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일리천(一利川) 전투는 현 산동성 임기시
『고려사』에 따르면, 발해국(渤海國)의 세자 대광현(大光顯)이 934년 7월에 무리 수만(數萬)을 거느리고 내투(來投)하였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또 겨울 12월 발해(渤海)의 진림(陳林) 등 160인이 귀부(歸附)해 왔다."
상기한 기록에 나타나는 배주(白州)는 어디인가?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서해도(西海道)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 해주(海州)에 염주(鹽州)·배주(白州)·안주(安州) 등 3개 고을이 속해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성종 14년(995년)에 12주(州) 절도사(節度使)를 설치하면서 양주(楊州)를 좌보(左輔)라고 불렀고, 해주(海州)를 우보(右輔)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간 본 연구원이 고대 지명들의 본래 위치를 연구한 결과, 양주(楊州)는 백제 관미성(關彌城)이 있었던 곳으로서 백제의 도읍지 서성(西城)이었는데, 그 위치를 현재의 산동성 요성시로 추정할 수 있었으며 그 위치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림 1] 고려군 진군 추정경로와 일리천, 황산군, 광주, 전주 등 추정지역
따라서 해주(海州)는 양주(楊州)의 서쪽에 있는 지역임을 알 수 있는데,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하남성 복양시, 안양시, 학벽시, 신향현, 초작시 등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고려 서경(西京, 요동)으로 추정하고 있는 현재의 하북성 한단시를 기준으로 삼고 보면,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양주(楊州)가 좌보(左輔)이고 우보(右輔)는 현 산서성 장치시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해주(海州)는 서해도(西海道)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로서 염주(鹽州)·배주(白州)·안주(安州)·풍주(豐州) 등이 속해 있었는데, 긴 저수지가 있었으며, 남쪽에 큰 바다가 있었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서해도(西海道)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 해주(海州)는 본래 고구려의 내미홀(內米忽)[지성(池城)이라고도 하고, 장지(長池)라고도 한다.]로서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 폭지군(瀑池郡)이라 고쳤다.
태조(太祖)가 군(郡) 남쪽에 큰 바다가 있어 해주(海州)라는 이름을 내렸다. 성종 2년(983년)에 처음 12목(牧)을 설치할 때에 해주(海州)가 그 하나였다.(중략)"
또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해주(海州)가 한주(漢州)에 속해 있었던 폭지군(瀑池郡)이라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한주[漢州, 한산군(漢山郡)] 폭지군(瀑池郡)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내미홀군(內米忽郡)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해주(海州)이다."
즉, 한주(漢州)는 신라 9주 중의 하나인데, 신라가 고구려 남부 지역을 차지하고 가장 서쪽 지역에 설치한 주(州)로서 지명이 폭지(瀑池)였던 만큼 큰 저수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폭지군(瀑池郡)이라고 불렀던 해주(海州)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적절한 근거가 추가로 더 발견되거나 독립적인 별도의 논리로서 해주(海州)의 위치를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로 추정할 수 있다면, 해주(海州)의 위치가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였다는 추정이 보다 견고하게 수용될 수도 있으며, 그간 사라지거나 왜곡된 역사를 올바르게 복원할 수도 있으므로 사서(史書) 기록들을 좀더 끈질기고 의연하게 관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삼국유사』 고조선(왕검조선)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본래 고죽국[孤竹國, 지금의 해주(海州)]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고죽국(孤竹國)이 고려 시대 해주(海州)]였다면, 고죽국이 서기전 1046년경에 바로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에 있었음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또 그간 본 연구원이 고대 지명들의 본래 위치를 연구한 결과, 『사기』,『한서』, 『후한서』 등에 한(漢) 무제(武帝) 유철이 서기전 109~8년 기간 중에 대(代)와 연(燕), 제(齊) 등을 동원하여 위만조선(魏滿朝鮮)을 공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당시 왕검성(王儉城)의 위치를 현재의 하남성 안양시 주변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즉, 위만조선(魏滿朝鮮) 왕검성(王儉城)의 위치로 부터 단군조선, 고죽국, 부여, 위만조선, 고구려·백제·신라·가야, 고려, 조선 등 일련의 역사를 연결하여 우리 민족의 통사(通史)를 풀어갈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한편, 『삼국사기』 견훤(甄萱) 열전에 따르면, 견훤이 934년 1월에 운주(運州)를 공격하였으나, 패했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고려 태조(太祖) 17년(934년) 봄 정월 견훤(甄萱)이 태조가 운주(運州)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드디어 군사 5천 명을 선발하여 이르렀다.
