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상좌불교 행자 중 '빨리어 대장경인 니까야에서는 연기를 중도라고 칭하지 않는다. 연기는 중이고, 사성제의 8정도만 중도다'는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주요한 근거로 등장하는 것이 초전법륜경이다.
여기서는 위와 같은 주장과 관련하여서만, 그것도 극히 제한적으로 가능한한 짤막하게 초전법륜경의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초전법륜경 전체를 읽고 싶으면, 검색해 보면 된다. 아래는 현재 다룰 논의에 필요한 부분만 축약해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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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자에게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탐착하여 몰두하는 것은 권할만하지 않으며, 고행을 일삼는 것도 권할만하지 않다.
이러한 두가지 극단을 떠나 중도를 온전하게 깨달았다. 이것은 안목과 분별을 생기게 하여 그침, 번뇌의 스러짐, 평등한 지혜, 열반으로 이끈다. 그 중도는 무엇인가? 8정도이다.
아래에서는 사성제가 나온다. 그리고 사성제 중 도성제에서는 또 다시 8정도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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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은 문자화 이전에 집단 암송 방식으로 보존되었기에, 그 방식의 성격상 같은 내용이 반복되고 그래서 일견 논리적으로 매끄럽지 못한 부분들이 있다. 그러한 측면도 잘 감안하여, 뜻의 파악에 초점을 맞춰 [경]을 읽는 것이 좋다.
또한 가급적 해당 [경]을 듣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읽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할 수 있는데, 발을 담그고 세월이 쌓이다 보면 어느 정도 해결되기도 한다.
초전법륜경은 출가자, 특히 고행을 일삼는 출가자를 대상으로 하였다.
'두가지 극단'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중도와 관련해 등장하는 두가지 극단은, 원칙적으로 구체적인 현상의 문제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논리등을 통해 머리속에서만 있는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두가지 극단은 지양하는 편이다.
그렇다면 중도와 관련해, 반드시 두가지 극단이 나오고 그것을 떠나야 하는가? 그렇지도 않다. 두가지 극단을 부정하여, 중도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즉 중도는 두가지 극단에 의존하지 않는다. 두가지 극단은, 단지 중도가 보다 선명해지도록 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극단이어도 좋다. 또는 논리적으로 대극점이 아닌 두가지를 떠나는 형식도 가능하다.
초전법륜경에는, 쾌락의 추구와 고행의 추구가 두가지 극단으로 등장한다. 쾌락파 출자가와 고행파 출가자는 당대에 실제 있었으며, 쾌락파는 단견이었고 고행파는 상견이었다. 즉 두가지 극단으로 쾌락과 고행이 제시되었지만, 쾌락과 고행이라는 두가지 극단은 단견과 상견 내지 무론과 유론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초전법륜경의 '두가지 극단'은, 다수의 [경]에서 등장하는 두가지 극단과 철저히 상응한다. 뜻이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선택가능한 두가지 극단의 표현들 중 하필 쾌락과 고통이 거론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초전법륜경은, 고행파의 다섯 출가자에게 설해졌기 때문이다.
수행하려고 출가한 자에게 최대 관심사는 수행이다. 그래서 중도를 깨달았다고 천명한 다음, 깨달은 중도에서 가장 먼저 '고행의 추구'에 상응하는 '바른 수행'이 두드러지도록 제시된 것이다. 여기서 '상응하는 바른 수행을 제시'라고 하지 않고, '상응하는 바른 수행이 두드러지도록 제시'라고 했음을 기억하자. 그 이유는 뒤에 나올 것이다.
