신분고국(臣濆沽國)이라는 나라가 馬韓 북부의 강국이었다는 사실에 놀라울 뿐입니다...참으로 잘 감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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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준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8.10.23 아직은 밝혀지지 않은 것이 많아서 딱 신분고국이라 하기는 그렇습니다. 다만 황해남도 남부 및 경기도 북부를 아우를만한 세력으로 문헌학적으로는 일단 신분고국이 현재로서는 정황상 통설이어서 올려보았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백제의 고이왕이 당시 국력 결집을 하지 않았는가 하면 그것은 분명 아니고요. 다만 과장의 의혹이 있는 중국 사서라 해도 태수가 전사하면서까지 '한'을 멸망시켰다고 할 정도면 나름대로 규모가 있는 전쟁일 터인데 그 '한(韓)'이 백제라고 하기에는 다소 문제가 있더라 하는 이야기지요. 여하간 댓글 남겨주시고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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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明治好太王★ 작성시간 08.10.25 삼한에 관해서는 교과서 수준의 지식 밖에 없어서 그저 눈팅 중입니다.^^;; 여하튼 앞으로도 좋은 건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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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百濟 牟大王 작성시간 08.11.02 이거에 관한 연구들 찾아보면 별의별 희한한 이야기들이 다 있습니다. ㅎㅎ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고이왕, 책계왕, 분서왕, 계왕이 伯濟國이 아닌 신분고국의 왕들이었다는 설도 있습니다ㅡ,.ㅡ 통설적 지위에 있는 건 反군현의 맹주격인 신분고국의 멸망으로 伯濟國이 주도권을 잡았다는 어찌보면 참 편한 해석이고요;; 물론 삼국사기 초기기록 신빙론에서는 신분고국의 실체가 없다 하여 부정하고. 정말 갖다붙이기 나름인 알 수 없는 시대입니다; 마한이 요동에서 등장하고 있는 판이니 뭐;; 기리영전투 문제는 정말 빠져나올 수 없는 늪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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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kamando 작성시간 08.11.20 위서 한전 신분고국은 백제담로제의 초기형태의 자치국중 하나로 형식상 마한지역을 총괄하는 대왕으로서 백제왕과 자치제후로서 신분고국이 존재할수 있고 이같은 관계에 무지한 중국인이 신분고국을 독립된 마한 일국으로 표현한것으로 보임 더군다나 고이왕 시대에 마한 독립국 같은게 한강일대 황해도 일대에 존재할수는 없는 정황으로 마한총왕은 백제왕으로 신분고국은 그 자치국으로 봐야하고 이는 초기백제를 낙후된 지역으로 묘사한 진수의 곡필이 투영된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