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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요 법 회

12월04일,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3.

작성자밸라거사|작성시간16.12.08|조회수193 목록 댓글 1

  2016.12.04.. 비 온다던 밤 서산 시내에, 있으라고 이슬비가 솔솔 내렸다




 

 

 

  1204,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3.



 

 

 

  여보세요! 일요법회 앵커맨 밸라거사입니다.



 

 

 

 

  사십 몇 년 전 친구의 소개로 어느 시골 절에 갔습니다. 불교학생회에서 같이 활동을 했던 친구인데 겨울방학을 이용해서 절에서 한동안 지내고 싶으니 절을 한 군데 소개해달라고 했더니 그 절을 소개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도 그 절을 잘 알고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두어 차례 가본 적이 있는 절이었으나 빼어난 도량의 경관과 젊은 주지스님의 법문이 인상적이어서 기억하고 있었던 절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시골 절은 전기도 없고 신문도 이틀이 지난 후 구문이 되어야 겨우 들어오던 시절이라 전화 같은 것이 있을 턱이 없었습니다. 무조건 책 몇 권과 옷가지를 담은 보따리를 챙겨들고 친구와 길을 나섰습니다. 아마 겨울방학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220일 전후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은 햇살이 따뜻한 날이었습니다. 시내 외곽에 있는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한 시간 반 가량 털털거리면서 갔더니 친구가 여기에서 내리자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버스에서 내린 곳에는 먼지 풀풀 날리는 길가에 허름한 점빵이 하나 있었는데, 이 점빵이 시외버스표를 구입하는 매표소이자 슈퍼마켓이었습니다. 점빵 옆길을 따라서 안쪽으로 보리가 자라고 있는 푸른 밭 사이를 지나 집이 십여 채 드문드문 서 있는 산 아래 마을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마을 아이들 서너 명이 푸른 하늘에 하얀 가오리연을 띄어놓고 연실을 채고 있었습니다. 십여 채 시골집을 지나자 바로 산비탈을 향해 올라가는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렇게 높지도 않고 험하지도 않은 마을 뒷산에는 나무들이 실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봉우리를 한 개 두 개째 올라서자 저 아래 산기슭사이에 도량 안 건물의 기와지붕이 어른어른 보였습니다. 거친 숲길을 따라 삼십여 분 걸어가면 허물어진 흙담 옆으로 헛간이 보였습니다. 헛간 안에는 이런저런 농기구들과 빈 포대들이 쌓여있었습니다. 헛간을 지나면 낯선 시선視線을 받아주는 지붕이 있는 작은 샘이 있고 그 뒤로 후원이 바로 보였습니다. 벌써 오후2시가 넘은 시간이라 후원이 있는 기와건물의 그림자가 헛간 쪽으로 길게 누워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에도 인기척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도량 안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후원이 있는 건물을 끼고 안쪽으로 돌아들어가 보았더니 바로 대웅전 마당이 나왔습니다.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아래에는 석탑이 한 기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건물은 대웅전에서 보면 오른편에 있는 일광당이었고, 맞은편으로는 만세루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웅전 왼편인 일광당 맞은편에는 명부전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대웅전 뒤로는 작은 대숲사이로 돌계단을 지나 스님들의 거처인 노전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대충 도량을 둘러보고 돌아왔을 때 후원에 보살님 한분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주지스님을 뵐 수 있는지 물어보았더니 대중스님들 모두 김장김치를 담을 배추를 실러 아랫마을에 내려갔는데 곧 돌아올 때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보살님은 우리들에게 점심공양을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아직 점심공양을 못했다고 대답했더니 대중스님들이 금세 돌아오시면 함께 공양을 하시라면서 대중방인 일광당에 들어가서 쉬고 계시라고 말했습니다.





 

 