(고려) 장군 유금필(庾黔弼)이 그들이 미처 진을 치지 않았는데 굳센 기병 수천 명으로 돌격하여 3천 명을 베어 죽였다.
웅진(熊津) 이북 30여 성이 소문을 듣고 스스로 항복하였다. 견훤(甄萱) 휘하의 술사(術士) 종훈(宗訓), 의사(醫師) 훈겸(訓謙), 용감한 장수 상달(尙達)과 최필(崔弼) 등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그러나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태조 왕건이 봄 정월이 아니라 9월 20일에 직접 운주(運州)를 공격하였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고려 태조(太祖) 17년(934년) 9월 20일 왕이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운주(運州)를 공격하여 견훤(甄萱)과 싸워 크게 이기자, 웅진(熊津) 이북의 30여 성이 풍문(風聞)을 듣고 스스로 항복하였다."
즉, 『고려사』에는 9월 20일이라고 날짜까지 기록되어 있으므로 『고려사』의 기록이 더 정확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934년 9월에 '운주(運州) 내의 30여 군현(郡縣)이 태조(太祖)에게 항복하였다.'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앞서 7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운주(運州)라는 곳은 양광도(楊廣道)에 속하는 지명인데, 성종(成宗) 14년(995년)에 경내(境內)를 나누어 10도(道)로 만들 때, 양주(楊州)·광주(廣州) 등의 주현(州縣)은 관내도(關內道)에 속하였고, 충주(忠州)·청주(淸州) 등의 주현은 충원도(忠原道)가 되었으며, 공주(公州)·운주(運州) 등의 주현은 하남도(河南道)가 되었었다고 한다.
즉, 운주(運州)는 공주(公州)와 더불어 하남도(河南道)를 구성하고 있었으므로 서로 인접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 공주(公州, 신라 웅주)로 추정할 수 있는 현재의 산동성 동평현 인근주변 주요 도시 중에서 운주(運州)로 추정할 수 있는 지역은 현재의 산동성 제녕시인데, 그 위치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다.
이어서『고려사』에 따르면, 견훤(甄萱)의 첫째 아들 신검(神劒)이 935년 3월에 반란을 일으키자 견훤(甄萱)이 6월에 도망쳐서 고려로 내투(來投)하였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고려 태조(太祖) 18년(935년) 봄 3월 견훤(甄萱)의 아들 신검(神劒)이 그 아비를 금산사(金山寺)에 유폐(幽閉)시키고 아우 금강(金剛)을 죽였다.
처음 견훤(甄萱)에게는 잉첩(媵妾)이 많아 아들이 10여 인이 있었는데, 넷째 아들 금강(金剛)이 키가 크고 지혜도 많아서 견훤이 특히 사랑하여 왕위를 전하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그의 형 신검(神劒)과 양검(良劒)·용검(龍劒) 등이 이를 알고서 근심하고 고민하였다.
이 때 양검(良劒)과 용검(龍劒)은 변방에 나가 있고 신검(神劒)이 홀로 (견훤의) 곁에 있었는데, 이찬(伊粲) 능환(能奐)이 사람을 시켜 양검·용검과 함께 음모하여 신검(神劒)에게 난을 일으키도록 권하였다."
