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A 한국사 고대 1] -6. 부여의 임금들은 누가 있었을까?

작성자김용만|작성시간18.06.11|조회수366 목록 댓글 5

Q6. 부여의 임금들은 누가 있었을까?

해모수, 해부루, 금와왕, 대소왕 등등.

 

부여사가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까닭은 부여 역사를 기록한 체계적인 기록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부여하면 떠오른 인물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다행히 20065월부터 20073월까지 방영된 드라마 주몽의 주된 무대가 부여왕궁이었고, 여기에서 해부루왕, 해모수, 금와왕, 대소왕 등이 등장하면서 이들이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모두 부여 초기에 등장하는 왕들일 뿐이다.

 

부여의 흥망성쇠

기원후 22년 고구려와 전쟁으로 인해 대소왕이 죽은 이후, 부여에서는 다음 왕위를 놓고 큰 다툼이 있었다. 대소왕의 동생 가운데 하나는 갈사수 강가에 와서 해두국왕을 죽이고 그곳에 갈사국을 세우고 왕이 되었고, 친척동생은 스스로 만여 명과 함께 고구려에 투항하여, ‘낙씨성을 받고 고구려의 제후왕이 되었다.

부여는 25년 후한에 사신을 보내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크게 성장하는 고구려를 견제했다. 하지만 고구려는 계속 성장하였고, 68년에는 부여의 갈래인 갈사왕 도두가 나라를 들어 고구려에 투항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제는 부여가 고구려에 공물을 바쳐야 했다. 심지어 121년에는 고구려 태조대왕이 유화부인의 무덤인 태후묘에 제사를 핑계로 부여를 직접 방문하여 거들먹거리기도 했다.

부여는 고구려의 압력을 타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후한과의 관계를 개선했다. 그에 앞장선 인물이 태자 ()구태였다. 그는 120년 직접 후한에 사신으로 갔고, 136년에는 왕이 되어서 후한의 수도를 방문하여 이례적인 대환영을 받았다. 그는 121년과 고구려와 후한과의 전쟁에 개입하여 2만의 군대로 후한을 도왔다. 122년에도 다시금 후한을 도와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구태의 아들로 여겨지는 부태왕은 167년 후한을 공격하기도 하였지만, 174년 무렵부터는 다시 후한과 사이가 개선했다. 특히 200년 무렵 위구태왕은 후한의 요동태수인 공손탁의 딸과 혼인을 했다. ()구태왕과 위구태왕은 후한을 활용해 고구려를 견제하는 데 성공을 했다.

위구태왕이 죽자 간위거가 왕이 되었고, 간위거가 죽자 여러 부족장들이 간위거의 서자인 마여를 왕위로 추대했다. 하지만 마여왕은 권력을 우가(牛加, 소부족의 우두머리)인 위거에게 빼앗기고 있었다. 위거는 244년 위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에 위나라 군대에게 군량을 제공하며 다시금 고구려에 대항하는 정책을 펼쳤다.

마여왕이 죽자 왕위는 그의 6살 된 의려가 왕이 되었다. 왕이 어리고, 귀족이 권력을 잡는 상황에서 부여는 외적의 침입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285년 모용선비족이 쳐들어와 수도를 함락하자, 의려왕은 자살하고 말았다. 왕실은 겨우 옥저 땅으로 피신할 수 있었고, 진나라 등의 도움을 받아 다시 옛 땅으로 돌아가 나라를 부흥시켰는데, 이때의 부여왕이 의라였다.

하지만 옛 부여 땅에 영토를 회복한 부여는 얼마 가지 못하고, 346년 다시금 모용선비족이 세운 전연의 공격을 받아 실질적인 멸망을 당했다. 이때 부여의 현왕과 백성 5만 명이 전연으로 끌려갔다. 부여는 동명왕(또는 해모수)-해부루-금와왕-대소왕……()구태왕-부태왕- 위구태왕-간위거왕-마여왕-의려왕-의라왕……현왕 등의 여러 임금들에 의해 다스려진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였다.

 

강대국으로 발전하지 못한 채 막을 내린 부여

삼국지기록에 부여는 영토가 사방 2천 리, 인구는 8만 호로, 동이 가운데 가장 넓고 평평한 땅을 가진 나라라고 하였다. 또한 삼국지》 〈위서동이전부여편에는 그 나라는 매우 부강하여 선대로부터 파괴된 일이 없었다라고 할 만큼 강성한 나라였다. 호당 인구를 6.5명 정도로 계산하면 인구는 약 50, 25만 명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기원 전후 시기 만주 일대에서 가장 강한 나라였다. 이때 부여는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치라고 압력을 행사했기도 했다.

부여는 220년대까지 부여 동북쪽 천 여리 밖 삼림지대에서 살면서 독화살을 쏘는 수렵민인 숙신을 속민으로 거느렸었다. 부여는 숙신의 특산물인 붉은 구슬과 좋은 담비 가죽을 가져와서 교역품으로 활용하며 경제적 이익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부여는 이처럼 좋은 자연 환경과 넉넉한 인구를 가진 나라였지만, 위기를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야성을 상실하고 남에게 의지했다. 또 국력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고 새로운 변화에도 뒤쳐졌다. 그렇기 때문에 285년과 345년에 모용선비에게 크게 패하였으며, 410년에는 고구려에게 동부여가 멸망당했고, 494년에는 남은 부여마저 고구려에게 투항하면서 역사 무대에서 사라지고 만 것이었다.

