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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어떤 하루

작성자고제홍|작성시간21.12.27|조회수276 목록 댓글 6

 '오늘은 당신의 남은 인생 중, 첫 번째 날이다.' 영화 ‘아메리칸 뷰티’ 중에서 나오는 대사다. 

 

 눈이 뜨이자 정면 벽에 걸린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제 나이로 치면 내 나이만큼 세월을 견딘 시계의 분침이 7에서 12를 향해 할딱이며 기어오르고 있었다. 735. 젊은 시절부터 올빼미라 어젯밤에도 키보드를 두드리느라 자정을 넘겨 잠드니 아침은 언제나 늦는다.

 가만히 귀를 기우려 본다. 거실 쪽에서 내가 깰까 조심스레 걷는 아내의 슬리퍼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장 아파트를 나서는 현관 문소리마저 들렸다. 적확했다. 이제 또 8시 근방이면, 아내가 집을 나서며 준 아침을 먹은 베베란 놈이 후식을 달라며 내 방문을 두드릴 것이다. 그래도 열리지 않으면 요란스럽게 행짜를 부릴 것이다.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기 전에 일어나야한다.

 나는 기지개를 켰다. 열 손가락, 열 발가락을 한껏 벌리고 뻗어 몸속에 쌓인 노폐물을 뿜어내고 새로운 기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손가락마디 끝마다 지압을 꼭꼭했다. 다음은 대장을 위한 운동을 한다. 인생 말년의 건강은 대장에게 달렸다고 내 딴에는 고집스런 집념을 갖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참 몽환적이면서도 발칙한 짓을 한다. 쇠락해 가는 뱃가죽의 자 왕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복근 운동을 180, 하루 세 번 한다. 종목이 바뀔 때마다 엄지발가락 치기를 77회씩 양념으로 끼우고. 복식호흡을 마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실에는 아침상이 곱게 차려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식전에 먹어온 사과 한 알과 산에서 마실 음료가 든 500CC 들이 보온병이 놓여 있었다. 보온병에는 당근과 살구 즙, 토마토를 갈아 끓인 것에 매실 액, 거기다 요구르트와 갈색 양배추 즙에 홍초를 섞은, 아내 말대로라면 그야말로 불로초는 저리 가란다. 그리고 밥상머리에는 빨래라고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빨래가 세탁기에 있으니 알아서 기란다.

 

 아내는 오래전부터 시내에 커피전문점을 열고 있었다. 아침 일찍 나가 직원들과 하루 일정에 대해 협의하고는 자기팔 자기가 흔드는 것 같다. 회장이네 총무네 하면서 봉사단체에 들어가 연로하거나 거동이 불편하신 분의 목욕봉사, 산책시키기, 마사지, 집안 청소해주기, 찬 만들어주기 등 딴에는 꾀나 걸쩍거리는 모양이었다. 80 넘으면 모두 장애인이라는데 집에 장애인 두고 말이다.

 가게를 열고 얼마 안 되어서다.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뭇해 잘 돌아가? 했더니 알려고 하면 다친다며 도리어 생청을 피웠다. 가게 물주가 돈을 댔으면 그 흐름을 알려주어야 하는데도 너무한다 싶었다. 하지만 신나게 돌아치는 것만 해도 다행이다 싶어 새삼스레 곱살끼기도 뭣해 속엣말은 삼켰다. 소동파의 시에 나오는 '하동사자후河童獅子吼'가 터지기 전에 말이다. 게다가 처녀시절부터 하나님을 믿어온 결곡한 아내가 돈주머니가 회개하기 전까지는 회개가 아니다’라면서 하물며 종교개혁가 루터의 잠언투까지 들이데니 옴니암니 따지기도 뭣해 몽따기로 했다. 세상천지에 우리 나이에 아내 이길 장사 있나? 그래도 그 후에는 여태 손을 내밀지 않으니 내심 고맙다, 생각하고 있으니 나는 소갈머리가 없는 건가.

 

 베베가 목줄을 입에 물고 와 내 앞에 놓고 콩콩거린다. 시계를 보니 9시를 넘고 있었다. 나는 늦은 아침을 몇 술 뜨며 빨래를 널고 집을 나섰다. 산자락까지 이어지는 숲길은 대부분이 소나무와 전나무로 이루어져 송무백열松茂柏悅이라 여여했다'가장 추운 시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다는 것을 알게된다.'는  공자의 말이 떠올랐다.

