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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미술 감상

[불교회화]18. 땀 흘려 일하는 자, 무엇을 해도 떳떳할지니-백장 회해

작성자무진당|작성시간15.05.11|조회수313 목록 댓글 16

조정육의 그림, 스님에 빠지다 18. 대진, 어락도

 

18. 땀 흘려 일하는 자, 무엇을 해도 떳떳할지니-백장 회해

대진, 어락도(漁樂圖)부분, 두루마리, , 비단에 연한 색, 46×740cm, 프리어 갤러리

 

백장회해(百丈懷海,749-814)는 마조도일의 제자다. 속성이 왕씨(王氏)인데 어릴 때 속세를 떠나 삼장(三藏)을 두루 공부했다. 마조 선사가 교화를 펼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서당지장(西堂智藏,735-814)과 함께 입실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날아가는 오리 때문에 마조선사에게 코를 잡혔던 백장 선사는 강서성 홍주의 대웅산(大雄山)에서 크게 선풍을 일으켰다. 그 후 대웅산은 백장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백장 선사는 야호선(野狐禪)과 관련된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 백장 선사가 설법을 하면 늘 한 노인이 와서 법문을 듣고 대중과 함께 흩어졌다. 하루는 노인이 가지 않고 혼자 있었다. 선사가 물었다.

 

서 있는 사람은 무엇하는 사람인가?”

 

노인이 대답했다.

 

저는 가섭불(迦葉佛) 때 이 산에 살았습니다. 그 때 한 학인이 묻기를, ‘수행을 많이 한 사람도 인과(因果)에 떨어집니까?’하기에 인과에 떨어지지 않는다(不落因果)’라고 대답하여 여우의 몸(野狐)을 받았습니다. 지금 스님께서 대신 이 몸을 바꿀 만한 한 마디를 해 주십시오.”

 

지금 물어라.”

 

많이 수행한 사람은 인과에 떨어집니까?”

 

인과에 어둡지 않다(不昧因果)."

 

노인은 말끝에 크게 깨닫고 선사에게 하직하면서 말했다.

 

제가 이제는 여우 몸을 벗고 산 뒤에 있을 것입니다. 불법대로 화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사는 유나(維那)에게 종을 쳐서 점심 후 대중 운력으로 죽은 스님을 장사지내겠다고 알리게 했다. 선사는 대중을 거느리고 산 뒤 바위 아래로 가서 죽은 여우 한 마리를 지팡이로 휘저어 꺼내더니 법도대로 화장했다.

 

백장록(百丈錄에 나오는 이야기다. 여기서 나온 단어가 야호선이다. 야호(野狐)여우또는 들 여우를 뜻한다. 선을 수행한 사람이 아직 깨닫지도 못했으면서 스스로 이미 진리를 깨달았다고 생각한 것을 야호선이라 한다. 노인이 오백 생 동안 여우의 몸을 받은 까닭은 불매인과(不昧因果)라고 해야 할 것을 불락인과(不落因果)라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불매인과와 불락인과는 낙()자와 매()자만 다를 뿐 나머지는 똑같다. 그런데 결과는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모든 것은 한 끗 차이다. 불낙인과는 대오한 수행인은 인과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뜻으로 부처님이 가르친 인과응보설을 부정한 것이다. 콩 심는데 콩 나고 팥 심는데 팥 나는 진리를 무시한 발언이다. 아무리 위대한 수행자라도 자기가 지은 선악의 과보는 피할 수 없다. 부처님도 피해갈 수 없다. 누구나 다 착한 행위를 하면 복을 받고 악한 행위를 하면 화를 받는다. 그러니 불낙인과는 불법의 진리에 어긋난다. 반면 불매인과(不昧因果)는 인과응보의 진리를 분명하게 인식한다는 뜻이 된다. 백장선사의 한마디에 노인이 여우의 몸을 벗게 된 것도 정견(正見)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매인과는 정견이지만 불낙인과는 사견(邪見)이다. 정견을 얻지 못한 사람이 마치 정견을 얻은 듯 선지식 행세를 했으니 그는 남을 속인 거나 다름없다. 이때부터 야호선은 아직 깨닫지 못했으면서도 스스로 진리를 깨달았다고 속이는 가짜 선을 지칭하게 되었다. 진짜와 가짜는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진짜가 가짜 같고 가짜가 진짜 같다. 예나 지금이나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 백장선사가 굳이 야호선을 얘기한 이유는 진짜 같은 가짜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불교의 기본인 인과응보도 무시한 채 거드름 피우는 제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기본도 모르는 사람에게 어떤 진전이 있겠는가.

