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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기억

타력과 정토진종에 대한 단상

작성자방문객|작성시간10.11.08|조회수431 목록 댓글 16

  한국의 불자들 대다수는, 스스로 알든 모르든, "나무 아미타불"이라는 불호와 함께 타력불교를 믿는다.

  하지만 일반인에게 익숙한 타력종교는... 아마도 기독교가 아닐까 한다. 이 기독교라는 종교는, 단 한번도 기독교인이었던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어린 시절, 우리 동네에서 기독교는 거으 이방인의 종교였다. 그 정도로 아주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간다"는 말을 떠벌리는 애들이 있었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참 용감하다고 해야 하나? 누가 그런 말을 좋아하겠는가? 거으 왕따를 자초하는... 이상한 놈이란 말이지... 그런 신도를 양산하는 종교... 뭐... 허긴... 끼리끼리는 잘 놀두만...

  하루는, 그 중 한 녀석과 이야기를 나누게 됐는데, 완전 바보랑 이야기하는 느낌이었다. 말이 안통하두만...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무조건 지옥 간다는 거다... 그러면서 최후의 심판까지 이야기한다... 가관이다... 천사가 화염검을 들고 나타나 심판한다나?

  "바부냐? 천사가 화염검을 휘두르면, 가만 맞아 준데? 천사를 가만 놔둬? M16으로 쏴버리지..."

  "천사는 영적인 존재라서 죽일 수 엄어..."

  "천사를 죽일 수 없더라도, 화염검은 막을 수 있지... 화염검으로 우리를 죽일 수 있다면, 최소한 화염검은 우리가 막을 수 있고... 화염검을 막을 수 없다면, 화염검은 우리를 죽일 수 엄으니까... 그리고 천사가 우리를 죽일 수 있는 화염검을 들 수 있다면, 우리 무기로 천사를 죽일 수 있다는 거여... 완전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우리의 배신자 같으니라고... 완전 이완용이여..."

  이완용... 애들에게 최대의 모욕 중 하나다... 대충 그런 이야기가 오가고, 애가 할 말이 없으니 울먹이두만... 아~ 고소해...

 

  근데 나중에 혼자 곰곰 생각해 보니, 뭔가 찝찝하고 화딱지가 났다... 샤마니즘적 사고를 하던 놈이라, 하나님을 부정하지는 않는 편이었으니까...

  설령 지가 창조했다고 하더라도, 이따위로 꼬롬하게 만들어 놓고서... 뭔 놈의 심판? 내가 만들어도 이렇게 꼬롬하게 만들지는 않겠다... 그러니 이 놈의 하나님은 좀 손봐줘야 한단 말이지... 그러려면 뭔가 힘이 필요하다... 요따위로 창조하고선, 인간의 배신자를 양산하는 꼬롬한 녀석을 어떻게 가만 놔둘 수 있겠는가? 그래서 불교를 공부하기로 결심한다.

  자존망대... 어린 시절부터 심히 자존망대한데다... 결심의 과정과 목적에 비춰, 애초 타력엔 마음을 기울일 수 엄는... 그런 녀석...

 

  찾아가진 않지만 다가오는 기독교인의 울화통을 심히 건드리는... 이놈의 기독교인들은 다가가지 않아도 잘만 다가오더란 말이지... 가끔씩 심심하면 일부러 교회 따라가서 예배하는 목사랑 싸우는... 싸우기 위해 필요하면, 기독교 공부도 불사하는...

  15년 가량을 그와 같이 기독교에 대한 악의를 가지고 살았다. 한번 물면 놓지 않는 집요한 성격... 그러던 어느날, 적은 바 있듯, 스스로 묻고 답하던 중 "내가 이 세상을 창조해도 이보다 더 잘할 수 없다"고 알게 된다. 기독교인과 싸우기 전에, 스스로에게 늘 있던 자부심, 스스로를 정당화시킬 수 있던 자부심이 깨져 나갔다. 그리고 그러한 앎에 따르는 몰아경을 체험한다... "빛 그 자체"라고 이름할 것만이 드러나는 체험... 아마도 이미 불자가 아니었다면, 사울이 바울로 거듭나듯, 맹렬 기독교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후 기독교에 대한 일체의 공격은 중지하게 되었다...

 

  삼매란, 형성이다... 삼매의 목적을 가지고, 집중을 강화하여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가로 놓인 벽을 뚫는 것이다. 그런데 일종의 단순한 회개? 회개만으로, 벽을 뚫는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인과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말하자면... "15년간의 지속적 악의"가 바로, "빛 그 자체"의 드러남과 관련한 "숙선"이다. "기독교에 대한 믿음"에 부족하지 않게, "기독교에 대한 악의"조차 일종의 "숙선"이다. "돌아온 탕아"... 그러나 숙선이 있다고 하여, 무조건 돌아온 탕아일 수 있는 건 아니다. 탕아가 어떻게 돌아올 수 있었는지 설명할 수는 없다... 15년간의 지속적 악의를 놓는 순간, 순간적으로 표면의식과 관련한 외적 대상을 찾을 수 없었던 듯 하다. 하지만 평소라면, 삼매에 들기 전에 외적 대상을 찾아내지 않던가? 삼매를 발생시킬 어떠한 직접적 원인도 없다. 그러니 타력을 말할 수 밖에 없다...

  타력은 비약이며, 그러하기에 그 직접적 원인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드러남과 관련하여, 스스로 그 무엇도 직접적으로 행한 바 없기 때문이다.

