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서 영제기에서는 “공손찬이 장순과 석문(石門)에서 싸워 대파했다.’고 하고, 같은 사건을 후한서 공손찬전에서는 “공손찬이 (장순 등을) 추격하여 속국석문(屬國石門)에서 싸워 대파했다”고 기술했습니다.
1. 후대 주석들을 보면 석문(석문산)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이현 주석이나 통전이 언급한 유성 서남쪽의 석문(편의상 석문1로 부름)과 수경주가 언급한 우북평의 석문(석문2)입니다.
3. 그럼 남는 것은 공손찬전에서 ‘속국석문’이라 명시했다는 점입니다. 후한서 영제기에서는 그저 ‘석문’이라고만 적었는데 공손찬전에서는 왜 ‘속국석문’으로 적었을까요? 어떤 석문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공손찬전의 그 대목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中平中, 以瓚督烏桓突騎, 車騎將軍張溫討涼州賊.(賊卽邊章等.) 會烏桓反畔, 與賊張純等攻擊薊中, 瓚率所領追討純等有功, 遷騎都尉. 張純復與畔胡 丘力居等寇漁陽•河閒•勃海, 入平原, 多所殺略. 瓚追擊戰於屬國石門,(石門, 山名, 在今營州 柳城縣西南.) 虜遂大敗, 弃妻子踰塞走, 悉得其所略男女. 瓚深入無繼, 反爲丘力居等所圍於遼西 管子城, 二百餘日, 糧盡食馬, 馬盡煑弩楯, 力戰不敵, 乃與士卒辭訣, 各分散還. 時多雨雪, 隊阬死者十五六, 虜亦飢困, 遠走柳城.
187년에 봉기해 난하 유역에 웅거하던 장순이 188년에 오환족과 함께 난하와 노룡새를 넘어 유주와 기주, 청주의 내지 깊숙이 침범해 약탈하자 이를 토벌하기 위해 공손찬 등이 파견되었고, 추격해 (어양 동쪽) 우북평의 석문에서 격파 (본기에도 기술된 걸 보면 이 석문전투가 장순의 2차 침범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로 보임) -> 이어서 후퇴하는 오환족을 뒤쫓으며 요서 관자성에까지 깊이 들어갔다가 역포위…이런 흐름이 되는 것입니다.
1. 후대 주석들을 보면 석문(석문산)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이현 주석이나 통전이 언급한 유성 서남쪽의 석문(편의상 석문1로 부름)과 수경주가 언급한 우북평의 석문(석문2)입니다.
공손찬전의 속국석문=한나라 기준 요동속국의 석문=당나라 기준 유성 서남쪽의 석문..으로 완전히 동일시할 수 있는지 확실하진 있지만 여기서는 일단 같은 것으로 전제하고, 공손찬전의 기술로 볼 때 어느 석문이 더 타당한지를 살펴보겠습니다.
2. 청골님이 인용한 <고대지명대사전>에서는 석문1로 간주했으나 저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경위는 서로 약간씩 다르지만 독사방여기요, 고염무의 일지록 등의 결론도 비슷하고 청골님 말씀대로 석문1로 보는 보는게 통설인 듯 합니다.)
우선 당시 공손찬이 요동속국장사였던 점을 그 간접적인 근거로 들었으나 이는 사전의 필자가 오인한 것입니다. 석문전투 당시에 공손찬은 요동속국장사가 아니라 기도위이며(후한서 영제기, 공손찬전) 또 장순이 처음 반란을 일으키기 직전에는 탁령(탁군 탁현의 현령: 삼국지 공손찬전, 원굉의 후한기)으로 이미 승진한 상태입니다. (요동속국장사 -> 탁령을 지내다 특명을 받고 오환돌기 지휘 -> 장순의 반란 -> 공을 세우고 기도위 -> 장순이 다시 침범하고 석문전투 -> 그 뒤 항로교위 영 속국장사)
3. 그럼 남는 것은 공손찬전에서 ‘속국석문’이라 명시했다는 점입니다. 후한서 영제기에서는 그저 ‘석문’이라고만 적었는데 공손찬전에서는 왜 ‘속국석문’으로 적었을까요? 어떤 석문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공손찬전의 그 대목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中平中, 以瓚督烏桓突騎, 車騎將軍張溫討涼州賊.(賊卽邊章等.) 會烏桓反畔, 與賊張純等攻擊薊中, 瓚率所領追討純等有功, 遷騎都尉. 張純復與畔胡 丘力居等寇漁陽•河閒•勃海, 入平原, 多所殺略. 瓚追擊戰於屬國石門,(石門, 山名, 在今營州 柳城縣西南.) 虜遂大敗, 弃妻子踰塞走, 悉得其所略男女. 瓚深入無繼, 反爲丘力居等所圍於遼西 管子城, 二百餘日, 糧盡食馬, 馬盡煑弩楯, 力戰不敵, 乃與士卒辭訣, 各分散還. 時多雨雪, 隊阬死者十五六, 虜亦飢困, 遠走柳城.