 

야호선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은유법인지 우리 같은 범부들은 확인할 길이 없다. 그와 비슷한 이야기가 또 있다. 스님께서 어느 날 저녁 깊은 잠에서 깼는데 갑자기 더운물이 마시고 싶었다. 그러나 시자도 깊은 잠에 빠져 불러도 깨어나지 않았다. 조금 뒤에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면서 시자를 불렀다.

 

큰 스님께서 더운 물을 찾으시오.”

 

시자가 벌떡 일어나 물을 끓여 스님께 가지고 오니, 스님께서 놀라 물었다.

 

누가 이렇게 물을 끓여오라 하던가?”

 

시자가 앞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자 스님께서 손가락을 퉁기면서 탄식했다.

 

나는 결국 수행하는 법을 모르고 있었구나. 만일 수행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사람도 느끼지 못하고 귀신도 알지 못해야 하는데 오늘 나는 토지신에게 내 마음을 들켜 이렇게 되었다.”

 

큰 스님이나 수행자는 언제나 화엄성중(華嚴聖衆)이 외호한다. 토지신과 목신(木神), 산신(山神), 수신(水神)도 마찬가지다. 다만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우주 법계에 가득한 여러 신장(神將)들은 수행자를 지키면서 동시에 수행자를 따라 그들 자신도 수행한다. 수행자가 염불을 하거나 깊은 삼매에 빠져 탐진치가 떨어지면 그 주변에서 향기가 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니 보는 사람이 없다하여 함부로 살아서는 큰 일 난다. 토지신이 백장선사의 생각을 안 것은 늘 선사의 곁을 지키며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했기 때문이다. 백장선사의 마음을 읽을 정도로 이미 토지신의 수준은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백장선사는 왜 탄식했을까. 아직도 자신이 수행자라는 상()을 버리지 못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수행자라는 아상(我相)이 남아 있는 한 진정한 수행이라고 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토지신이 백장선사의 마음을 안 것도 대단한데 그런 마음을 들킨 것을 탄식하는 백장선사의 모습은 더 대단해 보인다. 수준 자체가 다르다. 불교계에는 이런 얘기가 수도 없이 많다. 그 경계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은 믿을 수가 없으니 거짓말이라고 한다. 그 경계에 처음 도달한 사람은 자신이 마치 도인이라도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초등학생이 대학생 수준을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신이 직접 체득해야 하는 선종의 가르침은 어떻게 전해질까. 스승이 제자에게 의발을 전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어떤 스님이 백장선사에게 물었다.

 

예로부터 조사들께서는 모두 비밀스러운 말씀으로 계속 전수해왔다 하니 무슨 의미입니까?”

 

백장선사가 말했다.

 

비밀한 말은 없으며, 여래께서는 비밀스럽게 간직한 것이 없으시다. 비추어 깨닫는다 함은 말은 분명하나 형상을 찾아도 끝내 찾지 못하니 이것이 비밀스러운 말이다. 수다원에서 10(十地)에 오르도록 무슨 말이든 있기만 하면 모조리 법의 티끌에 속하고, 무슨 말이든 있기만 하면 번뇌라는 테두리에 들어가고 방편교설에 속하니 말이 있었다 하면 무엇이든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궁극적인 교설마저도 부정하는데 다시 무슨 비밀한 말을 찾겠는가.”