 누군가 애면글면 시나브로 쌓는 노루목의 돌탑은 간동하면서도 무드럭지게 자라고 있었다. 산을 오를 때마다 나는 내가 올려놓은 돌덩이에게 인사를 한다. 내가 놓을 적에는 맨 위였는데 지금은 그 위로 돌들이 쌓여 짓눌리고 있었다. 나는 한눈에 들어오는 돌덩이를 애만지며 말했다.

 “따뜻하기는 하겠다만 짓눌려 힘들지?”

 “무시기 말쌈, 내 힘으로 친구들을 떠받치고 있는 거야”돌덩이가 도리어 까드락거리며 헛장을 쳤다.

 “내가 빠지면 이 돌탑은 무너지고 말 걸….”

 내가 고개를 주억이며 나르시시스트 돌덩이를 쓰다듬자 여느 날처럼 베베도 내광쓰광 한마디 거들었다.

 “폼 잡기는….”

 

 삐쭉거리는 놈을 꼬드기며 산을 올랐다. 산은 언제나 어머니 품 같다. 나는 그 품속에 안기는 것이 그리 좋다. 어머니의 모습은 여일하나 때로 표정이 다르듯 톺아보면 산은 매일매일 다른 표정으로 내게 다가온다. 산 정상에서 베베가 요기조기 코를 박을 동안 나는 족히 한 시간 정도 맨손으로 하는 근육운동을 한다. 주로 하체운동이다. 거짓말 아니라 젊은 날보다 허벅지와 종아리가 한결 튼실해진 것을 절실히 느낀다.

 말이 나온 김에 친구들에게도 권한다. 지금 나이에도 근육은 생성되니 나이 들어 소모되는 근육을 절대 지킬 필요가 있다고. 일테면 보행 장애인이 정상인에게 비해 1.27배 노쇠 위험이 있는 반면에 근감소증은 2.39, 최고로 위험하단다. 근육운동은 이를 닦듯이 매일 해야 한다.

 

 

 하산하는 길에는 알프레드 디 수자의 시 구절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신나게 노래를 흥얼거린다. 하긴 놈이 길라잡이 하는 길은 인적이 드물다.

 집에 돌아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놈을 깨끗이 털어주고 네발을 씻기는 일이다. 그런데 목줄과 입은 옷을 벗기면 놈은 날 잡아 잡수하고 넉장거리 친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 읊는 다더니 내가 밤마다 아내를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마사지 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본 탓인가? 놈도 물색없이 마사지 해 달라 뭉그적거렸다. 종내 나는 매일같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놈의 팔다리와 몸통을 아내와 같이 마사지 해 주는 팔자가 됐다. 놈은 기분이 만땅인지 어떨 적에는 아내처럼 코까지 곤다. 나 참! 덕분에 손에도 근육이 생기고 아귀힘도 세어진 것 같다.

 

 다음은 반신욕이다. 퇴임 후 반신욕을 거른 날은 기억에도 없다. 낮에 못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물속에서 어깨와 허리, 무릎을 풀어주는 운동을 괴음까지 지르며 오두방정을 떤다. 이럴 때는 혼자 있는 것이 참 다행이다, 싶다. 사실 방해받지 않는 고독은 평화롭고 황홀하기까지 할 때가 있다.

 반신욕을 마친 후에는 몸을 닦지 않고 팬티바람으로 베란다에서 방충망까지 활짝 열어 재끼고 일광욕을 즐긴다. 영하의 날씨라도 햇빛만 있으면 거른 적이 없다. 또 우리 집은 아파트 맨 앞 동이고 동네 집들이 다 고만고만해서 거리낌이 없다. (설사 남이 본들 어떠랴! 내남없이 남에게 별 관심이 없다.)

 

 점심은 딱 다섯 가지다. 튀김옷을 입힌 왕새우 한 마리와 바나나 하나, 주먹만 한 찐 고구마, 그리고 샐러드, 계란찜이다. 퇴임 후 변함이 없다. 아내가 준비해 두고 나간다. 흐린 날은 라면과 메밀, 쌀국수를 섞은 나만의 특별요리를 해먹는다.

 점심을 먹고 나면 졸음이 밀려든다. 자리에 누워 신문을 보다 3분 안에 잠이 든다. 중학교 시절 어느 책에서 나폴레옹이 낮잠을 10분에서 20분 정도 잤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말도 안 돼!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데 내가 요사이 그렇다. 짧게는 10, 길게는 30분이면 눈이 자동으로 떠지고 몸은 개운하다.