 

부여의 역사적 의미

부여는 연맹 왕국의 단계에서 멸망하였지만,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그 이유는, 고구려나 백제의 건국 세력이 부여의 한 계통임을 자처하였고, 또 이들의 건국 신화도 같은 원형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지에는 동이의 옛말에 의하면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라 하는데, 그 말이나 풍속 따위는 부여와 같이 점이 많았으나 그들의 기질이나 의복은 다름이 있다고 하였다. 부여의 제천행사인 영고에서 술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는 풍습은 고구려의 동맹과 같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 풍습 또한 흉노와도 같지만, 고구려와도 같다. 부여의 관리들의 명칭인 대사, 대사자, 사자 등은 고구려에도 똑같이 사용되었다. 고구려 문화의 뿌리는 부여였다. 고구려는 그 시조를 북부여의 천제라고 하였다. 고구려인이 남긴 광개토태왕릉비문에는 고구려가 부여에서 시작되었음이 아주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부여는 고조선의 멸망과 삼국의 성장 사이의 과도기에서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서 가장 선진화된 나라요, 가장 강성했던 나라였다. 부여는 숙신, 고구려 등의 조공을 받는 제국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부여가 약화된 후에는 부여의 정통을 계승하여 부여 대신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서 제국의 위상을 누리는 나라라고 강조했다.

반면 백제는 고구려와의 경쟁 심리 탓인지, 자신들의 선조를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으로 섬기는 이야기와 함께, 부여 왕이 서손인 우태의 자손이라고도 주장하기도 했다. 백제 또한 부여의 별종이라고 불렸다. 또한 백제 성왕은 538년에 수도를 사비성으로 옮기면서 국호를 남부여라고 하였다. 백제의 왕실의 성씨를 부여씨로 할 정도로 부여를 계승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 부여는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의 뿌리이자, 어머니 국가였다.

 

부여의 계승-두막루국, 발해

부여는 494년 마침내 고구려에 투항한다. 하지만 부여는 그 이후로도 긴 생명을 유지했다. 동류 송화강 북쪽에 위치한 두막루국은 스스로를 부여가 망한 후에 세운 나라라고 하였다. 두막루국은 5~8세기에도 계속 존재했다. 또한 부여는 발해로도 계승되었다.

발해 3대 무왕인 대무예가 일본에 사신을 보낼 때 우리는 부여의 유풍(遺風)을 가지고 있다.” 는 표현을 했다. 송나라 때 저술된 무경칠서란 책에 발해는 부여인이 세운 것이다.” 라는 내용이 실릴 정도로 발해인들도 부여와의 관련성을 내세웠다.

부여는 700년 이상의 오랜 역사와 대국의 경험을 간직한 나라였다. 부여의 건국신화는 단군신화와 함께 천손 신앙 개념의 원형이다. 부여의 신앙과 문화는 고구려와 백제로 이어지면서 중국과는 확연히 다른 우리 문화의 정체성의 근간이기도 하다.

또한 부여사의 시공간은 우리 역사의 시공간이 만주를 포괄하고 있음을 확인해주는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부여는 유독 만주 지역에서만 존재했던 우리 겨레의 나라로, 고조선과 함께 우리 겨레의 뿌리 국가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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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적연 | 작성시간 19.03.03 부여의 정통성이 해부루에 있으니 해부루를 밀어낸 세력이 그 지역에서 이어간 왕조는 부여와 무관하다고 보는겁니까? 그리고 대소이후 갈라진 세력중에 마여의 집단으로 부여의 정통성이 이어졌다고 보시는건가요?
  • 답댓글 작성자김용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9.03.03 해부루를 밀어낸 세력이 삼국유사에는 해모수로 나타납니다만, 이후 기록이 없습니다. 무관하다고 본 적은 없습니다. 동부여, 북부여 논란으로 이어지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대소이후 갈라진 낙씨왕이나, 갈사왕은 이미 부여를 떠난 것이고, 대소 이후 부여의 왕으로 처음 등장한 인물은 위구태입니다. 그 다음은 기록에 등장한 왕계를 표시한 것입니다. 마여집단에 정통성이 이어졌다는 이야기는 어떤 의미로 질문하신 것이지요? 신뢰할 수 있는 사료로만으로는 부여 왕계를 더 밝히기 어렵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적연 | 작성시간 19.03.04 김용만 마여집단은 위에서 말씀하신 구태로 시작되는 계보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공손탁의 딸과 결혼한 위구태가 대방의 옛땅에 백제를 세웠다는 그 구태라면 구태를 이었다는 마여는 백제왕으로 봐야하나요 부여왕으로 봐야하나요? 그리고 위구태에서 마여로 이어지는 족보는 어디에서 볼 수 있는지요? 그리고 후한과 협력한 구태의 부여는 어느 부여를 말하는 것지요?
  • 작성자김용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9.03.04 三國志卷30-魏書30-烏丸鮮卑東夷傳第30-夫餘 편에 다음 기사가 있습니다. 이 자료가 가장 기본적인 부여 자료입니다. 280년경에 삼국지가 쓰여진 만큼, 구태-백제설 보다 앞선 자료이기 때문에, 이 자료가 더 신빙성이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부여 왕계를 적은 것입니다. 백제가 부여 계승성을 내세우면서 혼동이 생긴 것입니다. 삼국지에서 부여는 단 1개의 나라로 등장합니다.
    ◉<夫餘>本屬<玄菟>. <漢>末, <公孫度>雄張海東, 威服外夷, <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 時<句麗>․<鮮卑>彊, <度>以<夫餘>在二虜之間, 妻以宗女. <尉仇台>死, <簡位居>立. 無適子, 有孽子<麻余>. <位居>死, 諸加共立<麻余> ---.
  • 답댓글 작성자적연 | 작성시간 19.03.04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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