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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사군 설치기 (기원전 108년 ~ 기원전 83년)
한사군을 군사적인 관점에서 들여다 보면 낙랑군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 강합니다. 낙랑군이 안정화되면 다시 동쪽으로의 확장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초기 한사군의 영역은 우리나라의 경상남북도의 크기와 비슷합니다. 조선과의 전쟁으로 적지 않은 땅을 확보한 것이지요.
한나라는 조선을 멸망시켰지만 확장을 쉽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드넓은 평야를 가로질러 흐르는 수많은 강 때문에 현도군의 병력으로는 흩어져 지킨다는 것은 역부족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꾸준히 병력을 움직여 B지역 옥저를 공략했을 것입니다. B 지역이 옥저라고 설정한 근거는 후한서 동이열전 옥저전을 참고하였습니다.
武帝滅朝鮮,以沃沮地為玄菟郡。後為夷貊所侵,徙郡於高句驪西北,更以沃沮為縣,屬樂浪東部都尉
한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옥저땅으로 현도군을 삼았다. 뒤에 이맥(夷貊)의 침략을 받아 군(현도군)을 고구려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옥저를 현으로 고치어 낙랑의 동부도위에 속하게 했다
이후 30년 동안 현도군의 확장 영역은 C 지역까지이며, 옥저에 살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대규모 이동을 하였을 것입니다. (참고로 검은색 선은 현 중국의 행정구역을 표시한 것입니다.)
각 지역을 설정을 해 보겠습니다. (설정 메모)
- 부여 : 한사군이 설치되고 진번군과 임둔군에서 계속 갈등을 일으킨 국가는 부여로 설정하였습니다.
- 오환 : 동호의 남쪽 부족으로 선비족이 등장할때까지 역사에 등장하고 있어 해당 지역을 오환으로 설정하였습니다.
- 가 지역 : 패수 서쪽까지 요동군에 속하게 됩니다. 최전방 국경지역에서 안전한 후방으로 바뀌었으므로 급격한 발전이 진행됩니다.
- 나 지역 : 패수 동쪽부터 낙랑군에 속하게 됩니다. 요동군보다는 못하지만 발전이 빠르게 진행됩니다.
- A 지역 : 왕래가 쉽지 않은 대습지
- B 지역 : 옥저
- C 지역 : 구려 : 후 현도군의 확장으로 E 지역으로 이동.
- D 지역 : 양맥(?)
- E 지역 : 구려
2. 진번 임둔군의 소멸기 (기원전 82년~ 서기 14년)
기원전 82년에 부여의 압박으로 진번군과 임둔군이 사실상 소멸이 됩니다. 진번군은 낙랑에 예속되어 낙랑 서쪽을 방어하게 되고, 임둔군은 현도군에 예속됩니다. 기원전 75년에 현도군이 이맥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합니다. 이때 임둔군은 낙랑군에 속하게 되었고, 현도군가 있었던 곳을 방어하면서, 현도군의 뒤를 받쳐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진번군이 낙랑의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요동군도 변화가 생기게 됩니다. 장성 안에서 밖으로 나와 방어선이 북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기의 한사군의 핵심은 현도군입니다. 진번군과 임둔군이 소멸되었지만 요동군과 낙랑군은 완전히 안정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현도군은 북쪽에 3개 현을 설치하여 고구려현을 치소로 삼아 확장을 시도합니다. 이때 가장 고민을 하게 만드는 부분은 과연 현도군이 요하를 넘었느냐에 있습니다.