그렇다면 위와 같이 상응시킨 것으로 봐야 하는 까닭은 뭔가? 위와 같이 제시한 후, 8정도를 제시하는 도성제가 포함된 사성제가 등장하며, 사성제를 온전히 알고 보기에 위 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천명한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도를 깨달은 것은, 위 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이 아닌가? 그렇게 볼 수 없다. 만약 8정도만이 중도라면, 사성제를 모두 거론할 필요 없이 도성제만 온전히 알고 보기에 깨달음을 천명한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결국 사성제를 거론하는 내용까지 고려하면, 초전법륜경에서의 중도는 사성제다. 8정도가 아니다. 그런데 여타의 여러 [경]에서 부처님은 물론 과거 부처님들도 연기를 깨달으셨다고 나온다. 즉 연기와 사성제는 다른 것이 아니다. 여러 [경]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다를 수 없다.
그렇다면 중도를 깨달았는데 그 중도는 8정도라고 말하는 것은 그릇된 것인가? 이 의문의 대답을 보면, '상응하는 바른 수행이 두드러지도록 제시'라고 표현한 까닭도 함께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개념을 세우면, 그 개념들이 따로 노는 경향이 있다. 개념들 사이에 애써 벽을 만들고 굳이 걸림을 만드는 것인데, 이는 사실상 연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에 나오는 발상이다.
연기는 함께 성립하는 것이다. 8정도는 업에 상응하고, 연기의 이치에 따라 과보가 함께 한다. 그래서 과보에 상응하는 "안목과 분별을 생기게 하여 그침, 번뇌의 스러짐, 평등한 지혜, 열반으로 이끈다"는 말, 그 중 특히 "안목과 분별을 생기게 하여"라는 표현이 부가된 것이다. 이것과 저것은 함께 하는 것이다. 더구나 8정도의 정견의 내용이 사성제 즉 연기이다.
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연기 그 중 특히 12연기의 형식에는 사성제 중 도성제가 없다.
도성제를 어디에서 찾는가? 환멸연기에서 찾았는가? 도성제는, 기본적으로, 12연기에서 유전연기의 문제다. 도성제의 과보가 곧바로 '괴로움의 소멸' 즉 열반이 아니다. 열반은 업의 과보가 아니다. 수행도 업이다. 좀 구별지어, '업' 대신에 '도'라고 표현한다고 행온이 아니게 되는 것이 아니다. 초전법륜경의 표현에 따라가자면, '아라한도의 과' 즉 '아라한과'는 열반으로 이끈다. "안목과 분별이 발생"해서, "그침, 번뇌의 스러짐, 평등한 지혜, 열반"으로 이끈다. 열반은 과보가 아니다. 다만 이해의 편의를 위해, 소위 연기적 사고에 익숙해지도록, 극히 초보자에게는 흡사 과보인 것처럼 설명하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
[경]을 열심히 읽은게 벌써 20년이 다 되어가서, 이름을 기억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애초에 이름을 염두에 두고 읽지도 않았다. 그거 외워서 뭐하겠냔 말이지... 당시에는 전혀 관심사항이 아닌 거지... 하지만 그 내용을 기억하는 거는 좀 된다.
여하간 어떤 [경]을 보면, 아난다 존자가 '연기를 이해했다'고 하니까 부처님께서 "그거 그리 간단한 거 아니다. 연기는 정말 심오한 거다"는 취지로 지적하시는 내용이 있다. 연기는 참으로 간단하지 않다. 도식적으로 암기한 정도로 연기를 이해한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통 책을 읽지 않아서 요즘은 어떤지 단정할 수 없지만, 20년 전에는 상좌불교 승려도 중도를 연기로 설명했다. 아마 지금도 그럴 것이다.
여기서 마치려고 한다. 초전법륜경과 관련하여 극히 초보적인 수준 그것도 논점과 관련해서만 다루었고, 분량이나 매끄러운 전개를 위해 적고 싶지만 생략한 내용이 제법 된다. 하지만 세월이 쌓이면 이래 저래 알게 될 수 밖에 없는 것들이니, 별 상관은 없으리라 본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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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방문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6.01.25 또한 우리가 번역상, "중도를 깨달았다"고 번역했지만요. "깨달았다"는 "abhisambuddha"의 번역인데요. "실현되었다"는 뜻도 가집니다. 즉 "중도는 실현되었다, 그 중도는 8정도다"는 문맥인 거예요.
