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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션 <거문고갑을 쏴라>

작성자평해거사|작성시간10.07.17|조회수389 목록 댓글 3
 

소지마립간은 비처왕이라고도 했는데 신라 제21대 임금이다. 아버지는 자비마립간, 어머니는 서불한 미사흔의 딸 김씨. 왕비는 이벌찬 내숙의 딸 선혜부인이다. 소지마립간에게는 두 명의 왕비가 있었으니 이 선혜부인과 말년에 얻은 벽화부인이다. 신라의 왕호는 22대 지증마립간 때 ‘왕’이라고 바꾸기 전까지는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으로 불렀다. 마립간이란 마리칸- 우두머리 칸, 즉 대왕이란 뜻이다.

소지마립간이 즉위한 지 10년째 되던 서기 488년에 이런 일이 있었다. 마립간이 어느 날 신하들을 거느리고 서라벌 근교 천천정으로 민정시찰을 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까마귀와 쥐가 커플로 나타나더니 쥐가 이렇게 사람처럼 말을 하는 것이었다.
“마카(모두) 날 좀 보쏘~! 이 까마귀가 가는 곳으로 한 번 따라가 보쏘~! 찍, 찌익!”
“아니, 이럴 수가! 쥐가 사람의 말을 하다니! 우찌 이런 요상한 일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아이가?”
“참말이제 말세에나 있을 법한 요상한 일이구마!”
마립간과 신하들이 모두 놀랍고 괴이쩍게 생각하면서도 쥐가 시키는 대로 호위무사, 요즘으로 치면 청와대 경호실 요원 한 명을 시켜 까마귀를 따라가 보라고 시켰다.
경호무사가 말을 타고 날아가는 까마귀를 따라가다가 피촌에 이르렀는데, 돼지 두 마리가 요란하게 싸우고 있었다. 돼지들이 얼마나 열나게, 박 터지게 싸우는지 무사는 제 임무도 까맣게 잊은 채 그 싸움을 재미있게 구경하다가 그만 까마귀의 종적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하이고, 이 일을 우짜면 좋노! 큰일났데이! 목이 달아나게 생겼데이! 당황한 무사가 사라져버린 까마귀를 찾아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연못 가운데서 머리도 허옇고 수염도 허연 노인 한 명이 걸어 나오더니 편지 한 통을 주며 이렇게 이르는 것이었다.
“이 편지를 퍼뜩 느그 마리칸에게 갖다 주거래이, 알아 들었제?”
그러고 나서 노인은 아까 그 괴상한 까마귀처럼 온다간다 소리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무사가 부리나케 소지마립간에게 달려가 자초지종을 보고하고 그 편지를 바쳤다. 마립간이 보니까 봉투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 -
그것을 보고 소지마립간이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기 무슨 개 풀 뜯어 묵는 황당한 소리고? 오늘은 우찌 이리도 요상한 일만 생기노? 그래도 두 사람이 죽는 거보다야 한 사람이 죽는 기 안 낫겠노? 그러니까 안 보는 기 더 낫겠제, 그자?”
그러자 곁에서 모시고 있던 일관- 왕실의 점쟁이가 이렇게 아뢰었다.
“꼭 그렇지만도 않네예! 점괘를 보니까 두 사람이라카는 건 서민이고, 한 사람이라카는 건 마리칸을 가리킨다 아입니꺼?”
“아니 뭐라꼬? 나, 나를 가리킨다꼬?”