 

스승과 제자 사이에 비밀스러운 가르침이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승이 도달한 경지에 제자가 올라올 수 있어야 한다. 스승이 대신 가 줄 수 없다. 제자 스스로의 힘으로 걸어 올라와야 한다. 그때까지 스승은 그저 기다리고 바라봐줘야 한다. 스승이 아무리 훌륭해도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을 감당할 능력이 되지 않으면 그 가르침은 아무 소용없다. 아니 오히려 더 뛰어나야 한다. 그래서 백장선사는 황벽선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견처(見處)가 스승과 같으면 도는 반쯤밖에 안되고, 견처가 스승을 능가해야만 전수를 감당할 만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짜 도일까. 어떻게 하는 것이 도인이 되는 것일까. 어떤 이가 물었다.

 

무엇이 도에 들어 단박 깨닫는 대승법입니까?”


백장선사가 대답했다.

 

우선 그대는 모든 반연(攀緣:대상에 의지함)을 쉬고 만사를 쉬어서 착한 일, 착하지 못한 일 등 세간의 온갖 것들을 모두 놓아버린 뒤에 기억하지도 말고 생각하지도 말라. 몸과 마음을 놔버려 자유롭게 하면, 마음은 목석같이 되고 입으로는 말할 것이 없고 마음으로는 분별할 길이 없어진다. 마음은 허공 같아 지혜의 해가 저절로 나타나는데 마치 구름이 흩어지면 해가 나듯 할 것이다.”

 

이렇게 간단하다니. 믿을 수가 없다. 이것이 비밀스러운 말이라니. 거짓말 같다. 그러나 잠시라도 마음을 쉬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고 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진리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실천하기가 힘들 뿐이다.

 

백장선사는 선원의 조직과 교단의 규정을 집대성한 선원청규(禪苑淸規)를 지었다. 선원청규에 의하면 누구든 지 선원의 노동에 참여해야 한다. 주지승이든 사미승이든 직급에 상관없이 모든 대중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을 해야 한다. 백장 선사 자신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 백장선사가 선원청규를 제정하기 전까지 수행자들은 전혀 생산에 종사하지 않았다. 오로지 시주와 걸식에만 의존해 생계를 유지했다. 본래 인도에서는 수행자들이 농사짓는 것을 금했다. 땅을 갈고 곡괭이질을 하면서 본의 아니게 벌레를 죽이는 살생의 업을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후 인도에서의 걸식의 전통도 그대로 유입됐다. 그 전통에 처음으로 반기를 든 사람이 백장선사였다. 백장선사는 모든 승려들이 황무지를 개간하고 밭을 갈아 스스로의 힘으로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그것이 백장청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승려들이 거둬들인 수확량에 대해서는 세속인들과 마찬가지로 세금을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야말로 혁명적인 조치였다. 그 때문에 선종 승려들은 다른 보수적인 종파의 승려들에게 따가운 눈초리와 거듭되는 공격을 받아야 했다.

 

물소리. 바람소리. 투망 던지는 소리. 노 젓는 소리. 강가에 앉아 새참을 먹는 사람들 뒤로 고기잡이배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뒤섞인다. 그 소리는 무성하게 자란 수초를 뒤흔드는가 싶더니 정박해놓은 낡은 어선에 부딪친다. 장마가 끝난 뒤 물이 불었다. 불어난 물은 고기를 품는다. 어부들이 들어간 강물은 물 반 고기 반이다. 한동안 강에 들어가지 못해 속만 태웠던 어부들은 느긋한 심정으로 풍어를 즐긴다. 날마다 오늘 같으면 처자식 건사하기는 땅 짚고 헤엄치는 것만큼 쉬울 것 같다. 강이 베푼 풍요로운 선물에 모처럼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배를 탄 인물을 그린 그림은 어부도(漁父圖) 또는 주유도(舟遊圖)라 부른다. 어부도는 흔히 홀로 배를 탄 선비가 미늘 없는 낚싯대를 드리운 채 때를 기다리거나 시음(詩吟)에 취한 경우가 많다. 주유도는 기생을 대동한 선비들이 달빛을 감상하며 술잔을 부딪치는 예가 대표적이다. 모두 선비의 고상한 취미생활을 짐작할 수 있는 대표적인 상류층 문화의 반영이다. 말이 좋아 풍류지 가진 자의 음풍농월(吟風弄月)을 과시한 혐의가 짙다. 그런데 대진(戴進, 1388-1462)이 그린 어락도(漁樂圖)는 이런 고상한 문화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강호한정(江湖閑情)이나 유유자적 대신 생계를 위한 절박함이 담겨 있다. 어부들은 찰랑거리는 물을 보며 술잔을 기울이는 대신 맨발로 물속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아야 한다. 살생의 업조차 생각할 겨를이 없다. 내 몸을 움직여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인 만큼 누가 뭐라 해도 꿀릴 것 없이 당당하고 떳떳하다. 힘든 만큼 뿌듯하다. 어락도에는 강가에서 물고기를 잡아 살아가는 생계형 어부의 삶이 들어 있다. 몸을 움직여 먹거리를 구하고 움직인 만큼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는 정직한 노동의 현장을 확인할 수 있다. 수초와 나무를 그린 짧고 거친 필치는 생계형 어부들의 일상만큼이나 투박하다. 꾸밈이 없고 활달하다. 그래서 더욱 현장감이 생생하다.