그런데 윗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견훤(甄萱)이 금산사(金山寺)를 탈출하여 나주[羅州, 금성(錦城)]으로 피신하였다가 뱃길로 고려 왕경(王京)으로 내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앞서 3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나주(羅州)는 신라 시대 금성(錦城)으로서 현재의 산동성 하택시로 추정할 수 있었으며, 그 위치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다.
다시 말해서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신라시대 9주 중의 무주(武州)에 속하는 금산군(錦山郡)은 고려 나주(羅州)라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무주(武州) 금산군(錦山郡)은 본래 백제(百濟)의 발라군(發羅郡)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나주목(羅州牧)이다. 거느리는 현(領縣)은 3개이다.(중략)"
또 『고려사』 지리지에도 나주(羅州)는 신라 시대 금산군(錦山郡)이었으며, 금성(錦城)이라고도 불렀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나주목(羅州牧)은 본래 백제(百濟)의 발라군(發羅郡)으로서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때 금산군(錦山郡)으로 고쳤다. 신라 말(羅季)에 견훤(甄萱)이 후백제왕(後百濟王)을 칭하며 그 땅을 모두 차지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을 사람들이 후고려왕(後高麗王) 궁예(弓裔)에게 귀부(歸附)하였다.
궁예는 태조(太祖, 왕건)를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임명하여 수군(舟師)을 이끌고 공격하여 차지하도록 한 뒤, 나주(羅州)로 고쳤다.
성종(成宗) 14년(995년)에 처음 10도(道)를 정하면서 진해군절도사(鎭海軍節度使)라 부르고, 해양도(海陽道)에 소속하였다.
현종(顯宗) 원년(1010년)에 왕이 거란군(丹兵)을 피하여 남쪽으로 내려가 나주(羅州)에 이르러서 열흘 동안 머물다가, 거란군이 패하여 물러가자 (왕이) 다시 수도로 돌아왔다. (현종) 9년(1018년)에 승격시켜 목(牧)이 되었다. 별호(別號)는 통의(通義)·금성(錦城)[성종(成廟) 때 정하였다.]이다.(중략)"
즉, 견훤(甄萱)이 나주(羅州)를 거쳐 고려 왕경(王京)으로 피신한 경로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추정할 수 있다.
"고려 태조(太祖) 19년(936년) 여름 6월 견훤(甄萱)이 요청하여 말하기를, '늙은 신하가 멀리 바다를 건너 성군(聖君)의 교화(敎化)에 내투(來投)하였으니, 바라건대 그 위엄에 기대어 역적 아들을 베고자 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처음엔 때를 기다려서 움직이고자 하였으나, 그의 간절한 요청을 불쌍히 여겨 그의 의견을 따랐다. 먼저 정윤(正胤) 왕무(王武)와 장군(將軍) 박술희(朴述希)를 보내 보병과 기병 10,000명을 거느리고 천안부(天安府)로 나아가게 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19년(936년) 가을 9월 왕이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천안부(天安府)에 이르러 병력을 합하고 일선군(一善郡)으로 나아가자, 신검(神劒)의 병사들이 막아섰다."
그런데 고려 태조 왕건이 936년 가을 9월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천안부(天安府)를 거쳐 일선군(一善郡)으로 진군하였는데, 과연 천안부(天安府)과 일선군(一善郡)은 어디였는가?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천안부(天安府)는 양광도(楊廣道)에 속해 있는데, 천안부(天安府)는 삼국(三國)의 중심에 있으며, 태조가 설치하였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양광도(楊廣道) 천안부(天安府)는 태조(太祖) 13년(930년)에 동·서도솔(東西兜率)을 합하여 천안부(天安府)로 만들고, 도독(都督)을 두었다.[민간에 전하기를, 술사(術師) 예방(藝方)이 태조에게, '(이곳은) 삼국(三國)의 중심으로서 다섯 마리 용이 구슬을 다투는 형세이니, 만약 큰 고을(大官)을 설치한다면 후백제(百濟)가 스스로 항복할 것입니다.'라고 아뢰니, 태조가 곧 산에 올라 둘러본 후, 처음으로 부(府)를 설치하였다고 한다.]