 

  위와 같이 돌아온 탕아가 사실적일 때, 우연히 정토진종에서 말하는 다음의 내용을 보았다.

  극악인이야 말로, 극락왕생의 "바른" [인 : 주된 조건]이다... 선인도 극락왕생할 수 있으니, 악인이라면 더더욱 극락왕생한다...

 

  숙선의 내용... 15년간의 지속적 악의... 그리고 "빛 그 자체의 드러남"...

  숙선의 내용에 따라, 드러날 바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타력이라고 하여, 다 같은 타력인 것만은 아니다. 비록 타력으로 비약이 있을지언정, 숙선조차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과의 이치상 같을 수 없다. [이종신심에 따른 "숙선의 내용"]과 [기독교에 대한 15년간의 지속적 악의라는 "숙선의 내용"]이 같을 수는 없다.

 

  내가 아는 정토진종은, 용수님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극히 제한적인 앎이다. 그래서 그와 관련하여 세부적으로 적을 자격이 없다. 그러한 앎이 없으니까... 뭐... 과거 간략히 적은 바가 있긴 하지만...

  정토진종은, 불법에 반하지 않는다. 다만 용수님한테 배웠을 뿐일지라도, 전적으로 용수님 견해에 동의하진 않는다. 대표적인 것 하나를 아래에 적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칠까 한다.

  신심결정이 된다고 하여, 부처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극락의 중생은, 부처가 아니다. 중생이다. 극락에도 중생이 있다. 신심결정은 극락왕생의 "인"을 결정할 뿐이다. 그리고 신심결정 이후 금생의 삶은, 극락의 중생에 준하여 수행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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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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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방문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11.09  정토 계열 경전군에 나오는 내용과 관련하여, 그러한 지적을 한 겁니다. 아무래도 정토 계열 경전군을 읽은 분들이 있으니까요... 저 같은 경우, [경]을 침범하지 않는 범위에서 서술하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경]이 일견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는 서로 아귀가 들어맞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그렇단 말이죠... 무협지식으로 표현하자면, "(다 같은 물일지라도) 우물물이 강물을 침범하지 않는다"와 같은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거죠.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은 경우, "(다 같은 물일지라도) 우물물이 강물을 침범하지 않는다"를 살피면서 접근하는 일이 좀 어려운 경우가...그래서 혼동이 발생하기 쉬운 거죠...
  • 작성자방문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11.09 ======
     불법과 관련하여 글을 읽을 때, 불법은 모두 연기를 설명하는 것이지만, 불법도 연기에 따라 성립해 있습니다. 연기를 살피는 것은, 조건을 살피는 것인데요... 불법 자체를 접할 때에도, 조건을 살펴야 하는 거죠.
     [무엇을 보든, 조건을 보라]는 말씀에서...무엇에는, 불법도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불법을 제외한 여타의 것"이 아닌 거죠...
     배우는 입장에서는, 조건을 살피기 어려운 측면이 많습니다. 불법에 따라 수행하려고 하지, 불법 자체를 배우는 일에서의 수행은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편이거든요. 그래서 방편의 의미를 놓치고, 절대시하게 된단 말이죠... 절대시, 여기서는 "일반화시켜 나간다"는 뜻입니다...
  • 작성자방문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11.09 ======
     
     종종 적은 편이지만, 제 글도 조건에 따라 있습니다. 그 무엇이든...그것을 소위 ["있는 그대로" 안다]는 것은, [그것의 조건을 안다]는 겁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을 안다]는 것도,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의 조건을 안다]는 겁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에서조차 그러한데...하물며 중생인 불자가 스스로 드러낸 견해에 대해서는, 별 달리 말할 바도 없을 겁니다.
     
    ======
  • 작성자방문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11.09  연기는 그 무엇이든 담는 그릇입니다. 그리고 담긴 것은 형성이죠. 업과 그 과보입니다. 동시에 업과 그 과보를 떠나, 연기라는 그릇도 없습니다. 그릇이 먼저 있는 것은 아니예요.
     우리에게 드러나 알려지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은, 과보입니다. [경]은 과보로 있는 거예요. 물론 과보를 수온으로 제한해서 접근하면, 그러한 표현이 가능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최소한 업에 따른 결과물인 것은 분명하죠... 업 대신에 서원 내지 원력이라는 표현을 쓰더라도, 본질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수행은 형성인데...어떤 기법이든, 그 어떤 종파의 가르침을 근본으로 하든, 수행은 형성인데요...법은 수행의 의지처이구요.
  • 작성자방문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11.09 수행의 의지처를 소위 있는 그대로 안다는 것은, 숙선의 내용에 영향을 미치지 않겠습니까? 숙선의 내용에 영향을 미친다면, 곧 업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고...그 과보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겁니다.
     연기를 살피면, 즉 조건을 살피면...조건은 업보를 담고, 조건이 업보보다 먼저 있는 것은 아니기에...조건의 내용을 살피는 일이 됩니다. 어떻게 보면, 내용이 먼저 있고 그릇이 있는 건지도 몰라요. 그릇은 방편으로 제시된 거니까요...
     
     어떤 긴장이 있는데요...
     ["수행의 의지처"인 "법"]의 조건을 살피는 것...이러한 작업은, 그 법에 의지한 수행의 추진력을 약화시키거나 상실하게 할 수도 있구요, 강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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