 

대진의 자는 문진(文進), 호는 정암(靜庵)이다. 절강성(浙江省) 출신으로 궁정에 들어가 화원이 되었다. 그는 남송 원체화풍(院體畫風:남송 때의 화원인 馬遠夏珪에 의해 형성된 화풍으로 馬夏派화풍이라고도 함)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자적인 화풍을 이루어 절파(浙派)화풍의 시조가 되었다. 절파란 대진의 고향인 절강성에서 유래한 것이다. 어부도는 중국의 강남 지방에서 많이 그린 전통적인 화제(畫題)였다. 대진을 비롯한 절파 화가들도 어부도를 즐겨 그렸다. 물이 많은 강남의 특수성 때문에 어부들의 삶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많이 본만큼 생동감 넘치는 작품을 그릴 수 있었다. 대진은 어락도, 양반이 데리고 온 기생의 비파소리 대신 투망을 던지는 남정네의 우렁찬 목소리를 담았다. 하루 종일 몸을 부려 밥벌이를 하는 사람은 안다. ‘몸에 한세상 떠 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의 소중함을 안다. 남의 수고를 가로채거나 불로소득에 길들여진 사람은 절대로 알 수 없는 숭고한 세계다.

 

백장선사가 자신이 정한 수행 규칙에 얼마나 철저했는지 알려주는 일화가 전해진다. 백장선사가 노년의 일이었다. 그때까지도 백장선사는 제자들과 똑같이 일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제자들은 연로한 스승이 힘든 노동을 계속하는 것을 보고 건강이 상할까 염려되어 그만 둘 것을 권했다. 그러나 스승은 막무가내였다. 제자들은 하는 수 없이 호미와 곡괭이를 감추어버렸다. 연장이 없으면 노동을 안 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백장 선사는 연장을 찾아 사방을 뒤지다 끝내 찾지 못하자 곡기를 끊었다. 제자들이 물었다.

 

왜 식사를 안하십니까?”

 

백장 선사가 대답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밥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

 

이때부터 일일부작 일일불식은 선승의 수행 생활을 상징하는 글귀가 되었다. 노동을 생활화하면서 선종사찰은 시주자의 희사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종단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백장선사의 이런 혁신이 얼마나 앞서간 조치였는지는 무종(武宗)에 의한 폐불(廢佛, 845) 때 여실히 증명되었다. 31(三武一宗)폐불 중 세 번째에 해당되는 무종의 폐불은 네 차례의 법난 가운데 가장 심각하고 그 강도가 심했다. 무종의 연호가 회창(會昌)이어서 흔히 회창법난으로 불린다. 회창법난은 불교에 대한 도교의 배격이 직접적인 동기였지만 불교 자체 내에서도 그 원인이 잠재되어 있었다. 사원 경제가 비대해짐에 따라 국가 재정이 고갈되었고, 승려의 부패와 타락이 극에 달해 가짜 승려가 속출했다. 무종은 폐불을 단행하여 26만 명의 승려를 환속시켰고, 4,600개소의 사찰을 폐지시켰다.