성종(成宗) 14년(995년)에 환주도단련사(懽州都團練使)로 고쳤다. 목종(穆宗) 8년(1005년)에 단련사를 폐지하였다. 현종(顯宗) 9년(1018년)에 옛 이름을 복구하고, 지부사(知府事)가 되었다.(중략)"
또 천안부(天安府)에 소속된 7개 현 중에서 직산현(稷山縣)에 백제 위례성(慰禮城)이 있었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천안부(天安府)에 속한 직산현(稷山縣)은 본래 위례성(慰禮城)으로, 백제(百濟) 시조 온조왕(溫祚王)이 개국하면서 (이곳에) 도읍을 세웠다. 뒤에 고구려(高句麗)가 (이곳을) 차지하여, 사산현(蛇山縣)으로 고쳤으며, 신라(新羅)가 그대로 이어받아 백성군(白城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현종(顯宗) 9년(1018년)에 (천안부에) 내속(來屬)하였다.(중략)"
그런데 그간 본 연구원이 도대 지명들의 본래 위치를 연구한 결과, 백제 위례성(慰禮城)이 있었던 곳은 현재의 산동성 제남시로서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추정할 수 있었다.
즉,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양광도(楊廣道)에 광주목(廣州牧)이 속해 있는데, 광주목(廣州牧)에도 백제 위례성(慰禮城)이 있었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양광도(楊廣道) 광주목(廣州牧)은 처음에 백제(百濟)의 시조(始祖) 온조왕(溫祖王)이 한(漢) 성제(成帝)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년)에 나라를 세우고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하였다.
(홍가) 13년(기원전 8년)에 이르러 한산(漢山(현 산동성 태산으로 추정) 아래로 가서, 목책(木柵)을 세우고 위례성(慰禮城)에 민호(民戶)를 이주시켜 궁궐을 짓고, 그곳에 살게 하였다. 이듬해 도읍을 옮겨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불렀다. 근초고왕(近肖古王) 25년(370)에 이르러 남평양성(南平壤城, 현 산동성 덕주시로 추정)으로 도읍을 옮겼다.
신라(新羅) 태종왕(太宗王) 때에 이르러, 김유신(金庾信)을 보내 당(唐) 장수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백제를 협공하여 멸망시켰다. 뒤에 당(唐)의 군대가 돌아가자 문무왕(文武王)이 점차 그 땅을 수복하여 한산주(漢山州)로 이름을 고쳤으며, 또 남한산주(南漢山州)로 고쳤다. 경덕왕(景德王) 15년(756년)에 이름을 한주(漢州)로 고쳤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23년(940년)에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성종(成宗) 2년(983년)에 처음으로 12목(牧)을 설치했는데, 한주(漢州)도 그 중의 하나이다. (성종) 14년(995년)에 12주 절도사(節度使)를 두면서 봉국군(奉國軍)이라 부르고, 관내도(關內道)에 소속시켰다. 현종(顯宗) 3년(1012년)에 (절도사를) 폐지하고 안무사(安撫使)가 되었다. (현종) 9년(1018년)에 8목(牧)을 정하면서 그대로 목관(牧官)이 되었다.(중략)"
즉, 양광도(楊廣道) 천안부(天安府)에 속한 직산현(稷山縣)에 위례성(慰禮城)이 있었으며, 양광도(楊廣道) 광주목(廣州牧)에도 위례성(慰禮城)이 있었으므로, 천안부(天安府)의 위치는 광주목(廣州牧)에 인접한 지역으로서 바로 현재의 산동성 제남시 주변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천안부(天安府)는 고려 태조 왕건이 930년에 만든 것이고, 광주(廣州)라는 지명은 태조가 940년에 지었는데, 현종(顯宗) 9년(1018년)에 8목(牧)을 정하면서 광주목(廣州牧)이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현종(顯宗) 9년(1018년)에 8목(牧)을 두고, 5도(五道)·양계(兩界)를 정했는데, 5도(五道)·양계(兩界)를 기준으로 『고려사』 지리지가 써졌으며, 천안부(天安府)가 광주목(廣州牧) 인근 지역에 있었으므로 천안부(天安府)는 광주목(廣州牧)이 관할하는 지부사(知府事)가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려사』 지리지에는 천안부(天安府)가 양광도(楊廣道) 청주목(淸州牧)에서 관할하는 지부사(知府事)로 기록되어 있다.