그 말을 듣자 소지마립간은 속이 뜨끔했다. 아무렴, 내가 죽을 수야 없지! 이 마리칸이 죽으면 금방 국정에 큰 혼란이 오지 않겠노? 그래서 봉투를 뜯어 속에 든 편지를 보니 이렇게 쓰여 있었다.
- 거문고케이스를 쏘아라!(射琴匣) -
마립간은 마음속에 짚이는 것이 있는지라 신하들을 이끌고 그 길로 급히 환궁했다. 그리고 내전으로 들어가 거문고집을 활로 쏘게 했다. 그러자 거문고집이 화살을 맞고 와장창 박살이 났는데, 이럴 수가! 그 뒤에서 백주에 벌거벗고 정신없이 방중술에 몰두하던 남녀 한 쌍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게 아닌가.
“아, 아니, 저, 저것들이! 느그들 지금 거게서 뭐하고 있노?”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커플이 보통 궁녀와 신하도 아니고, 여자는 바로 왕비인 선혜부인이요, 사내는 내전에서 불공을 올리던 묘심이란 중이었다. 소지마립간이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악을 썼다.
“느그들 이기 뭐꼬? 나 빨리 죽으라꼬 벌이는 저주의 굿판도 아니고! 내가 잠깐 공무로 출타한 틈을 타서 이런 개지랄을 하다니! 야, 이 땡중 묘심아! 이 색사에 미친눔아! 느그 부처님이 남의 여편네하고 남편 몰래 재미나 보라꼬 가리치드나? 이놈아야, 내가 뭐 늙었다꼬 힘이 없어서 야간작업을 자주 안 한 줄 아나? 북쪽에선 고구려와 말갈족이, 남쪽에선 왜놈들이 매일같이 쳐들어오니까 불철주야 국정수행에 너무 바빠 그리 된 기지. 요 땡중 노무 시키! 니 언제부터 내 마누라한테 작업 걸었노, 엉? 이 문디 자석아!”
간통 사실을 현장에서 들켰으니 두 사람은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묘심이란 중이 좀 엉뚱한 구석이 있는 자였다. 분노와 수치를 못 이겨 부들부들 떠는 임금 앞에 납작 엎드린 채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캤는데, 내사 참말로 죽을죄를 졌네예! 그렇지만, 소승이 이 궁금증을 풀지 않고서는 도저히 극락왕생하지 못 하겠는 기라예! 마리칸께서 우찌 알았는공 시원하게 갈차주시면 죽어도 원이 없겠어예!”
“오야 오야, 내사 이왕 쪽 팔린 거, 죽은 귀신 소원도 풀어준다는데 그동안 짝퉁이긴 하지만 부처님을 모신 중노릇을 했으니 내 갈차주꾸마. 니도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을 알고 있제?”
“?”
“느그들은 그동안 쥐도 새도 모리게 재미를 봤다꼬 생각했겠지만, 천만에 만만에 말씸이다 그 말이제!”
“그 말씸이 아니면 뭔 말씸인데예?”
그 사이에 얼른 옷을 찾아 40대의 한창 물오른, 금세라도 터질듯 풍만한 젖가슴과 엉덩이를 가린 왕비 선혜부인도 저 영감이 어떻게 꼬리를 밟았을까, 궁금하기 짝이 없어 귀를 쫑긋 세운 채 듣고 있었다.
“이 ‘물견’들아! 내 오늘 민정시찰을 나갔다가 느그들의 낮일을 본 까마귀와 밤일을 본 쥐로부터 특별보고를 안 받았겠노? 그래서 다 알았지 뭐꼬? 어때, 놀랐제?”
“으히힛, 흐흐흑! 우, 우찌 그런 일이!”
그렇게 하여 소지왕의 명령에 따라 두 사람은 처형당했고, 노인이 나와서 편지를 준 그 연못을 서출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거문고케이스사건’, 일명 ‘서출지사건’의 전말이다.