 

회창법난을 기점으로 하여 그 전에 번성했던 많은 불교의 종파들이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데 유독 선종만은 회창법난 이후에도 계속 발전할 수 있었다. 즉 다른 종파의 승려들이 무위도식하며 민초의 고혈을 빨아먹는 기생충이라는 비난을 받는 데 반해 선종의 승려들은 달랐다. 신도들의 보시에 의존하는 대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참선하는 주경야선(晝耕夜禪)의 실천으로 법난에서 자유스러울 수 있었다.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언제든 당당할 수 있다. 땀 흘려 일하는 사람은 무엇을 해도 떳떳하다. 호미질을 하든 낚시질을 하든 자존감이 넘친다.

 

다시 야호선으로 돌아가 보자. 만참(晩參)법문 때 백장선사가 앞의 인연을 거론했더니, 황벽스님이 대뜸 물었다.

 

옛사람을 깨닫게 해주는 한마디를 잘못 대꾸하였기 때문에 여우 몸에 떨어졌습니다. 오늘 한 마디 한 마디 어긋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가까이 오게. 그대에게 말해주겠네.”


황벽스님이 앞으로 다가가자 백장선사가 황벽 스님의 따귀를 때리려 했다. 그런데 황벽스님이 한 박자 빨랐다. 황벽스님이 느닷없이 스승의 뺨을 쳤다. 그러자 백장 선사가 박수를 치고 웃으며 말했다.

 

오랑캐의 수염이 붉다 하려 했더니 여기도 붉은 수염 난 오랑캐가 있었구나.”

 

백장 회해의 가르침은 황벽희운과, 위산영우(潙山靈祐)에게 전해졌다.

 

*이 글은 법보신문 1293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86848)에 실렸습니다.

*조정육의 행복한 그림읽기(http://blog.daum.net/sixgardn/15770808)에서 가져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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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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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나쁜남자 | 작성시간 15.05.18
    기왕에,,욕,,먹을 것이라면?
    한번,,더 먹겠습니다.

    제,,컴은
    모니터가 작답니다.
    해서,,글을 읽을려면
    신경을 바짝,,써야 되지요.
    모니터 작은것을,,,어쩌라고?
    하시면,,ㅎㅎ

    제,,뜻은?

    글이,,죽~늘어 있으니
    조금,,불편하다,,입니다.
    칸,,늘림이나
    줄,,바꾸기를 조금 해주신다면??
    모든,,중생들이
    님의 좋은 글을 접함에
    편하지,,않을까? 싶습니다.

    좋은,,글은 나누라,,고 했는데
    어려운 일이 아니시라면?
    그리,,해주시지요.

    보편적으로,
    글이,,복잡해 보이거나
    읽기 어려워 보이면?
    그냥,,지나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죄송합니다.
    노안이,,와서!!ㅎ

    쪽지,,잘 받았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무진당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5.18 다음부터는 읽기 편하도록 신경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나쁜남자 | 작성시간 15.05.18
    님의,,글을 다시,,보았습니다.
    그리,,풀어 놓으니
    한결,,큰 뜻으로 다가 옴 입니다.

    한마디,,더 거들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내 생각을 이야기할때는!!
    내,,뜻과 이야기를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열정을 다 하지요.
    그러므로,
    미리 알아챘다고
    정작,,자신의 마음과 뜻을 들켰다,,라고 탄식은 안할겝니다.
    오히려,
    상을,,줘야 하지요.

    백장선사님께서
    본인의 느슨함을 스스로 경계함이라고 본다면?
    그런,,탄식도 맞을겝니다.

    저,,또한
    저의 마음과 생각을
    늘,,경계한답니다.

    다시,,말씀 드린다면?

    님의,,고운 글!!
    늘,,감사히 보고 배웁니다.

    고맙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무진당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5.18 저는 후자가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나쁜남자 | 작성시간 15.05.18 무진당 늘..
    건안 하시길 바랍니다.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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