또 『고려사』 지리지에는 청주목(淸州牧)에서 관할하는 지사군(知事郡)이 1개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공주(公州)와 홍주(洪州) 등 2개가 지사군(知事郡)으로 딸려서 기록되어 있다.
즉, 『고려사』 지리지에서 서쪽 국경지역에 있었던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 등주(登州)가 동쪽에 있는 동계(東界)에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소속된 주현(州縣) 등의 위치가 왕왕이 뒤바뀌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무튼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태조(太祖) 왕건이 936년 가을 9월에 삼군(三軍)을 이끌고 천안부(天安府)를 거쳐 일선군(一善郡)으로 진군했는데,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일선군(一善郡)은 경상도(慶尙道) 상주목(尙州牧)에 포함되어 있다.
즉,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9주 중의 상주(尙州)는 신라 왕경(王京) 월성의 동북지역이므로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산동반도 주변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상주목(尙州牧)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경상도(慶尙道) 상주목(尙州牧)은 본래 사벌국(沙伐國)으로, 신라(新羅) 첨해왕(沾解王) 때 차지하여 주(州)로 삼았다. 법흥왕(法興王)이 상주(上州)로 고치고, 군주(軍主)를 두었다. 진흥왕(眞興王) 때 주(州)를 폐지하고 상락군(上洛郡)이 되었다.
신문왕(神文王) 때 다시 주(州)를 두었다. 경덕왕(景德王) 때 상주(尙州)로 고쳤다가, 혜공왕(惠恭王) 때 다시 사벌주(沙伐州)가 되었다.
태조(太祖) 23년(940년)에 다시 상주(尙州)로 고쳤으며, 그 후 다시 안동도독부(安東都督府)로 고쳤다. 성종(成宗) 2년(983년)에 처음으로 12목(牧)을 설치했는데, 상주(上州)도 그 중 하나였다.(중략)"
또 상주목(尙州牧)에 7개 군(郡)과 17개 현(縣)이 속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일선군(一善郡)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경상도(慶尙道) 상주목(尙州牧) 일선현(一善縣)은 본래 신라(新羅)의 일선군(一善郡)으로서 진평왕(眞平王) 때 승격시켜 주(州)가 되었고, 군주(軍主)를 두었다. 신문왕(神文王) 때 주(州)를 폐지하였다. 경덕왕(景德王) 때 숭선군[嵩善郡, 신라 상주(尙州) 소속]으로 고쳤다.
성종(成宗) 14년(995년)에 선주자사(善州刺史)가 되었다. 현종(顯宗) 9년(1018년)에 (상주목에) 내속(來屬)하였다. 인종(仁宗) 21년(114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령(縣令)을 두었다. 뒤에 승격시켜 지선주사(知善州事)가 되었다.
별호(別號)는 화의(和義)[성종(成廟) 때 정하였다.]이다. 금오산(金烏山)이 있다."