 

 낮잠을 자고 나서 잠자리에서 하는 운동이 또 대강 50분 정도다. 오후 4시 정각이면 자리에서 일어난다. 저녁은 대체로 친구들과 어울리는데 오늘은 한 갑자를 지낸 초임 때 사귄 동네 청년들과의 모임이다. 6시에 집을 출발하기 전에 할 일이 세 가지였다. 하나는 청소, 둘은 빨래개기, 셋은 설거지다. 4칸짜리 아파트를 청소하는 것도 수월한 일이 아니다. 전에는 밀대로 대충 밀었는데 처삼촌 벌초하는 것 같다는 아내의 농담(?)을 듣고는 손으로 직접 걸레질한다. 교직에 있을 때 숙직을 같이 하던 하청호 시인이 내가 숙직실 구석구석을 공들여 닦는 모습을 보고 말했다.

 “, 진지하네요. 옛 사람들이 마음을 닦는 것 같습니다.”

 청소는 한 몫에 다 할 수 없으니 나누어 한다. 오늘은 거실과 주방을 닦을 차례다.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걸레질하면서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관절에 탈이 없어 이렇게 청소할 수 있게 해주시어 감사, 감사 합니다하고 연신 왼다. 빨래는 거두어 털고 깨끗이 갠다. 손바닥만 한 아내의 팬티는 개면서도 귀엽다. 주름을 펴고 상품 진열하듯 반듯하게 개어 놓는다. 어느 날 아내가 말했다.

 "당신은 빨래를 널고, 개는 것을 예술적으로 한다"고. 거기에 '예술'이란 말이 왜 들어가나? 부려먹는 방법도 여러가지다. 아침, 점심 내가 먹은 그릇들은 언제나 내가 설거지한다. 남우세스럽게 퐁퐁남이라 홀앗이 꼬리표가 붙었다. 설레발을 친 다음, 나는 아이들처럼 허공에 종주먹을 내지르며 고함을 질렀다.

 “오늘 청소, ~!”

 

 눈바래기 하는 베베에게 와이퍼처럼 손을 흔들어 주고 집을 나섰다. 시간이 없어 공도 치지 못했으나 몸은 가뿐했다. 좀 멀었지만 걷기로 했다. 떠나는 일은 언제나 신나는 일이다. 앞서 어정버정 걷는 노인의 바지 뒷주머니에 꽂힌 휴대폰에서 남이야 듣동말동 무람없이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가수 윤도향이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를 부르고 있었다. 나도, 나의 삶의 근원을 곱씹어보았다.

 ‘나는 지금 시답게 살고 있나?’

 내가 청맹과니 무지렁이처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무망한 생각이 무시로 들 때가 한두 번 아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사변적인지는 몰라도 팔, 다리, 허리가 무탈해 넌더리 치지 않고 걸레질 할 수 있고, 설거지 할 수 있고, 빨래를 할 수 있고, 아내를 마사지 해 재워 줄 수 있다면 그 이상 무엇을 바랄까. 이 나이에 젊은이들처럼 ‘갓생’ 하랴. 정답이 없는 것이 인생인 것을…

 그래도 나는 내 나름의 ‘금동지사’를 엮으며 내 인생의 한 챕터를 정리하고 있지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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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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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갈매기 | 작성시간 21.12.28 내 깜양으로는 도저히 흉내 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이라 재미는 있게 읽고, 박수 짝짝..
    아마 120살 까지는 문제가 없을 듯 하다.
    내 건강 비결은 거저 게으른 덕에 오늘 까지 살 고 있다.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 답댓글 작성자고제홍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12.29 자네는 그자
    깍지통 같은 아랫도리에 생명력이 숨쉬고 있는 기라
    나는 죽기살기로 움직여야 하는 팔자고
    자넨 제찍하게 살아도 나보단 나은 팔잘세

    그래봐야 우리 모두, 오장육부가 어느 날 부르면
    새벽 같이 달려 가야하지만 ~
  • 작성자갈매기 | 작성시간 21.12.30 좀 더 살다가 늦게 가자. 삶을 생각 하면서 살고 아름답게 살다 가자.
  • 답댓글 작성자고제홍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12.30 조오치!
    80년 풍랑도 혜처 왔는데
    까짓거, 한 30년 더 못 살아?
  • 작성자이영석 | 작성시간 21.12.31 우정 어린 두 사람 대화가 정겹고 우정이 넘치네.
    평균 수명을 넘겼으니 모든 것이 감사하고 행복한 삶일세.

    두 분 앞날에 하늘의 축복이 있을 지어다. "God bless on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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