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리를 회심케 만든....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1)
이 서신은 신약에서 가장 중요한 문헌으로서 복음을 가장 순수하게 표현하고 있는 책이다.
이 서신은 그리스도인이 시간을 들여서 한 단어 한 단어를
마음 속에 새겨둘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날마다 묵상할 가치도 있다.
이 서신은 영혼의 일용할 양식이며
아무리 자주 읽거나 많이 연구한다고 해도 결코 지나칠 수 없다.
당신이 이 서신을 더 많이 탐구하면 할수록
이 서신은 보다 더 귀하게 되며 그 향기가 더 좋아질 것이다.
이 서신은 그 핵심에 있어서
성경 전체를 조명하기에 거의 충분할 정도로 밝게 빛나는 등불이다.
먼저 용어를 익히는 것이 필요하다.
율법, 죄, 은혜, 믿음, 의, 육, 영과 같은 단어들을 통해 바울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야 한다.
1) “율법”은 믿음으로 성령으로 성취하고 굳게 세운다.
“율법”이라는 용어를 일상적인 의미로, 즉 어떤 행위들이 허용되어 있거나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설명해주는 그 무엇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당신의 내면의 확신들을 따라 판단하신다.
하나님의 율법은 당신의 마음 속에서 성취되어야 한다.
2장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을 모두 죄인이라고 단언한다.
아무도 율법을 “행위”를 통하여 지키지 못한다.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2:1, 22).
당신이 형벌이 두렵거나 보상을 바라고 율법을 지킨다고 한다면
당신은 자유로운 선택과 율법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못해서 그리고 강제 아래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이 되고
만약 율법이 없다면 당신은 다른 식으로 행동했을 것이다.
이로부터 논리적 결론은 당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당신은 율법을 미워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당신 자신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당신은 당신이 가르치는 것을 알고 있지 않으며
율법의 본질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7장(:14)에서 바울이 율법을 영적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율법이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라면
우리의 행위는 그 요구를 충족시켜야 할 것이기 때문에 영적이다.
하지만 율법이 영적이기 때문에
당신이 행하는 모든 것이 당신의 내적인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다면
아무도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
그러한 마음은 오직 하나님의 영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며,
이 영은 우리로 하여금 율법의 요구들을 감당할 수 있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을 행하고자 하는 진정한 소원을 얻게 되고
모든 것은 두려움이나 강제 아래에서가 아니라 기꺼운 마음으로 행해진다.
그러므로 율법이 명하는 것을 행하는 것과 율법을 성취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생각에 익숙해져야 한다.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요구사항들을 기쁘고 사랑스럽게 충족시켜야 한다.
마치 율법이나 그 형벌들이 존재하지 않는 양
율법에 대한 속박감을 느끼지 않고 덕스럽고 올바른 삶을 살아라.
그러나 이 기쁨, 이 속박받지 않는 사랑은
바울이 5장(:5)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성령에 의해 우리 마음 속에 주어진다.
성령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진다.
마찬가지로 믿음 자체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복음을 통해서만 온다.
이 복음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한다.
우리는 믿음 만이 우리를 의롭게 하며 율법을 성취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이것은 믿음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 얻어진 영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영은 우리에게 율법이 목표로 하고 있는 행복과 자유를 준다.
그리고 이것은 선행이 진실로 믿음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이 바울이 율법의 행위를 정죄한 후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성취한다고 말하고 있는 3장(:31)의 의미이다.
- 『루터의 로마서 주석』, pp 15-18
2) “죄”는 외적 행위들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행위를 하도록 유인하거나 촉발시키는 모든 상황들을 말한다.
외적으로 아무것도 행해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여전히 몸과 영혼의 완전한 파멸에 떨어져 있을 수 있다.
특히 성경은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보며 모든 죄의 뿌리이자 근원,
즉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의 불신앙을 바라본다.
믿음만이 우리에게 명백하게 선한 행위들을 행하고자 하는 영과 소원을 주듯이
불신앙은 죄의 유일한 원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불신앙을 따로 지적하여 그것을 죄라고 불렀다.