그런데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경상도(慶尙道) 진주목(晉州牧)에 속하는 현(縣) 7개 중에 영선현(永善縣)이 포함되어 있는데, 영선현(永善縣)이 신라 시대에 일선현(一善縣)이었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경상도(慶尙道) 진주목(晉州牧) 영선현(永善縣)은 본래 신라(新羅)의 일선현(一善縣)으로서 경덕왕(景德王) 때 이름을 상선(尙善)으로 고치고, 고성군[固城郡, 신라 강주(康州, 청주)에 소속]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현종(顯宗) 9년(1018년)에 (진주목에) 내속(來屬)하였다."
즉, 신라시대 일선군(一善郡)은 현(縣)이 되기도 하고 주(州)가 되기도 했는데, 상주목(尙州牧)과 진주목(晉州牧)의 경계 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종(顯宗) 9년(1018년)에 상주목(尙州牧)에 내속(來屬)하였다는 기록과 진주목(晉州牧)에 내속(來屬)하였다는 기록이 서로 상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 태조 왕건이 일선군(一善郡)으로 진군했다는 것은 상주목(尙州牧)과 진주목(晉州牧)이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역으로 군대가 진군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지 않겠는가?
즉, 고려 태조 왕건은 천안부(天安府)와 일선군(一善郡)을 거쳐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진군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간 본 연구원이 고대 지명의 위치를 연구한 결과, 상주목[尙州牧, 신라 상주(尙州)]과 진주목[晉州牧, 신라 강주(康州, 청주)]의 위치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각각 현재의 산동성 유방시와 안휘성 서주시로 추정할 수 있었다.
즉, 일선군(一善郡)의 위치는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산동성 유방시와 안휘성 서주시 중간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어서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고려 태조(太祖) 왕건가 지휘하는 고려군과 견훤(甄萱)의 아들 신검(神劒)이 지휘하는 반란군이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서로 진(陣)을 쳤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과연 일리천(一利川)은 어디인가?
고려 태조 왕건이 남과 북을 통합하여 고구려·백제·가야·신라·발해·부여 등 삼한(三韓)을 통일하는 엄정(嚴正)한 역사적 사건이 과연 어디서 벌어진 것인가?
그러나 『삼국사기』와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일리천(一利川)의 위치가 어디인지 별도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려군과 반란군이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서로 대치하고 진(陣)을 쳤는데, '고려 군사는 동북방(艮)을 등지고 서남쪽(坤)을 향해 진을 쳤다(王師背艮向坤而陳).'고 한다.['진(陳)'자는 '진(陣)'자의 오기로 추정됨]
즉, 일리천(一利川)은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강임을 알아챌 수 있다. 과연 이 강이 어느 강인가?
만약 일리천(一利川)에서의 전투상황를 세세하게 묘사하지 않고 단순히 이야기 꾸미듯이 쓴 기록이라면 동북 방향으로 등지던, 서북방향으로 등지던,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세하게 전투상황을 기록했을 것으로 보고 주의깊게 관찰해 보면, 일리천(一利川)의 위치를 찾는 결정적인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고려 태조 왕건이 총 8만 7천에 이르는 대병력으로 진(陣)을 치려면 틀림없이 광활한 평야지대여야만 했을 것이다.
즉, 신라 일리천(一利川)의 위치를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강소성 대아장구 앞을 흐르는 경항운하(京杭運河), 또는 신라 왕경(王京) 월성으로 추정하고 있는 현재의 산동성 임기시에서 서북쪽으로부터 흘러오는 강 등을 일리천(一利川)으로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고려사』에 따르면, 후백제(後百濟) 좌장군(左將軍) 효봉(孝奉)·덕술(德述)·애술(哀述)·명길(明吉) 등 4인은 (고려 군사의) 군세가 크게 성한 것을 보자 갑옷을 벗고 창을 던져 견훤(甄萱)이 탄 말 앞으로 와서 항복하니, 적병(賊兵)의 기세가 꺾여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고 한다.
