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군의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는 것이 현재 한국 사학계에서 통설로 적용되고 있지만 낙랑과관련한 사료를 세밀히 검토해 보면 낙랑은 평양의 대동강 유역이 아닌 대륙 동북의 난하 유역에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 사료적 근거를 하나하나 제시해 본다.
1.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수성현은 본래 낙랑군25현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수서 지리지에는 수성현이 상곡군의 소속 현으로 되어있다. 한나라의 낙랑군이 한반도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면 그 소속현중의 하나인 수성현이 수나라 시대에 갑자기 오늘날의 하북성 북경 부근에 있던 상곡군에 소속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는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이 아닌 난하 유역에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2. 사기 고제본기 색은에 태강지리지를 인용하여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는데 이곳은 만리장성이 시작된 곳이다,라고 하였다. 갈석산은 하북성 창려현 부근에 발해를 마주하여 우뚝 솟아있다.중국 공산당 간부의 여름휴양지로 유명한 북대하가 이 부근에 있다. 그런데 갈석산이 바로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는 사실은 낙랑군이 난하 유역에 있었음을 반증하는 또 하나의 근거가 된다.
3. 광여에 영평부 연력을 기술하면서 옛 우북평 북연이 낙랑이다,라고 하였다. 북평군은 어양군과 함께 오늘날의 하북성 난하 부근에 있었다. 낙랑이 이곳에 있었다는 것은 낙랑군이 난하 유역에 있었음을 반증하는 또 하나라의 근거가 된다.
4. 노룡새략 13권 황렬전에는 아마 연산과 낙랑에서는 사람마다 감동하고 흥분할 것이니 무슨 호를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연산과 낙랑을 동시에 거명하고 있다. 연산산맥은 난하를 건너 갈석산 쪽으로 뻗어나간 산맥이며 산맥은 대체로 만리장성 줄기와 일치한다. 여기서 연산과 함께 거명된 낙랑이 결코 연산과 동떨어진 대동강 유역의 낙랑이 될 수는 없다. 노룡현은 오늘의 하북성 진황도시 부근이다. 곽조경의 약도를 보면 노룡새는 난주와 열하의 중간지대인 난하 하류에 있다. 노룡새략에 낙랑이 연산과 함께 등장한다는 것은 낙랑이 난하 유역에 있었음을 반증하는 또 하나의 근거가 된다.
5. 노룡새략 복연전에는 노룡사람 복영이 침입한 외적과 싸우다 붙잡히자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했는데 뒤에 그의 충혼을 기려 낙랑공을 추증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낙랑공이란 칭호를 복영에게 내린 것은 그가 출생했거나 희생된 지역과 연관이 있다고 보인다. 하북성 노령 사람 복영에게 평안남도 대동강변의 낙랑공을 추서했을 리는 만무하다. 복영에게 낙랑공을 추서한 것은 낙랑이 난하 유역에 있었음을 반증하는 또 하나릐 근거가 된다.
6. 수서에 수양제가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그 군대를 각각 좌 우 12군으로 나누어 출동시키면서 압록수 서쪽에서 모이도록 명령을 하달한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 낙랑군은 좌 12군의 행군지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 낙랑군이 만일 평양의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면 중국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압록강을 향해 출동하는 수나라 군대의 경유지에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다. 수나라 군대가 행군하는 경유지에 낙랑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은 낙랑이 평양의 대동강 유역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또 하나의 근거가 된다.
7. 중국사회과학원에서 펴낸 중국역사지도집 제 4책 북조 동위 조에 의하면 백록산과 백랑수 위쪽 즉 대릉하 중류, 오늘의 조양시 부근 지역에 영주 소속의 낙랑군이 설치된 것을 볼 수 있다. 낙랑군은 낙랑군의 잘못된 표기이거나 낙랑군을 은폐하기 위한 의도적인 실수였다고 보여진다.한사군의 낙랑군은 후한 말(서기190)요동에 독립 세력을 구축한 요동태수 공손도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 손자 연에 이르러 연왕을 자칭했는데 위 경초 2년 (서기238)위에서 시마의를 보내 양평에서 연을 치게 하는 한편 몰래 군사를 바다쪽으로 보내 낙랑과 대방 두 군을 평정 장악하게 되었다. 삼국시대의 위(서기220-265)와 남북조시대 북조의 동위(서기534-550)는 시간적으로 수백 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동위가 요하와 난하 사이에 낙랑군을 설치했다는 것은 원래 이곳이 한사군 시대와 그 이후 위 진 시대에 낙랑군이 있던 지역이기 때문에 옛 이름을 빌어 다시 설치했을 가능성이 짙다.
8. 중국역사지도집 제 4책 북조 위조에는 난하 부근에평주 소속으로 조선현이 있다. 이때 조선현은 백록산과 백랑수가 있는 즉 대릉하 유역 아래쪽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원래 낙랑군의 조선현이 있던 자리여서 그 흔적이 그때까지 남아 있었을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요나라(서기916-1125)와 금나라(서기1115-1234)시대에도 오늘날의 내몽고 적봉시 부근에 각각 삼한현을 설치한 사례가 있다. 이지역이 만약 우리 민족과 전혀 무관하다면 남북조시대 북조의 위가 왜 여기에 조선현을 설치하고, 요나라와 금나라시대에 어째서 이곳에 삼한현을 설치했겠는가. 이것을 우연의 소치로 돌리기보다는 이곳이 원래 역사적으로 고조선. 낙랑군의 터전이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둘 수 있다. 위에 인용한 사료를 토대로 검토해 보면 오늘의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갈석산 일대 난하 유역 부근에 낙랑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명백하며 더이상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하겠다.
황하에서 한라까지, 중에서...
저자 심백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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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파사 작성시간 12.06.16 한 낙랑군이 지금의 란하 유역에 있었다면 당시의 요동과 요하는 지금의 어느 곳과 어느 물길이어야 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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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원이 작성시간 12.08.19 당시 요하가 지금 난하입니다. 요동은 즉 난하 오른쪽 요서는 그 왼쪽이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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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원이 작성시간 12.08.19 지금 난하가 당시 요하. 지금 강이름은 동으로 옮긴겁니다.
지금 요하도 예전엔 압록강. -
답댓글 작성자파사 작성시간 12.08.24 <한서/지리지>외 지리지 등에서는 요하가 대체적으로 남류한다고 하였지요.
그런데 지금의 란하는 크게 보아 동남류합니다.
<수경주/난수濡水>를 비정하자면 지금의 란하 상류와 동일하고 중.하류는 지금의 란하 서쪽을 관통한 것으로 보입니다. <청사고/지리지>에는 <수경주>의 난수 흐름을 정확히 지목하여 2100 리라 하였고, <한서/지리지>에서는 밑도끝도 없이 염난수가 2100 리라고 하였으며 대요수를 1250 리라 하였지요.
저러한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대요수는 염난수의 동쪽 지류라 할 만 하고,
지금의 란하는 <한서/지리지>의 염난수라 할 수 있겠지요.
염난수鹽難水는 현토.요동군을 경유하여 바다로 흘러들고,
난수濡水 -
답댓글 작성자파사 작성시간 12.08.24 (난수濡水)는 어양.우북평.요서군을 경유하여 바다로 들어갑니다.
즉 지금의 란하는 <한서/지리지> 상의 2100 리 염난수와 요서군의 난수濡水가 복잡하게 섞여 설명된 것이니,
요동군을 경유하고 1250 리 길이에 불과한 대요수일 리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