요한복음 16:8에서 영이 와서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할 것인데--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하셨다.
선행 또는 악행이 행해지기 전에, 그것들이 선한 열매 또는 악한 열매로 드러나기 전에
신앙 또는 불신앙이 이미 우리 마음 속에 존재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여기에 모든 죄의 뿌리, 수액, 주요한 동력이 있다.
(3)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지니시는 인자 또는 호의이다.
이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꺼이 그리스도를 주고
우리 위에 성령과 하나님의 축복을 주신다고 할 때 은혜와 은사는 서로 다르다.
바울은 5:15에서 이를 명확히 하고 있다. 우리는 은사와 영을 날마다 받아야 한다.
로마서 7장과 갈라디아서 5장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옛 욕망들과 죄악들이 여전히 우리 속에 아른거리며 영에 대항하여 싸우기 때문이다.
창세기 3장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원수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전체적으로 완벽하게 의로운 것으로 여겨질 수 있을 정도로 은혜는
충분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다른 많은 은사들처럼 파편으로 나뉘어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완벽하게 사로잡아 우리의 중보자인 그리스도의 품에 안기게 하며
은사들이 우리 속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육이 아직 죽지 않은 한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기 시작하는 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호의와 선의를 보여주신다.
(4)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일으키는 그 무엇이다.
믿음은 꿈꾸는 그 무엇, 인간적인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며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에 상응하는 체험을 갖고 있지 않은 한낱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며 더 나은 삶을 가져오지도 못한다.
하지만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일으키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우리를 변화시키며,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난다. 요한복음 1:13. 믿음은 옛 아담을 죽이고 우리를
마음과 생각과 우리의 모든 힘에 있어서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믿음은 성령이 동반된다. 오, 믿음에 이르게 되면 그것은 얼마나 생생하고 창조적이고
적극적이고 강력한 것인지, 믿음은 내내 좋은 것 외에 다른 것을 행할 수가 없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살아있고 흔들림없는 신뢰이자 신앙인데
그것이 너무도 확고하기 때문에 사람은 믿음을 인하여 천 번이라도 죽을 수 있다.
우리를 기쁘고 활기차게 만들며 하나님 및 모든 인류와이 관계에서 열심을 내도록 만든다.
이것이 성령이 믿음을 통하여 역사하는 것이다. 실제로 불로부터 열과 빛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믿음으로부터 행위를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당신 안에 믿음을 창조해주시도록 간구하라. 그렇지 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아무리 속이려고 할지라도 또는 당신의 노력과 능력이 무엇일지라도
당신은 언제나 믿음이 부족하게 될 것이다.
- 마틴 루터, 『루터의 로마서 주석』, pp 18-21에서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오직주를사랑 작성시간 16.04.09 로마서가 깊긴 깊어요, 아시겠지만 복음의 길은 명확하고 선명하며 정확한 진리의 길이죠.
그러나 우리도, 바울도 함부로 하나님의 경륜을 파악할수도 정의할수도 없다고 봅니다. 복음의 진리도 말이죠.
그런가운데에도 진리에 다다르려는 노력들은 있었고, 부분적으로 인정합니다.
"이것이 성령이 믿음을 통하여 역사하는 것이다. 실제로 불로부터 열과 빛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믿음으로부터 행위를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주님의 섭리하심에 겸손의 자리를 찾습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보혈의피 작성시간 16.04.09 루터를 사람들이 종종 오해하는 것은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기치아래 종교개혁을 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후대 사람들의 오해입니다.
루터야 말로 '믿음으로부터 행위를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라고 하면서 오늘날 행함없는 믿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경종이 되고 있읍니다.
본래 루터는 선행을 강조하는 천주교 사제이었읍니다.
고행을 통한 구원에 반기를 들었지, 행함 자체를 부인하지 않았읍니다.
개신교의 시작이 루터로 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상기 할 때에 오늘날 신학교와 교회들에서 가르치는 구원파적인 교훈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좋은 글입니다. 스크랩해갑니다.