  대략 한 시간여 동안 지붕이 있는 샘인 세심정洗心亭 가에 앉아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더니 드디어 배추를 가득 실은 리어카를 끄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후원 앞마당에서 주지스님과 대중스님들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십 몇 년 전 어느 화창한 겨울날 오후 바로 그 시간이 도회지 학교 불교학생회에서 만났던 신식불교가 아니라 산속 전통불교를 만나는 첫 순간이었습니다. 주지스님의 파르란 머리와 맑은 모습은 마치 학을 연상하게 해주었습니다. 대중스님들 중에는 내 또래의 스님들이 너덧 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절에 들어간 지 사흘인가 있다가 또 한 사람이 행자를 살려고 왔습니다. 이 몇몇 분의 스님들은 지금까지 나와 친구 사이인 도반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내게는 친구이자 도반이지만 밖에 나가면 이 스님들은 벌써 법랍이 44,5년째인 노스님들입니다. 두어 분 돌아가신 분도 있고, 마을로 돌아가 결혼을 하고 목장을 하는 분도 있지만 아직도 절반가량은 비구比丘의 삶을 살고계십니다. 스님들 중 나보다 사흘 뒤에 행자를 살러 오신 분은 이 절에서 행자를 일 년을 하고 해인사로 가서 또 행자생활을 일 년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미계를 받자 은사스님이 계신 이 절로 다시 돌아와서 살다가 군에 입대를 했습니다. 그해 겨울 내내 이 행자스님은 후원에서 공양주보살님과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떡을 쪘습니다. 나도 후원에 있는 넓고 어슴한 공간과 나무 타는 구수한 냄새가 좋아서 아궁이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나는 이 행자스님더러 내가 사흘 앞서 절에 왔으니 내가 당연히 선배라고 말을 하면 행자스님은 일주일 전에 절에 와서 주지스님을 만나 뵙고 행자를 살러 절에 일주일 후에 돌아오겠습니다. 하고 말을 했으니 나보다 나흘 선배라면서 선배를 결코 양보하려하지 않았습니다. 아궁이 불에 고구마를 구워 방에 슬쩍 넣어주기도 하고 누룽지나 떡을 꼭 챙겨서 방문을 두드려서 열어보고는 말없이 넣어주고는 했습니다. 시인이고 수필가인 이 스님은 해인사 강원에서 오랫동안 후학들을 가르치시다 지금은 따뜻한 남쪽 어느 산 아래 토굴을 지어놓고 18년째 홀로 글을 쓰고 농사를 지으면서 수행을 하고 계십니다. 지난해 봄, 스님께서 토굴을 짓고 홀로 생활을 한 지 17년이나 지나서야 스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토굴 마당에 들어서던 나는 차실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스님과 엉겁결에 서로 눈이 부딪쳐서 토방께에서 서로 손을 마주 잡았습니다. 스님의 얼굴이 많이 변했습니다. 이제 모습과 얼굴에 노스님 태가 역연했습니다. 기억 속에는 군 입대를 하러간다면서 걸망을 메고 산모퉁이를 돌아가던 씩씩한 걸음걸이가 선연한데 그것이 스님의 사십 몇 년 전의 젊은 기억이라는 것을 나도 이따금 혼동을 합니다. 겉모습은 살짝 바뀌었지만 어눌한 듯한 말투나 애정 어린 미소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랬습니다.





 

 

  하여튼 그렇게 시골 절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후원 아궁이에 군불을 때면 공양주보살님 방을 지나 내 방으로 불이 들기 때문에 방이 뜨거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겨울을 지나기에는 따뜻한 방이었습니다. 공양시간에는 모두 일광당 대중방에 모여 발우공양을 했습니다. 아침과 저녁예불 후에는 일광당에서 참선을 한 시간씩 했습니다. 그리고 밤이면 스님들 사이에 끼어 주지스님께 사미율의와 초발심자경문과 치문을 배웠습니다. 아침과 저녁예불에 몇 번 들어가 보았더니 당장에 천수경과 반야심경을 외워야했습니다. 칠정례는 예불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입에 붙게 되었는데 천수경과 반야심경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물론 반야심경은 금세 외울 수 있었으나 천수경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천수경도 시간이 지나면서 목탁소리에 맞춰 따라서 할 정도는 되었지만 그 뜻과 의미를 알고하는 염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스님들도 사정은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늘 일요법회에서도 그랬습니다. 효원스님께서 사시불공을 시작하면서 천수경을 치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시불공 마지막에는 신중단으로 돌아서서 반야심경을 쳤습니다. 그런데 오늘 일요법회에서도 반야심경을 목탁소리에 맞추어 도반님들과 송경하면서 궁금하게 생각했습니다. 반야심경의 첫 구절입니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를 행할 때 오온五蘊이 비었음을 비추어보고 모든 괴로움을 여의었느니라.’의 오온이 비었음을 비추어보고 모든 괴로움을 여의였다는 말은 해탈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 가떼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디 스와하하는 진언이 또 나옵니다. 가자가자 저 언덕에 가자 저 언덕으로 함께 가자 그곳에 깨달음이 있으리라. 라는 의미입니다. 반야심경 첫 부분에서 깨달음을 얻어 이미 해탈을 해버렸는데 반야심경 마지막 부분에서 깨달음이 있는 저 언덕으로 함께 가자. 라는 말이 수미상관首尾相關 형식인 문학적 강조법이라기보다는 두 가지의 사상이 한 경에 들어와 있는 듯한 상이相異함이 느껴집니다. 본래 반야심경은 반야般若의 공사상과 밀교의 진언眞言이 합해진 형태의 경입니다. 그렇지만 이 자리에서 홀연히 깨닫고 난 뒤에 또 깨달음의 언덕으로 함께 가자는 말은 아무래도 어색해보입니다. 반야심경도 해석하는 안목과 수준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천수경千手經에 오면 그 뜻을 일일이 새기면서 송경을 하는 신도님들이 얼마나 있을까 하고 궁금해집니다. 본래 의미를 알고 경을 송경하는 것과 무슨 뜻인 줄도 모르고 경을 송경하는 것은 바로 깨달음의 불교와 구복불교求福佛敎의 차이점을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구복불교와 기복불교祈福佛敎는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구복불교의 근원은 어디서부터일까, 구복불교와 깨달음의 불교는 서로에게 소통과 설명 가능한 무엇인가? 하는 궁금증들은 비단 나만 품고 있는 의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은 그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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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무심 | 작성시간 16.12.09 求도 祈도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데 그 놈의 福이 어리석음이네요. 사실 福이랄 것도 禍랄 것도 없는 것인데. 숭산 스님께서 관세음보살이건 아미타불이건 옴마니반메흠을 외우건 상관없다고 '코카콜라'를 진언으로 삼아도 깨달음은 얻을 수 있다고 하셨던 것이 생각나네요. '無無明 亦無無明盡' 저같은 범부중생의 족쇄입니다. 밧줄로 밧줄을 묵어 놓은 격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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