그런데, 왕비 선혜부인과 파계중 묘심을 처형했다는 <삼국유사>의 이 기록은 본 작가가 정밀조사를 해 본 결과 사실과는 다른 점이 나타났다. 김대문의 <화랑세기>, 김부식의 <삼국사기> 등 다른 사서는 이와 다른 내용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소지마립간과 선혜부인은 딸 보도공주를 낳았다. 또 선혜부인은 이 ‘거문고케이스사건’에서 보다시피 묘심과 통정해서는 둘째딸 오도공주를 낳았다.
그러니까 간통 사실이 발각되었을 때 그 자리에서 처형당했다면 둘째딸은 낳을 수가 없었을 것이 아닌가. 그리고 당시 신라 상류층의 성 풍조는 매우 자유분방했고, 황실의 순수한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 근친혼도 성행했다. 따라서 간통죄란 있지도 않은 죄명으로 왕비가 처형당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소지마립간의 맏딸 보도공주는 나중에 소지마립간 다음 임금인 지증왕의 태자 김원종의 부인이 된다. 이 김원종이 뒷날의 법흥대왕이다.
또 한 가지, 신라의 불교는 법흥대왕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느닷없이 불교가 공인되기도 전에 신라 황궁에 웬 중? 하고 의문을 품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뭐 크게 의심할 문제가 아니다.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가 공인된 것은 맞지만, 그에 앞서 눌지마립간 때 고구려에서 넘어온 아도화상에 의해 비밀 포교가 시작되었고, 소지마립간 때에는 황궁 안에도 신자가 많이 늘었다. 그러니까 독실한 신자였던 이차돈이 불법의 공인을 위해 거룩한 순교를 감행한 것이다.
따라서 묘심이란 파계승은 어쩌면 아도화상의 덜 떨어진 제자였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그건 그렇고, 자고로 인간사란 정이 있으면 반이 있고, 동이 있으면 반동도 있게 마련이다. 배우자의 바람에 맞바람을 피우는 것도 이런 이치에 따른 것일까. 젊은 중과 몰래 바람을 피우다가 개망신을 당한 선혜부인도 먼 뒷날 소지마립간의 늦바람에 무던히도 속을 썩이게 된다.
하긴 뭐, 늙은 말이라고 콩을 싫다 하랴, 홍당무를 싫다 하랴! 이건 또 무슨 소리냐고? 궁금하면 반드시 다음 기회를 기다려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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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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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성일 | 작성시간 10.07.17 남당유고에 있는 관련기사인데, 내용의 차이가 있습니다.
    黃龍 正月 王與璽宮蓮帝 受朝 明宮
    황룡(黃龍=戊辰)년(A.D. 488)

    王將幸天泉亭 有書 出池 曰射琴匝(匣?) 乃射琴匝有徒 隱內而斃 索其奸狀 謀出妙心 命剡臣按之

    賜妙心死 命蘭陵英陵 出宮 待罪

    命廢天宮地宮 出居神宮 時妙心獄事 多連宮中 上下洶洶 智度路戒 剡臣止之 請王移宮月城 王命 卽行之
  • 작성자미주가효 | 작성시간 10.07.17 "왕비 선혜부인과 파계중 묘심을 처형했다는 <삼국유사>의 이 기록은 본 작가가 정밀조사를 해 본 결과...."

    => 소설이야 기록이나 사실과 꼭 부합할 필요가 없는 픽션이니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윗글은 소설을 마치고 나서 역사기록에 대해 작가가 쓴 글이니 한 가지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삼국유사> 의 '사금갑' 조에는 저 사건에서의 여성과 중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궁주'(宮主)와 승려(僧)' 라고만 나와 있을 뿐이지요. (王入宮見琴匣射之, 乃內殿焚修僧與宮主潛通而所奸也.) 그러니 <삼국유사> 에 왕비 선혜와 승려 묘심이 간통해서 왕이 둘을 처형했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한 말이 아닙니다.
  • 작성자미주가효 | 작성시간 10.07.17 묘심, 선혜 등의 이름이 나오는 건 <화랑세기> 입니다.
    그리고 '궁주'(宮主) 라는 것이 과연 왕비를 말한다고 단정할 수 있는지도 의문입니다. 왕비가 아닌 여성도 궁주라 부르는 예가 있기 때문입니다. <삼국유사> 의 만만파파식적과 관련된 이야기에는 부례랑이라는 화랑의 공을 치하할 때 그 화랑의 어미를 '경정궁주' 로 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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