(후한서 공손찬전. 원문은 고대사료집성에서 인용했고 원문 중의 괄호는 이현의 주석임.)
다른 몇가지 기록들과 함께 순서대로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187년 : 후한서 영제기, 유우전) 오환돌기를 동원해 공손찬에게 거느리게 하고 양주적을 치려던 중, 장순 등이 오환족과 연결해 봉기하고 유주의 중심지인 계(薊)를 공격. 공손찬이 토벌전에 참전 -> 장순이 다시 (오환대인) 구역거 등과 함께 어양, 하간, 발해, 평원을 침범하자 공손찬이 이를 토벌하기 위해 파견되고(188년 9월 : 영제기) 추격해 <속국 석문>에서 대파. (188년 11월 : 영제기) -> 오환이 요새를 넘어 달아나자 공손찬이 깊숙히 들어갔다가 요서 관자성(管子城)에서 2백여 일 동안 역포위당함 -> 식량 부족으로 고전하다 겨우 탈출하고, 오환도 식량부족으로 유성으로 돌아감.
후한서 유우전에 따르면 당시 장순이 봉기한 뒤에 주둔한 곳이 요서군 비여현이고, 관자성(管子城)은 그 이름으로 볼 때 제환공의 산융정벌과 관련된 곳, 즉 난하 유역이나 그 북동쪽으로 멀지않은 곳으로 짐작됩니다. (참고로 독사방여기요 권18에서는 석문산과 더불어 이것 또한 ‘유성 서남쪽’으로 비정했음)
이를 다시 지명 중심으로 열거하면, 어양(+하간 등 기주, 청주의 내지) -> 석문 -> (깊숙히 들어간 뒤) 관자성 -> 유성 의 순서입니다.
따라서 공손찬이 장순 등을 격파한 석문은 이현이나 두우가 말하는 석문1로 보기는 힘듭니다. 어떻게 비정하든 석문1과 관자성을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사건의 전반적인 정황으로 보면 오히려 역도원의 고증, 즉 우북평의 석문 쪽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되며, 후한서 공손찬전의 '속국석문'에서 '속국'은 연문이나 오기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187년에 봉기해 난하 유역에 웅거하던 장순이 188년에 오환족과 함께 난하와 노룡새를 넘어 유주와 기주, 청주의 내지 깊숙이 침범해 약탈하자 이를 토벌하기 위해 공손찬 등이 파견되었고, 추격해 (어양 동쪽) 우북평의 석문에서 격파 (본기에도 기술된 걸 보면 이 석문전투가 장순의 2차 침범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로 보임) -> 이어서 후퇴하는 오환족을 뒤쫓으며 요서 관자성에까지 깊이 들어갔다가 역포위…이런 흐름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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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백랑수 작성시간 09.03.15 석문이 어양군에 있나요? 우북평군 속현들을 흐르는 포구수의 지류인 루수가 통과하는 곳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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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학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9.03.16 수경주의 석문은 어양보다는 <우북평 석문>이라 하는게 더 정확하겠군요. 백랑수님 지적이 맞습니다. 댓글은 그냥 놔두고 본문은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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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청골 작성시간 09.03.15 포구수의 하류는 庚水를 자르고 右北平郡故城의 南쪽을 지나 巨梁水를 지납니다. 반면 류수조의 신하는 웅노에서 시작해 庚水를 자르고 東北으로 흘러 右北平을 지나 泃渠之水를 자른 후 계속 동쪽을 향합니다. 그럼 포구수의 하류와 신하는 같은 물줄기인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여도원의 기술 방법대로라면 경수는 포구수를 지난 후 신하로 들어간다 (또는 반대로) 라고 기술을 해야 옳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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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청골 작성시간 09.03.15 그 이후 저는 아래 올린 지도를 그리게 되었답니다. 결론은 어양군까지는 아주 분명히 강줄기를 따라 군의 속현이 분포하다가 우북평군과 요서군은 이상하게 속현이 섞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작필의 증거라고 스스로 확신한 후, 권 13에서 북위라는 대목을 보게 되었고, 의무려산에서 발원하는 지류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죠. 류수의 수원이 곡수를 이룬다는 것조차 알고 있던 여도원이 말이죠. 따라서 수경주 권 13과 14는 상당부분 작필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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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백랑수 작성시간 09.03.16 력도원의 기술방법을 어찌 알겠습니까? 력도원이 잘 못 알았을 수도 있고 전사과정에서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요. 저는 후한서의 어양군과 우북평군의 거리 표시가 각각1000 리씩 줄여서? 혹은 잘못 전사되었다고 봅니다. 수경주의 물줄기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양락현이나 유성을 놓고 벌였던 얘기들도 모든 지리지들을 있는 그대로 보면 수월하게 이해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후한서 외 여타 사서의 총 리수 기록만이 문제이지 다른 기록들은 서로 일치하며 대체로 정확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포의 양락현이나 공손찬의 석문협 이야기도 유성의 비정을 놓고 벌어진 예에 불과하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