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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후한서 공손찬전이 말하는 석문

작성자학이| 작성시간09.03.13| 조회수430|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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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청골 작성시간09.03.15 음~~~ 수경주류의 논리를 따르시는군요. 이 이론은 석문을 어양과 요동속국의 둘로 보는 것이고, 이현과 두우라는 당나라 당대의 두 사가의 의견이 틀렸다는 이론인데... 이리되면 지금까지의 토론은 원점으로 돌아가는군요. 당나라 사가도, 명나라 사가도 모두 틀리고, 가장 현대에 가까운 사가들이 옳다는 논리인데... 사료해석은 그 시대에 가장 근접한 사람들의 해석을 우선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닌가요?
  • 작성자 학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09.03.15 얘기가 이어지다보니 청골님 글에 답글로 달았습니다만, 청골님 의견에 대한 반론이라기보다는 통설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후한서 공손찬전의 석문이 어떤 석문인가?>에 관해, 어양의 석문이다(수경주) vs 유성의 석문이다(이현, 고염무, 고조우, 고대지명사전>인 상황입니다. (두우는 그냥 유성에 석문이 있다 했을뿐인데, 이에 관해 따로 고증한게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저는 공손찬전의 세세한 내용에 의거해볼때 유성의 석문으로 보기는 힘들고, 수경주의 고증이 더 정확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 작성자 학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09.03.15 문헌기록은 당대에 가까운 기록에 대체로 더 신빙성을 부여할 수 있으나, 해석이나 고증은 꼭 그런건 아니고(이 사안에서 이런 이유로 수경주를 지지하는건 아닙니다.) 내용적으로 어떤 쪽이 더 타당하고 이치에 맞느냐가 중요하겠죠.
  • 작성자 백랑수 작성시간09.03.15 석문이 어양군에 있나요? 우북평군 속현들을 흐르는 포구수의 지류인 루수가 통과하는 곳이 아닌가요?
  • 답댓글 작성자 학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09.03.16 수경주의 석문은 어양보다는 <우북평 석문>이라 하는게 더 정확하겠군요. 백랑수님 지적이 맞습니다. 댓글은 그냥 놔두고 본문은 수정하겠습니다.
  • 작성자 청골 작성시간09.03.15 포구수의 하류는 庚水를 자르고 右北平郡故城의 南쪽을 지나 巨梁水를 지납니다. 반면 류수조의 신하는 웅노에서 시작해 庚水를 자르고 東北으로 흘러 右北平을 지나 泃渠之水를 자른 후 계속 동쪽을 향합니다. 그럼 포구수의 하류와 신하는 같은 물줄기인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여도원의 기술 방법대로라면 경수는 포구수를 지난 후 신하로 들어간다 (또는 반대로) 라고 기술을 해야 옳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 작성자 청골 작성시간09.03.15 그 이후 저는 아래 올린 지도를 그리게 되었답니다. 결론은 어양군까지는 아주 분명히 강줄기를 따라 군의 속현이 분포하다가 우북평군과 요서군은 이상하게 속현이 섞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작필의 증거라고 스스로 확신한 후, 권 13에서 북위라는 대목을 보게 되었고, 의무려산에서 발원하는 지류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죠. 류수의 수원이 곡수를 이룬다는 것조차 알고 있던 여도원이 말이죠. 따라서 수경주 권 13과 14는 상당부분 작필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 작성자 백랑수 작성시간09.03.16 력도원의 기술방법을 어찌 알겠습니까? 력도원이 잘 못 알았을 수도 있고 전사과정에서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요. 저는 후한서의 어양군과 우북평군의 거리 표시가 각각1000 리씩 줄여서? 혹은 잘못 전사되었다고 봅니다. 수경주의 물줄기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양락현이나 유성을 놓고 벌였던 얘기들도 모든 지리지들을 있는 그대로 보면 수월하게 이해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후한서 외 여타 사서의 총 리수 기록만이 문제이지 다른 기록들은 서로 일치하며 대체로 정확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포의 양락현이나 공손찬의 석문협 이야기도 유성의 비정을 놓고 벌어진 예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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