이상의 내용에서요. 이상의 내용에서요. patipada는요. 존재와 길을 구별하지 않는 통합용어임을 알 수 있어요.
결국 위 본글의 [ 중도를 온전하게 깨달았다... ... 그 중도는 무엇인가? 8정도이다 ]를, 오늘날의 우리에게 가장 쉽게 와닿는 번역으로 대체하면요. [ 원만한 현존은 실현되었다... ... 그 원만한 현존은 무엇인가? 8가지 요소로 분별할 수 있는 성스러운 '삶(길)'이다 ]입니다.
뜻이 보다 구체적으로 팍팍 와닿지 않습니까? -
작성자방문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6.01.25 실제 위 본글을 적는 시간의 90% 이상이 소개하는 [경]의 일부분의 뜻을 파악하고 번역하는데 소비되었습니다. 분량은 코딱지만 하지만요. 글의 분량과 투여한 노력과 시간이 비례하지는 않아요. 저는 [경]을 제목으로 달아서, [경]에 대해 글을 적을 때에는 엄청나게 긴장합니다. 몇 차례나 밝힌 바 있지만, 저에게 [경]은 부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위와 같은 번역은, 해당 말싸움에서는 제시되기 적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 번역본을 참조하여, 불필요한 말장난이 생기지 않도록 그리하여 논점에 충실할 수 있도록 나름 신중하게 위와 같이 채택한 겁니다.
위와 같이 의미를 파악해야, 사성제 모두 나오는 아래 내용과 부합해요. -
작성자방문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6.01.25 그러한 점은 자명합니다. 의미 파악이 아주 매끄러워 집니다.
그러면요. 초전법륜경에서 지금 논점이 되는 "도성제"의 빨리어 표현을 직역하면 어떻게 되는가? [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patipada"라는 성스러운 가르침 ]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즉 [ 괴로움의 소멸로 가는 "현존"이라는 성스러운 가르침 ]입니다. 그리고 사성제의 다른 세가지와 함께 그 가르침도 실현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위 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선언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경]의 번역은 정말 어렵습니다. 사전 펼쳐 놓고, 맨 앞에 있는 뜻을 가지고 그냥 말이 되게 만들기만 하는 거면 어렵지 않죠. 그 정도가 그렇게 어려울 까닭이 뭐가 있겠어요? -
작성자방문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6.01.25 [경]의 번역은, 그런 글자 놀음이 아니예요. 그래서 어려워요. 어떤 의미에서는요. 정말 고승이 아니면, 제대로 번역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문으로 번역된 아함경과 빨리어로 이루어진 니까야는 그 내용이 대동소이합니다. 그런데 아함경은요. 말 그대로 고승들이 번역한 거예요. 빨리어 몇 년 공부하고는 사전 펼쳐 놓고 글자 장난하는 지금의 사람들과는 수준이 다른 분들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그 수준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예요.
어쨌든 이러한 측면은, 위에서 은하의 돛님이 지적한 것과 관련이 없으니까요. 지금은 더이상 적지 않고, 그만 그치도록 하겠습니다. 이게 참...뭐라고 해야 되나...참 이게요...하.. -
작성자은하의 돛 작성시간 16.01.26 충분합니다. 제가 질문하고 싶었던 것 이상의 것을 알려주셔서 대만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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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빨리어를 익히고 니까야를 문자적으로 해석 하시는 몇분 스님들께서. 장구한 세월 불법을 지탱해오던 대승의 경들과 지고한 고승들의 론을 부정하느라고 애쓰는 모습들이 있는데요... 참.. 딱한거죠.
[아함경은요. 말 그대로 고승들이 번역한 거예요. 그 수준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예요.] ..뭐 저급한 것이 고급의 사상을 뛰어넘어 계속 존속될 수는 없는거니까요. 그렇게 딱한 주장들은 고급의 론 앞에서 버텨내지 못하고 곧 스러지고 말리라 생각합니다.
댓글 읽으며...충분히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