선양이 있는 E 지역으로 가려면 도하를 해야하는데 강폭이 넓고 구려(아직 고구려가 건국하기 전입니다)의 본진과 가까워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도하를 하려면 부교나 다수의 배를 만들어야 합니다. 구려 진영에서 이 모습을 본다면 당연히 대비를 할 것입니다. 이 시기의 현도군은 대릉하 이북의 핵심 전력입니다. 자칫 실수로 병력을 많이 잃게 되면 대릉하 이북 옥저 땅이 위태로워집니다. 고구려와 수나라 전쟁을 보더라도 피해없이 요하를 넘는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이는 구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또한 현도군이 도하를 해 선양에 자리를 잡았다면 대릉하 북쪽 옥저땅을 누가 지켰을까요? 북쪽에는 진번군과 임둔군을 소멸시킨 부여가 있습니다. 만약 부여가 내려와서 옥저 땅을 차지해 버리면 현도군은 한마디로 고립무원이 되어버립니다. 요하에 막히고, 부여에 막히고...
현도군은 요하를 넘지 않았고, 북쪽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리고 전한이 끝나고 왕망의 등장하기 전까지 이런 상태는 계속 됩니다. 기원전 75년부터 서기 12년까지 한사군 주변에서 벌어진 큰 사건으로는 고구려가 건국하였고, 부여와 고구려가 전쟁을 벌였습니다. 부여가 폭설로 인하여 수많은 병사를 잃으면서 전쟁은 고구려의 승리로 돌아갑니다.
3. 현도군의 후퇴기 (서기 14년 ~ 서기 314년)
현도군은 고구려현, 상은대현, 서개마현으로 되어 있고 치소는 고구려현입니다. 그런데 서기 14년, 고구려 유리왕이 양맥을 점령하고, 고구려현까지 차지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서기 13년, 고구려가 부여와의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양맥(현 신민시)까지 차지했는데 이 양맥을 넘어 현도군을 공격한 것입니다. (기억이 나지 않아 정확한 출처를 말씀 드리긴 힘들지만, 예전에 양맥은 강가에 부교를 설치해 놓고 사는 부족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어 그렇게 설정을 한 것입니다)
현도군이 치소가 빼앗기면서 뒤로 물러나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곳은 현 푸신시입니다. 사료를 보면 현 선양 동쪽의 푸순지역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저는 푸순으로 현도군이 가면 완전히 고립되어 버리기 때문에 푸신시로 설정을 하였습니다. 참고로 푸신시와 푸순시를 비교해보면 노천 광산도 많고 내용도 매우 비슷합니다.
고구려현을 뒤로 물렸지만 현도군은 여전히 세력을 유지합니다. 낙랑군과 여전히 연결이 되니까요. 하지만 애써 확장한 옥저 땅이 교전 지역으로 변하게 됩니다. 서기 28년 요동태수가 군사를 파병해 고구려를 공격합니다. 현도군과 낙랑군은 땅을 지키는 군사이므로 남겨두고 요동 병사로 공격을 해 요하 너머로 밀어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승패가 나지 않았고 요동군으로 퇴각합니다. (고구려군도 양맥쪽으로 퇴각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붉은색 그림의 지역은 교전지역이라는 의미입니다.
고구려는 태조 대왕때 한사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는데, 선비족과 동맹을 맺어 현도군과 요동군을 공격을 합니다. 위치상으로 볼때 고구려는 현도군을 공격하고, 선비족은 요동군을 공격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달리 생각하면 이때부터 고구려의 수군이 움직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때부터 등장하는 것이 서안평현입니다.
서안평현은 패수 서쪽에 있는 바닷가 마을이라고 판단합니다. 지리적으로 이곳이 끊기면 대방군 낙랑군 현도군이 고립되기 때문입니다. 요동군은 북쪽의 선비족과의 갈등이 있을때마다 고구려의 바다로의 공격을 받았고, 백제의 고이왕, 분서왕 기록을 보면 백제 역시 이곳을 공격한 것으로 나옵니다. 참고로 대방군은 낙랑군의 서쪽 7개 현이 분리되어 만들어진 군으로 요동군을 도와 패수 지역을 방어를 목적으로 합니다.