왕이 대장군(大將軍) 공훤(公萱)에게 명하여 곧바로 신검(神劒)의 중군(中軍)을 치게 하고, 삼군(三軍)이 나란히 나아가 맹렬하게 공격하니, 적병이 크게 무너졌는데, 장군(將軍) 흔강(昕康)·견달(見達)·은술(殷述)·금식(今式)·우봉(又奉) 등 3,200인을 사로잡고 5,700여 명의 머리를 베니, 적병이 창을 반대로 돌려 (자기들끼리) 서로 싸웠다고 한다.
아군(我軍)이 (적을) 쫓아 황산군(黃山郡)에 이르러 탄령(炭嶺)을 넘어 마성(馬城)에 영(營)을 세워 머무르자, 신검(神劒)이 동생 청주성주(菁州城主) 양검(良劒)과 광주성주(光州城主) 용검(龍劒) 및 문무관료와 함께 항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삼국유사』에도 고려군 삼군(三軍)이 일시에 진군하여 협격(挾擊)하니 반란군이 무너져 달아났는데, '황산(黃山) 탄현(炭峴)'에 이르자 신검(神劒)은 두 아우와 장군 부달(富達)·능환(能奐) 등 40여 명과 함께 항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삼국사기』에 따르면, '황산(黃山)'과 '탄현(炭峴)'은 660년에 신라 김유신과 백제 계백이 전투한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바로 황산벌 전투와 같은 지역으로 볼 수 있다.
아무튼『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웅주(熊州) 황산군(黃山郡)은 본래 백제(百濟)의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으며, 지금(고려)은 연산현(連山縣)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고려사』 지리지에도 신라시대 황산군(黃山郡)이 연산군(連山郡)이 되었는데, 양광도(楊廣道) 공주(公州)에 속한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양광도(楊廣道) 공주(公州)에 속하는 연산군(連山郡)은 본래 백제(百濟)의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으로서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때 황산군(黃山郡)으로 고쳤다.
고려(高麗) 초에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현종(顯宗) 9년(1018년)에 (공주에) 내속(來屬)하였다.(중략)"
그런데 '황산(黃山)'과 '탄현(炭峴)'은 전투가 벌어진 곳이 아니라, 고려 태조 왕건이 황산군(黃山郡) 지역에 있는 '탄령(炭嶺)'을 넘어가서 '마성(馬城)'이란 곳에 영(營)을 세워 머무른 장소로 볼 수 있다. 즉, 전투가 거의 마무리된 후, 신검(神劒)의 항복을 받기 위해 영(營)을 세운 장소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견훤(甄萱)의 둘째 아들 양검(良劒)이 청주성주(菁州城主)였는데, 청주(菁州)는 신라 9주 중의 강주(康州, 청주)였으며, 고려 경상도(慶尙道) 진주(晉州)가 된 곳으로서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안휘성 서주시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견훤(甄萱)의 셋째 아들 용검(龍劒)이 광주성주(光州城主)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광주(光州)는 신라 9주 중의 무주(武州)였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신라) 무주(武州)는 본래 백제(百濟)의 땅이었다. 신문왕(神文王) 6년(686년)에 무진주(武珍州)로 삼았는데, 경덕왕(景德王)이 무주(武州)로 고쳐 삼았다. 지금은 광주(光州)이다. 거느리는 현(領縣)은 3개이다.(중략)"
즉, 광주(光州)는 신라 9주 중의 무주(武州)였음을 알 수 있는데, 광주(光州)는 무주(武州)로서 웅주(熊州)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동시에,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라 지역에 두었던 강주(康州, 청주)의 서쪽 지역에 있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옛 백제 땅에 둔 3개 주 중에 무주(武州)는 웅주(熊州)의 남쪽에 두었으며, 전주(全州, 완산주)는 서남쪽에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간 본 연구원이 신라 9주(州)의 위치를 연구한 결과, 무주(武州)는 웅주(熊州)의 서남쪽, 전주(全州, 완산주)는 웅주의 동북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한편, 신검(神劒)이 동생 청주성주(菁州城主) 양검(良劒)과 광주성주(光州城主) 용검(龍劒) 및 문무관료와 함께 항복하였는데, 고려군은 청주성(菁州城)과 광주성(光州城)을 비롯하여 반란군 도읍지를 마저 함락시켰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견훤(甄萱)이 반란군 도읍지로 삼고 있었던 곳은 전주(全州)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전주(全州)의 위치는 앞서 7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공산(公山) 전투가 있었던 현재의 안휘성 육안시 수현(壽縣)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태조 왕건은 전투에 승리했음을 확신하고 황산군(黃山郡)으로 가서 영(營)을 세워 머무르다가, 신검(神劒)의 항복을 받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비로서 고려 태조(太祖) 왕건이 936년 9월 8일(음) 남북통일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양력으로는 936년 9월 26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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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광화세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7.08.30 카오스 영화를 만들어야 역사교육의 파급성을 높일 수 있지요. 영화가 왜 삶을 희화하하는 것인가요?