4. 한 사군의 소멸 (서기 314년)
서기 311년 고구려 미천왕이 서안평을 장악합니다. 당시 상황을 추정하면, 모용 선비와의 동맹을 맺었고, 모용선비는 요동을 공격하고, 고구려는 낙랑군과 대방군을 공격하였을 것입니다. 서안평이 점령되는 순간 한사군은 완전히 고립이 됩니다. 2년후 낙랑군의 군장 장통이 요동으로 퇴각을 하였고, 이듬해 고구려가 대방군을 점령하면서 낙랑지역은 고구려에 속하게 됩니다. 그런데 현도지역은 고구려의 계속적인 공격을 받다가 결국 모용 선비에 투항을 합니다. 이때부터 고구려는 모용 선비(전연)와 요동군을 두고 다투게 되었고, 요동군을 차지한 모용 선비에 의해 뒤로 밀리게 됩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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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파사 작성시간 13.02.21 그 글을 읽지 못한 것도 아니고 이번 글도 잘 읽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차 질문한 것은 제 답글을 읽지 않으신 것인지 아니면 오해한 것인지 혹은 이해를 못하신 것인지 몰라서 다시 요약하여 질문드리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다시 질문하지요.
<후한서/군국지> 요동.현토.낙랑군의 주석에는 낙양에서 동북쪽으로 각각 3600, 4000, 5000 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습니다. 님 글의 3 번째 지도에 표기된 요동.대방.낙랑.현토군 표시가 <후/지> 기록과 같다고 보시는지요? -
작성자카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2.21 한서지리지에 대한 질문은 모두 답변을 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후한서 군국지의 내용을 한서지리지와 연계하여 답변은 드릴 수가 없습니다. 논란 여부를 떠나서 후한서는 남북조시대의 송때의 사서로 한서지리지와는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두 기록을 같은 선상에 놓고 논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한서지리지 따로, 후한서 따로 정리하여 비교를 해야합니다. 후한서를 보면 요서 요동의 위치가 갑자기 3300리 3600리가 됩니다. 현 요하를 사이로 두고 요서와 요동을 비정한 것이지요. 왜 그랬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만 이를 설명하려면 내용이 길어지고... 무엇보다도 조심스런 내용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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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파사 작성시간 13.02.22 그리 판단하는 것은 대단한 착오라 여깁니다.
<후한서>가 5세기 말 남송인 범엽이 썻다지만 <후한서>의 내용은 후한시기라는 것을 망각하면 안됩니다.
<한서>가 서기 83 년경에 씌여졌지만 기원전 220 년부터 기원후 7 년인 왕망의 신 전까지 기록으로 알고 있습니다. 님의 논리라면 <한서>는 서술 대상 기간으로 부터 70 여년 후가 되니 시간상 그리 차이나지 않으니 괜찮다는 말이 됩니다. 또한 <삼국사기>의 경우에는 삼국이 멸망한 후 200~500 여년 후에 씌여졌지요.
이게 말이 된다고 보나요?
요하니 요동을 떠나서 역사 공부에 관한 기본인식의 문제라 생각하며 심각한 수준인 것 같으니 하루빨리 교정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파사 작성시간 13.02.22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한다면,
<한서/지리지>나 <후한서/군국지><수경주> 기록이나 <수서><당서><요사><원사><명사><청사고>의 지리지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요동군과 요수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옳바른 방법이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그동안 많은 가르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견성하십시요. -
답댓글 작성자카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2.23 요동군 중요성 잘 알고 있습니다. 요동군을 찾기 위해 그 많은 사서들을 뒤져 보는 거니까요. 단 요수는 별로입니다. 아무튼 사람마다 역사 인식이 다릅니다. 같았다면 모든 기록이 똑같았겠죠. 사서마다 다 다르고 생각하는 바도 다르니 이에 대한 해석도 차이가 생기는 것이고, 이런 인식 차이가 있으니 다른 사람의 글을 보면서 공감도 하고 의문도 갖으면서 발전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의 역사 인식이 어떻든 파사님께 비난을 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저는 다른 분 비난 안합니다. 고치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보고 공감하면 받아들이고, 흥미가 있으면 질문하고, 관심 없으면 넘어갑니다. 그게 전부인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