남북조 시대 陳(진나라)가 왜 나옵니까? 시대가 다른데. . 또 南陳의 建康(건강=현,강소성남경)은 변이된 것이지요. 현 호북성 악주시로 추정합니다. 요녕성 요양을 생각하시면서 상기한 제 글을 보시니 궤변이 되고 있어요. -
답댓글 작성자카오스 작성시간 17.08.30 광화세계 예,...'南陳의 建康(건강=현,강소성남경)은 변이된 것'이라는 말씀하셨는데,...'아주 신선한 말씀'이네요...
즉, 현재의 모든 역사연구자들이 모두 아직은 '꿈에도 생각치 못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광화님과 카오스는 이점에서 일단 의견일치하고 있어서 다행입니다...[물론 이러한 추론을 하게된 경로는 아마 각자가 많이 다를것으로 여겨지니 다음에 더 깊이 논하기로 하지요..]
그러나... '본문에서의 陳(진나라)은 이미 변이(지명이동)된 이후의 위치를 말하고 있는 것이므로 카오스의 지적이 정당하다'는 것을 다시 말씀드립니다...아울러 이를 '궤변'으로 보시는 것은...아무래도 '시제에 대한 이해력이 부족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
답댓글 작성자광화세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7.08.30 카오스 이해가 부족하여 공부하고 있지요.
그런데 건강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왕건이 그리로 간 것이가요?
건강에는 누구 왕궁이 있었나요? -
답댓글 작성자카오스 작성시간 17.09.15 광화세계 [조금 오래 지나서 다시보니] 결국,. 카오스가 드린 '橫等也山=連山'이라는 힌트를 무시하고서 [아니, 무슨 의미인지?를 모르셨을 것이지만(?)], '黃山(누런산)'을 아무데나 적당히 이름붙여두고 마셨군요. 한마디로 '쯔쯔쯔'입니다만, '판타지드라마' 만드는데에는 아무렴 어떻겠습니까? 어디인들 무관할 터이니....마지막 힌트 하나 더 드리고 그만하지요..
먼저,.. [인터넷 네이버한자사전]을 펴세요.
즉,'[橫(가로,횡 héng)] = [木(나무,목) + 黃(방어할,황)] => 나무(木)로 방어(黃)함 '이 됩니다,..따라서 비록 그 수단이 나무이든 나무가아니든 서로 다를지라도 '방어한다'라는 의미에서는 '橫(횡,héng)자=黃(황,huáng)자'로 서로같음 -
답댓글 작성자광화세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7.09.15 카오스 대단하시군요.
그런데 황산이 어디인가요?
제 의견이 틀렸다고만 하지 마시고 답이 어딘가요?
의견은 서로 다를 수도 있지요.
본인 의견은 어디인지 밝히지도 못하면서 맞네 틀렸네하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